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God生)을 찾아서
우린 가끔 영화에서 길을 찾는다.
허남훈(다큐멘터리 감독)
오로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는
절대 디지털화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THE MOVIE
뇌 피로를 풀고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고 싶을 때 게리 허스트윗(Gary Hustwit)의 작품을 꺼내 본다. <람스>는 독일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Dieter Rams)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앰비언트 장르 창시자인 브라이언 이노가 음악을 맡은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에게 이 다큐멘터리는 좀 특별하다. 게리 허스트윗과 브라이언 이노, 내 작업에 영향을 준 두 인물의 합작품이다. 게리 허스트윗은 롤모델이 없던 때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이다. 1인 체제로 산업디자인 시리즈 다큐멘터리 <헬베 티카>·<오브젝티파이드>·<어버나이즈드>를 남겼고, 이 작품을 통해 개념과 대상을 확장하 며 기존 영화 제작·유통 방식의 틀을 깼다. 생애 첫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 중인 요즘도 그에게 자극받곤 한다.
THE LINE
영화 후반부, 디터 람스가 집 정원을 손질하고 가꾸면서 이런 말을 한다. “오로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는 절대 디지털화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디지털 세상에 빠져들고 있지만, 난 요즘 스마트폰과 메타버스에서 의식적으로 빠져나와 자연과 실존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려 한다. 디터람스의 대사는 이런 내 철학을 더욱 단단하게 지탱해준다. 그가 아내와 함께 정원에 머무는 평온하면서 아름다운 분위기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김필(가수)
영혼의 여정에 있는 거예요,
생이 끝나면 우리 모두 같은 곳에서 만나겠죠.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우주예요.
THE MOVIE
짐 캐리는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 <덤 앤 더머> 등을 히트시킨 후 <맨 온 더 문>에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을 연기한다. 짐 캐리가 처음으로 실존 인물을 연기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짐과 앤디>(2017)
는 <맨 온 더 문> 촬영 당시 비하인드 영상과 그때를 회고하는 짐 캐리의 인터뷰를 교차해 보여준다. 짐은 카메라 밖에서도 앤디가 되었다. 짐 캐리를 지우고 철저히 앤디 카우프만으로 빙의된 삶을 산 것. 그는 다큐멘터리에서 그 역을 소화하는 동안 정의할 수 없던 감정을 회고하며 표류하는 자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우로서 짐 캐리의 삶을 조명한 작품으로만 볼 수 있지만, 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THE LINE
살아가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과 상황, 경험의 혼란 속에서 늘 고민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 때도 늘 자문한다. ‘나다운 것이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던 때, 나이 지긋한 짐 캐
리가 독백하듯 하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뭔가를 잡으려고 하죠. 나라나 종교나. 모든 게 추상적이에요. 내가 왜 미국인이죠? 내가 왜 캐나다인이죠? 무슨 의미예요? 누군가 정의해놓은 거잖아요. 우린
그 이상인데 말이에요. (중략) ‘이름에 걸맞게 살아라’, ‘너만 믿으니 실망시키지 말아라’, ‘하버드에 가서’, ‘의사가 되고’, ‘가톨릭 신자니까’, 아니면 ‘유대인이니까’. 이 모든 게 추상적인 것이에요. 이걸로 어떻게 잘 조합해서 살아가래요. 전 그걸 놓았어요. 앤디처럼 우주 공간을 떠돌아도 괜찮아요.” 이어서 짐 캐리가 출연한 영화
<트루먼 쇼> 엔딩 장면이 흐르면서 독백하듯 마지막 말을 남긴다. “영혼의 여정에 있는 거예요, 생이 끝나면 우리 모두 같은 곳에서 만나겠죠.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우주예요.”
최갑수(에세이 작가)
1973년 | 175분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주연: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제임스 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THE MOVIE
살아가면서 인생이라는 운동장에는 사랑과 존중, 배려, 이해, 연민보다는 시기와 질투, 폭력, 협잡, 배신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인생은 고난과 불행이 디폴트고, 우리는 가끔 행복하다. 아주 오래전 20, 30대 시절 <대부>를 보면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 말론 브란도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에 반했을 뿐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영화를 다시 본다. 그리고 알게 됐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비정한지 말해준다. 또 얼마나 허무한지 보여준다.
THE LINE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삶과 비즈니스의 기본 원칙은 거래와 교환이다. 인생은 비정해서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목숨을 담보로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니, 이보다 더 무
시무시한 협박이 또 있을까. 살면서 이 말을 듣지도, 하지도 않기 바란다.
김도훈(영화 평론가)
1968년 | 142분
감독: 스탠리 큐브릭
주연: 케어 둘리, 게리 록우드, 윌리엄 실베스터
THE MOVIE
아마도 내 인생에 가장 거대한 깨달음을 준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일 것이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겨날 때마다 다시 보곤 한다. 압도적 우주의 거대함과 고요함을 느릿느릿하게 담은 영화를 142분 동안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지구라는 작은 행성의 표면에 잠시 붙어 있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 혹시 이건 동기부여가 아니라 동기 제거용 영화인가? ‘공인된 걸작’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SF 소설가 아서 클라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우주를 소재로 한 일종의 서정시다. 내용은 간단하다. 인류에게 지혜를 가져다준 외계 존재와 접촉하기 위해 목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승무원들의 여정을 다룬다. 1968년 개봉할 때 많은 히피(거기에는 존 레논도 있다!)가 단체로 극장에 모여 마리화나를 피우며 이 영화를 봤다는 이야기는 꼭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건 감상이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다. 올해 구찌 캠페인 화보에도 이 영화에 바치는 오마주가 등장했다.
THE LINE
이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다.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든다. 이 기사의 의도에 가장 적절한 답변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나는 울림을 주는 영화 대사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말로 넘치는 세상에서 영화까지 말로 날 가르치려 들면 좀 곤란하다(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대사도 거의 없는 이 영화를 꼭 보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삶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시끄럽다고 생각될 때 그냥 멍하니 틀어놓고 있으면 된다. 새해 목표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당신을 위한 우주적 힐링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넷플릭스로 언제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