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드라는 꽃

축하부터 해야죠. 지난 2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상을 받았어요.
마냥 좋더라고요. 존경하는 아티스트 옆에 제 이름이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어요.

맞아요. 크러쉬, 수미, 유라, 후디 등 쟁쟁한 뮤지션이 후보에 올랐죠. 평단이 남긴 글은 다 읽어봤나요?
네. 다들 제 의도를 파악해준 것이 신기했어요. 음악은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그래도 제가 담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는데 그걸 잘 짚어줬더라고요.

이번에 수상한 <BOMM>은 저드의 내면을 다룬 앨범으로 알고 있어요. 이 앨범의 콘셉트는 어디에서 출발했나요?
‘진짜 내 모습은 뭐지?’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잘 지내던 친구들과 소원해지거나, 밖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내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저를 많이 곱씹어보던 때가 있었어요.되게 외향적이고 활발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사람을 잘 안 만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죠. 진짜 내 모습을 알고 싶었고, 그 시간을 음악으로 풀어냈어요. 10개의 트랙을 쭉 들어보면 우울과 무기력이 범람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 감정을 좀 깨고 나왔나요? 어느 정도는. 하지만 또 그런 시간이 찾아오겠죠. 사람이 어떻게 늘 행복해요. 다만, 크게 무너져보고 이겨내봤기에 회복 탄력성이 많이 길러진 것 같아요. 무너지는 순간이 또 찾아오면 정면으로 마주하고 들여다보면서 음악으로 해소하지 않을까요.

앨범명이 ‘BOMM’이에요. 수록곡은 흔히 떠올리는 생기 있는 봄 이미지는 아닌데, ‘봄’으로 지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봄에 태어났어요. 다시 태어나자는 의미에서 앨범 발매일도 제가 태어난 5월로 정했죠. 또 흔히 좋은 의미로 ‘봄날은 온다’고 말하죠. 개인적으로 봄은 까다로운 계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만 해도 살짝 춥잖아요. 꽃샘추위, 미세먼지 등 불편한 게 많은 계절이지만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모습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제가 비틀어보는 ‘봄’이 제 이야기와 접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BOMM’은 ‘Back On My Mind’의 줄임말이기도 해요.

1년 전 봄과 비교하면 올봄은 확연히 다를 것 같아요. 수상도 한몫할 테고.
그러게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긴 해요. 다시 시작할 힘도 생겼고요. 앨범을 만드는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겠죠? 모든 선택에 만족하나요? 당연히 만족은 없겠죠. 100% 만족하지 못하는 건 계속 배우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또 만족을 못한다는 건 기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런데 기대를 키우며 살아가면 좋은 게 있을까요? 실망만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 요즘 기대를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희망과는 다른 이야기죠.

“꿈을 꾸기보다 당장 주어진 것을 하나씩 해나가고 싶어요.
과정을 잘 밟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무엇이라도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가장 만족스러운 걸 하나 꼽자면?
인트로에 ‘ARIA’를 넣은 건 잘한 것 같아요. 정말 신들린 듯 가사를 썼고, 하루 만에 만들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한 게 바보 같았다는 걸 표현한 트랙이에요. 앞서 말한 고민을 정리한 노래죠. 시간 순으로 따지면 마지막 트랙에 놓는 게 맞지만, 첫 번째 트랙에 배치했어요.

결말을 시작으로 연 거네요. 가사를 보면 이 앨범을 함축하고 있어 여러모로 의미 있게 들렸어요. 그런데 ‘G 선상의 아리아’를 샘플링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머릿속에 멜로디가 그려질 때가 있는데, 이 트랙도 그랬어요. 친구들에게 그 선율을 건반으로 쳐가며 무슨 노래인지 물어보니 ‘G선상의 아리아’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G선상의 아리아’에서 선상은 선율을 뜻하지만, 전 배 위에 있는 모습(선상)이 그려졌어요.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처럼 선상에서 제가 지나온 길을 관망하는 모습.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보니 평지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선상에 올라 내가 왔던 길을 봐’라는 가사로 의도한 선상의 의미를 담았어요.

곡명을 짓는 걸 봐도 단어를 중의적으로 쓰는 것 같더군요. ‘각설’도 화제를 돌리는 ‘却說(각설)’을 뜻하는 줄 알았어요.
그 각설은 아니지만,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은 맞아요. 각설이타령에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고 하잖아요. 각설이처럼 무너지는 순간도, 외로움도 계속 찾아 온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각설이처럼 또 온단다/ 이런 마음은 늘 찾아온단다/ 날 설명하려고 산단다’라는 가사가 그걸 말해주죠.

‘각설’ 외에도 곡명이 궁금증을 일으켜요. 가사를 들으면 짐작이 되긴 하지만, 곡명의 단어들이 저드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제목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뷰에서 해본 적이 없네요.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Blondie’는 새롭게 태어나는 걸 뜻해요. 제가 마음을 새롭게 다잡을 때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데, 이번 앨범 작업 때는 금발 머리였어요. 사실 이때는 별 의미 없긴 하지만.(웃음) 그리고 ‘홍시’는 저를 비유한 거예요. 제대로 익지 않은 감은 떫지만 푹 익으면 촉촉하고 달잖아요. 무심한 성격은 아닌데 무심해 보이는 저를 비유한 거예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살갑게 굴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영업 안합니다’는 혼자 국밥 먹으러 갔는데 “영업 끝났다”는 말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쉬고 싶다, 혼자이고 싶다는 이야기죠. 제가 국밥 먹을 때 소주를 곁들이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웃음) 마지막 트랙 ‘VANS’는 초심에 대한 이야기고요. 제가 ‘반스 뮤지션 원티드’라는 프로그램 출신이에요. ‘여전히 VANS on my feet’이라는 가사에 초심을 잃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새겼죠.

개인적으로 ‘각설’도 좋았지만, 저드가 부르는 ‘비처럼 음악처럼’도 참 듣기 좋았어요.
스킷(skit) 트랙으로 넣은 거예요. 이번 앨범을 작업하기 전에 그 곡을 커버해놓은 게 있어서 넣었죠. 마침 그 곡이 봄비처럼 들리기도 했고.

이번 앨범이 호평받은 것 중 하나가 폭넓은 스펙트럼이었어요. 옛 가요부터 펑크 록,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사운드를 담았죠. 그걸 통일감 있게 엮어내는 작업이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평소 음악을 들을 때도 한 가지 장르만 들으면 금방 질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음악에 질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걸 찾아 들으려고 하는데, 저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해요. 오늘 화보 촬영처럼요.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그걸 흡수하면서 내게 맞는 걸 찾게 되겠죠.

그 외에도 앨범의 완성도를 위해 특히 고심한 부분이 있을까요?
우선은 제 목소리가 잘 안 들렸으면 했어요. 사운드적 요소 중 하나로 들렸으면 했죠. 트랙 배치도 발매 2~3일 전까지 계속 바꿀 만큼 고심했고요. 가장 신경 쓴 것은 가사예요. 제가 의도한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길 원했어요. 멜로디가 좋네, 비트가 멋지네, 이런 것보다는 담고자 했던 메시지들이 어울리는 사운드와 잘 버무려져서 리스너의 마음에 닿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우리는 음악을 듣고 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을 듣고 있는 건지 몰라요.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미장센과 의도를 하나하나 해석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너머에 이야기가 있을 때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잖아요. 그런 것들을 제 음악을 통해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데뷔하게 된 거죠? 아직 저드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뮤지션으로 데뷔하게 된 과정을 들려주세요.
여느 뮤지션처럼 학창 시절에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후부터 음악 학원에도 다니고 기타도 배웠어요. 혼자 음악을 만들어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리기도 하고요. 당시엔 알앤비와 힙합에 푹 빠져 있었어요. 부모님에게 스물다섯 살까지 성과를 내지 못하면 깔끔하게 다른 직업을 구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운 좋게도 스물다섯살에 하이라이트 레코즈에 들어가게 됐어요.

“불편한 게 많은 계절이지만,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모습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제가 비틀어보는 ‘봄’이 제 이야기와 접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해체되면서 막막하기도 했겠어요.
팬데믹 시기라 불가피한 상황이었어요. 저도 무덤덤했고요. 그냥 2년 계약한 아티스트였다 생각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원래 혼자 음악을 만들다 하이라이트에 들어간 거라 혼자 음악 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어요. 체계적인 회사에서 보고 배운 것을 이제 스스로 부딪히며 실천해볼 때가 된 것 같아 좋았어요. 막막했지만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음악을 만들면서 외로울 때도 있나요?
어딘가 소속되어 있으면 리뷰도 듣고, 시너지도 낼 수 있잖아요. 제가 지구력이 없어 끌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하이라이트에 속해 있을 때는 팔로(팔로알토) 오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정규 1집 도 함께 만들었고 요. 앨범 때도 마무리 단계에서 간간이 트랙을 보내 피드백을 받았어요.

<BOMM>은 인디펜던트 뮤지션으로 이룬 성과라 더 뿌듯하겠어요. 지구력이 약하다고 했는데, 앨범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힘은 뭐였나요?
시간이요. 당시엔 너무 무기력했기에 억지로라도 나아가야 할 이유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발매일을 정해버리고 작업했죠.

고비는 없었나요?
지난해 2월쯤엔 잠을 거의 못 잤어요. 힘든데, 재미있기도 했어요. 작업하던 걸 마무리하고 싶어 40시간 정도 깨어 있던 적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위험하게 작업한 것 같아요.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렇게 작업하지 않으려고요.(웃음)

촬영 전 지나가는 말로 다음 앨범은 밝은 분위기일 거라고 했어요. 다음 앨범에 대한 구상을 어느 정도 마쳤나요? 늘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두 가지 정도 테마를 두고 고민 중이긴 해요.

살짝 알려줄 수 있나요?
‘음양의 조화’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난 앨범이 완전히 ‘음’이었다면 다음 앨범은 ‘양’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제가 활기를 찾고 밝은 에너지를 채우려고 하다 보니 그 주제가 와닿더라고요. 또 다른 하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본 ‘If You Know, You Know’라는 문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지’라는 뜻인데, 이 말에서 느껴지는 ‘칠한’ 분위기를 내보고 싶어요. ‘너네 이 기분 알아’ 같은 뉘앙스로.

저드는 싱글보다 앨범 단위로 작업하는 편이던데.
제가 선택 장애가 있어서. 앨범의 타이틀도 없애려고 했어요. 정규 1집 는 올 타이틀이었고,<BOMM>은 홀수 트랙만 타이틀로 정했어요.(웃음)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까.

그 정도 선택 장애면 수록곡을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겠어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딱! 느낌이 오지 않으면 이젠 다 버려요. 감을 믿는 편이에요. 제가 만든 음악임에도 기억에 남는 곡이 없더라고요. 이거 뭐지? 이런 생각이 들면 뭔가 잘못된 거라 여겨요. 그래서 작업했던 걸 다른 폴더로 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적도 많아요.

저드를 가리켜 한국의 알앤비 장르를 확장하는 뮤지션이라는 평을 하더군요. 정작 본인은 어떤 뮤지션이고 싶은지 궁금하네요.
당연히 유명해지고 싶죠. 대형 콘서트장에서 공연하고 싶고. 하지만 지금은 꿈이 많이 사라졌어요. 꿈을 꾸기보다 당장 주어진 것을 하나씩 해나가고 싶어요. 과정을 밟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무엇이라도 되어 있지 않을까요. 한방에 성공한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쉽게 흔들릴 거예요. 힘든 순간을 헤쳐 나오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을 테니. 지금은 저를 탄탄하게 만드는 과정이 더 가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뮤지션이 되고 싶은지 물으셨죠? 답은 그냥 저다운 뮤지션이에요. 저드라는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업으로 음악을 지속하려면 인기나 차트에 연연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인디펜던트로 음악을 만들다 보면 이따금 고비도 찾아올 텐데, 저드는 어떤 힘으로 음악을 만드나요?
외로움은 삶에서 기본 값이라고 생각하기에 그건 힘들진 않아요. 흠, 전 늘 예술에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전시를 보러 다니며 일상을 환기하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거라 너무 당연하고 소중해 보이지 않죠. 그래서 예술에 진 빚을 갚는 방법은 내가 그런 음악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음악으로 위로를 받듯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요.때로는 즐거움이 될 수도 있고.

선망하는 뮤지션이나 음악 등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나요?
제 자신이 아닐까요. 곡을 아무리 잘 쓴다 한들 알맹이나 제 이야기가 없으면 살아 있는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깊이 있고 성숙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제야 물어보네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저드’는 무슨 뜻이죠? 너무 식상한 질문인가요?
아니요. 이런 이야기 재미있어요. 예전엔 ‘욘’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너무 귀엽죠?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귀엽지는 않잖아요.(웃음) ‘너드(nerd)’ 아시죠? 어떤 한 가지에 몰두하는 너드의 모습이 좋아 보여서 따온 이름이에요. 그들처럼 살고 싶어서.

이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결국 그렇게 살아가고 있네요. 음악을 즐기고, 음악에 몰두하면서. 미래를 모르고 뚜벅뚜벅 걸어왔지만, 어느 순간 희망하던 것이 눈앞에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해요.

앞으로 저드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궁금해지네요.
2024년은 제게 중요한 해일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앨범을 내고 영광스럽게도 수상을 했고, 다음 앨범을 준비하는 시기이니.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어 설레기도 해요. 이번 봄도, 내년 봄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다음 앨범은 언제쯤 나올까요?
<BOMM>처럼 발매일을 정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올해 안에 내야 제가 직무 유기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1년이 짧아요. 눈 깜짝할 사이 가을, 겨울이 되어 있을걸요.
아, 벌써 3월이죠. 여름이나 가을에는 앨범이 나오지 않을까요.(웃음)

다음 앨범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요?
매번 상을 받고, 좋은 말만 듣는 건 인생에 밸런스가 없잖아요. 재미도 없고.(웃음)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며 음악을 만들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