양홍원이 깨고 싶은 것
<SLOWMO>로 복귀하는 양홍원은 이제 영감이 아닌 충격을 안겨주고 싶다고 했다.
촬영 중간 즈음부터 맥주를 마시던데, 술이 필요했나?
커피도 떨어지고, 밤은 깊었는데 목이 타니까.(웃음) 마침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 금방 사 왔다.
주량이 꽤 센 편인가 보다.
정확히 세어본 적은 없지만, 약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몇 병을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주변에 워낙 술 좋아하는 친구가 많다 보니 자리를 이동하며 계속 (술을) 들이붓는 편이다.
취하면 술버릇이 걱정될 법도 한데.
술버릇? 그런 단어가 어딨나. 술에 취해 벌이는 버릇이면 결국 내 버릇이고, 내 삶인 거다. 술 마신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술에 취해도 집에 잘 들어간다.
힙합 신에서 연락이 안 되기로 유명하지 않나. 사실대로 고백하면, 혹시 오늘 ‘노쇼’할까 봐 불안했다.
다 옛날 얘기다. 요즘은 그런 일 없다.(웃음)
3일 동안 휴대폰을 꺼놓을 때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뭔가?
생활 자체가 불규칙적이다. 늦게 일어나 휴대폰을 보면 그간 쌓인 SNS와 문자메시지가 쏟아진다. 자는 동안 내가 이 세상에 ‘리셋’ 될 때까지 무수히 많은 정보와 연락이 쌓여 있는 거다. 단지 몇 시간 동안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아마 그런 사이클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였을 거다. 그 연락과 정보가 힘들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인가?
아니다. 이제 다시 그 사이클 안에 들어가고자 노력한다. 그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니까. 감사한 부분이 크다.
많은 이가 곧 발매할 앨범 <SLOWMO>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에는 진짜라고 믿는다.
물론 진짜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사실 나도 발매 시기가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다.
힙합 커뮤니티에서 이 앨범의 발매 일정이 ‘밈화’된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나? 이제 당신의 발매 소식 자체를 안 믿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휴대폰 잠수에 양치기 소년, 어쩌다 내 캐릭터가 이렇게 되었나 싶다.(웃음) 지속적으로 발매 시기가 미뤄졌으니 밈이 만들어질 만도 하다. 하지만 조급하게 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결국 내 작업 속도이기도 하고. 빨리 들려주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완성도 낮은 창작물을 보여줄 순 없지 않나.
왜 많은 이가 <SLOWMO>를 주목한다고 생각하나?
음, 이렇게 가정해보자. 늘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아슬아슬한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아티스트가 있다. 그 아티스트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앨범 이름과 수록곡 이름을 밝혔는데도 발매 소식 자체는 안 나오는 거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리스너들은 그 아티스트의 작업 의욕을 도와주고 싶을 거다. 당연하다. 좋은 음악을 듣고 싶으니까.
그 아티스트는 결국 당신을 빗댄 건가?
맞다.(웃음) 사실 그 마음이 이해는 간다. 나도 좋아하는 해외 래퍼들의 SNS 계정을 보면서 ‘얘는 SNS 활동 끊고 곡이나 얼른 내지’라는 생각을 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나 또한 그들의 좋은 음악을 얼른 듣고 싶은 마음인 거다.
주목과 기대를 받는 이 상황에서 부담감도 크겠다.
없다고는 못 하겠다. 하지만 부담감이 생기기 전부터 잘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원체 컸다.
이번 앨범에 대한 반응이 어떨 것 같나?
아마 영감보다는 충격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영감과 충격이라, 확실히 간극이 느껴지는 단어다.
영감은 어떤 앨범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키워드이지 않나. 이건 충격에 가까울 거다. 확 달라진 스타일에 내 삶도 녹여냈으니.
앨범 제목인 ‘SLOWMO’의 뜻이 궁금하다.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할 때 느린 속도로 설정하는 ‘슬로모션’이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을 삶에 적용해본 거다. 삶이라는 하나의 동영상에 슬로모션을 적용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렇게 촬영된 내 삶을 미래로 나아가면서 관조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깊숙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동영상이라는 장치로 삶을 바라본다’는 개념인 건가? 대부분의 경우 ‘일시정지’를 눌러 이야기할 텐데.
힘든 순간이 찾아온다고 해서 정지만 누른다면 삶은 결코 나아가지 못한다.
지금까지 낸 앨범 중 가장 성찰적인 형태다. 사운드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주로 100bpm대의 곡을 다룬다는 점이다. 이전부터 100bpm의 색을 음반 안에서 다뤄보고 싶었다. 이를테면 타이가의 ‘Taste’처럼. 앨범 이름처럼 느린 템포지만, 다채롭게 빚어내 ‘SLOW’라는 키워드가 주는 지루함을 깨고자 한다.
이번 정규 앨범에도 2집 <오보에> 때처럼 피처링 진이 따로 없는 것 같더라. 자전적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어서인지 궁금하다.
그런 것 같다. <오보에> 때나 <SLOWMO> 때나 결국 내 이야기만 채워져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피처링을) 부탁이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너무 없더라. 이 정도 시기면 부탁하는 쪽에도 민폐다.
생각해둔 사람은 있나?
많다. 마음 같아선 빈지노에게 피처링을 부탁하고 싶다.(웃음) 근데 이건 자전적 앨범이지, 레드 카펫은 아니지 않나. 나중에 차라리 리믹스를 내서 다양한 아티스트에게 부탁해봐야겠다.
<오보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힙합 신에서 재평가받고 있어 놀랐다. 상처와 과오를 시적인 메타포로 구현해낸 것이 눈에 띈다는 평이다.
그런가? 체감하진 못했지만, 다행이다. 앨범을 만들 때 인간으로든, 래퍼로든 담아보고 싶은 가치관 같은 게 있었다. 스스로 감정을 끄집어내고 싶어 가사 한 글자 한 글자 깊숙이 도려내고 다시 채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앨범 수록곡 중 대부분의 가사가 한글되어 있다.
맞다. 곡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영어 가사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한글 가사는 글자 하나하나를 분리할 수 있어 경제적이고 창의적인 전개가 가능했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실’이라는 곡의 가사 ‘사실’은 글자 그대로 의미도 있지만, ‘4(사)’와 ‘실’을 분리해 또 다른 전개를 펼칠 수 있다. 나로서는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세밀한 시도였다.
실버 이어링, 이어 커프, 달 모티브의 실버 네크리스,
뱅글, 실버 링 모두 Hanbyeongju, 오버솔 스니커즈 Camper,
슬리브리스 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사실 하나하나 따져가며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이게 뭐 거창한 내용도 아니고. 그냥 인생이다.
지나치게 슬픈 것도 어두운 것도 없는, 전부가 살고 있는 그런 인생.
이때 이모(EMO) 힙합 장르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까지만 해도 ‘양홍원’ 하면 붐뱁 비트에 저돌적인 랩 스타일만이 연상되는 래퍼였다.
간단히 말하면, 랩이라는 음악을 다룰 때 ‘선두 주자’의 기준을 새롭게 두게 된 거다. 어린 시절부터 투팍이나 노토리어스 B.I.G. 같은 전설의 음악을 들으며 붐뱁을 시작했지만, 그건 정석적인 ‘올드 스쿨’ 형태에 가까웠다. 나와 같은 나이대, 시기, 무대에선 이라면 누구나 그 음악이 주는 영향력 아래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투팍이나 노토리어스 B.I.G.의 삶을 따라갈 수 없으며, 영향을 받을 뿐 그들의 음악이 내 음악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선두 주자의 기준을 바꿨다. 바뀐 메인스트림 안에는 새로운 선두 주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 기준은 누구로 바뀌었나?
요절한 XXX텐타시온이나 주스 월드. 나와 같은 나이,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는 부분에서 내게 새로운 올드 스쿨 같은 개념이다. 이제는 그 기준을 따라 내 음악을 보여주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붐뱁의 경계를 넘어 싱잉랩도 가미한 거다.
<오보에>는 스타일의 변화와 가사적 특성 때문인지 씨잼의 <킁>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창작할 때 영향받은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당시 (씨잼과) 함께 살았으니 라이프스타일 영역 전체를 영향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기했다. 이 앨범을 내면서 처음으로 “다른 래퍼와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왜 기분이 나쁜가? 나는 씨잼을 보고 이 음반을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의 영향이 묻어난다는 말에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소스도 애매하게 버무려지면 맛없지않나. 이왕 영향받을 거면 확실히 버무려져야지.
당시 씨잼의 반응은 어떻던가?
본인은 그렇게 안들린다고 하더라.(웃음)
함께 살 정도면 꽤 깊은 사이다. 요즘도 소통하나?
<걘> 앨범이 발매될 때까지는 소통했지만, 요즘은 아예 끊겼다. 각자 삶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우리 둘 다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잘 맞았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 둘이 얘기할 때는 말이 아닌 공기로 하냐고 물을 때도 있었다.
문득 다른 래퍼에게 경쟁심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당신에게는 그런 심리가 없을 것 같다.
사실 <고등래퍼>나 <쇼미더머니> 때 말고는 거의 안 느껴본 것 같다. 음악적으로 좋은 곡을 만들고 싶지, 누군가와의 레이스를 벌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요즘 들어서는 한번 느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이젠 확실히 필요한 때인 것 같아서. 문제는 경쟁심보다 리스펙을 먼저 하게 되는 래퍼들이 많다는 점이다.(웃음)
최근 ‘25’를 피처링하며 만난 키드밀리도 그중 한 명인가? 직접 참여한 <BEIGE> 앨범이 한국대중음악상의 ‘2024 최우수 랩&힙합 – 음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만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물론이다. 자랑스럽더라. 키드밀리 형은 늘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다. 같은 레이블인데도 함께 작업 안 한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꼭 피처링하고 싶었고, 그 리스펙이 좋은 곡으로 나온 것 같아 기뻤다. ‘25’는 나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는 곡이다.
블랙 스니커즈 Asics SportStyle,
실버 링 Hanbyeongju, 실버 이어링 본인 소장품.
오른쪽_ 하운즈투스 패턴 오버사이즈
퍼 로브 Labeless,
슬리브리스 톱과 데님 팬츠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감은 어떤 앨범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키워드이지 않나.
이건 충격에 가까울 거다.
확 달라진 스타일에 내 삶도 녹여냈으니.
곡을 듣고 나니 현대 그랜저를 예찬하는 가사가 인상 깊더라. 실제로도 그랜저 IG를 탄다고 들었다.
맞다. 아버지에게 사드린 차인데, 새 차를 사드리고 내가 물려받아 타고 있다. 주행 거리가 10만이 넘었고 외관도 많이 찌그러졌지만 나름의 애정이 있는 차다. 아니, 애증이려나.(웃음)
랩스타들이 스포츠카를 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흔치 않은 모습인 건 사실이다. 20살 때부터 이 차만 타면 다 의아하게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저번에는 경찰이 물어본 적도 있다. 왜 그랜저 타냐고.(웃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족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규 1집 <Stranger> 아트워크에 가족들의 다양한 형태를 녹여냈던 것처럼.
1집 때나 지금이나 가족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어떤 시기에는 음악이 더 중요하다고 여길 때도 있었지만, 가족에 관한 일이라면 모든 일들을 멈춰야만 하는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가족을 삶의 첫 번째로 두고 산다.
질문이 얼마 안 남았다. 이전에 <오보에>의 영어 제목을 ‘3 Steps Forward, 2 Steps Back’이라고 설정했다. ‘3보 앞으로 전진 후, 2보 다시 뒤로 와 진일보했다’는 의미다. 이번 새 정규 앨범의 부제로 생각하는 문장은 없나?
‘GO SLOW’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맴돈다. 최근 트랙에 추가한 곡명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거다.
그러고 보니 꽤 긴 사유 끝에 만든 앨범명이다. 리스너들은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나?
아직 모른다. 사실 하나하나 따져가며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안든다. 이게 뭐 거창한 내용은 아니지 않나. 그냥 인생이다. 지나치게 슬픈 것도 어두운 것도 없는, 전부가 살고 있는 그런 인생. 그리고 내 스탠스, 속도. 다들 각자의 속도가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