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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의 어떤날

어느 기타리스트의 기타 생각 없는 생각.


티셔츠 James Perse, 팬츠 Masu, 안경과 링 모두 본인 소장품.

재킷 Willy Chavarria by MUE, 티셔츠 James Perse, 팬츠 Purple Denim, 부츠 Julius, 안경 본인 소장품.

팝 음악으로 스타가 된 사람들 대부분 감이 좋아요. 

그 감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음악을 만들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 단계 성장하려면 

음과 음 사이, 전체적 구조를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아야겠다 싶었어요.

 음과 음 사이, 자유 리듬

“이번 화보 제목으로 ‘이병우의 어떤날’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직접 손 글씨를 써주실 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초기작을 재현하고 싶었거든요. 그때도 앨범 표지 제목을 직접 쓰셨잖아요.” “아아. 그랬었지. 일부러 왼손으로 삐뚤삐뚤하게 쓴 건데 말이야.” 자신의 어떤 날을 회상하듯 이병우는 흰색 A4 용지에 쓴 그 문장을 지그시 바라봤다. 1984년, 이병우는 조동익과 함께 ‘어떤날’이라는 팀을 결성해 한국 대중음악에 등장했다. 록과 포크, 그리고 퓨전 재즈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천재적 재능을 수줍게 내보인 둘은 단 두 장의 앨범으로 2008년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 6위(1집 <어떤날 I>)와 20위(2집 <어떤날 II>)에 오르며 동시대 젊은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전대미문의 듀오였다. 어떤날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1989년 2집을 낸 후 각자 길을 걸었고(활동을 중단했을 뿐 공식 해체를 선언한 것은 아니다) 이병우는 오스트리아와 미국으로 긴 유학을 떠났다. “어떤날 1집과 2집을 많은 사람이 좋아했지만, 저는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음과 음 사이, 전체적 구조를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아야겠다 싶었어요.” 이병우는 솔로 2집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와 3집 <기타 생각 없는 생각>을 빈 국립 음악예술대학교 유학 생활 중 만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대체로 조용한 나날이었어요. 그때 든 생각을 기타와 몇 가지 악기로 만든 앨범이 2집이에요. ‘비 오는 날에 산보’를 작업할 땐 학교에서 바흐를 한창 공부하던 중이였는데, 그 선율이 귀에 하도 맴돌아서 ‘BWV 998 프렐류드’를 인용하기도 했고요. 3집은 팝이나 클래식이나 결국 음악인데, 왜 구분 지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친구들이랑 클래식곡 작업한 것도 넣고(아마 5번과 6번, 7번 트랙까지 이어지는 ‘비발디 라장조 류트 협주곡’일 것이다), 뒤죽박죽된 걸 시도하고 싶었죠. 4집 <야간비행>에서 처음으로 드럼 사운드를 라이브로 넣었고, 5집 <흡수>는 또 완전히 기타 솔로로 돌아갔어요. 당시 흡수라는 단어의 의미를 사랑으로 해석했는데, 앨범 제목을 사랑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더라고…”느릿하던 말이 자신의 연대를 지나며 조금씩 빨라졌다. 그사이 스튜디오에서는 장비가 하나씩 빠져나갔고, 떠나는 사람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일일이 배웅했다. 말과 인사가 겹치는 법 없이 무엇이든 마음을 다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이병우가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마주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말에는 가속이 붙어도 삶의 박자는 그대로인 사람. 결코 서두르는 법없이 하나를 끝까지 음미하고, 다음을 기다리는 것. 기타 하나로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온 이병우의 40년이다.


위_2024년 4월, 뉴욕 타운홀에서 공연한 영화 <마더> 라이브 콘서트 악보.
아래_이병우가 개발한 듀얼 기타. 몸통 앞뒤로 클래식과 어쿠스틱 두 가지를 구현한다. 


코트 Comme Des Garcons Homme Plus, 팬츠 424, 삭스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안경과 링, 슈즈, 기타 모두 본인 소장품.

이 세상에 틀린 건 없다

그의 음악이 그렇듯이 스타일도 여느 뮤지션과는 좀 다르다. 하나의 몸통으로 클래식과 어쿠스틱 두 가지를 구현한 듀얼 기타와 몸통 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은 형태의 기타 바를 만드는가 하면, 10여 년 전부터 끼고 다니는 박쥐 날개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안경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것이다. 지난 6월,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진행한 영화음악 콘서트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율리우스(JULIUS)의 다크웨어 룩을 입고 등장했다. 스타일이 워낙 확고한 탓에 이번 촬영을 위해 본인의 물건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20대 초반 한영애 누나의 공연에서 기타 세션을 한 적 있었어요. 영애 누나는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오라가 넘치는데, 그 옆에서 기타를 치는 저만 너무 학생 같은 거예요. 그때부터 저만의 스타일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자신을 닮은 동그란 안경에 얌전한 운동화, 귀여운 스트라이프 피케 셔츠를 조심스레 바지 안에 넣어 입은 20대의 이병우. 유일하게 뮤지션다운 면모는 긴 머리를 묶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써 수줍음을 감춘 모습이다(2010년 중반 ‘위잉위잉’을 부르던 오혁과 퍽 닮았다). 자신을 보기 위해 기꺼이 하루를 낸 관객들에게 옆집 아저씨 같은 행색으로 무대에 설 수 없기에 그는 자신만의 공연 의상을 제작하고, 해외에 나갈 때마다 혹사해온 자신의 손가락에게 선물하듯 반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교수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평소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일상에서 튀는 면이 있어야 무대에서 가까스로 볼만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말한 요상함이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부류가 아니다. 방식이 엉뚱하거나 서툴러 보여도 자신만의 무기가 될 만한 요소를 갖고 있느냐의 이야기다. “음악을 만들 때도 그래요. 너무 멀리 가버렸나 싶다가도 그럼 안 되나? 세상에 틀린 게 어디 있어?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저만의 사운드를 만들어가는 게 목적이니까요.”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병우를 사랑하는 이유도 그렇다. 들국화 1집에 실린 ‘오후만 있던 일요일’도 어떤날의 두 앨범도, 처음 선보인 솔로 앨범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 항해(航海)>도 어느 누가 하지 않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나는 왜 이렇게 수동적이고 부족할까’ 이런 자책 속에서 억지로 꾸역꾸역 만들어요. 만들고 나면 만족이고 행복이고 일단 해냈다는 해방감밖에 없어요.” 그렇게 끝낸 것들이 나중에 무엇이 되는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 “나이를 먹고서 젊은 날에 만든 음악을 들으면 한 번씩 놀랄 때가 있어요. 그때는 진짜 아는 것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어릴 때 나는 이런 감성을 가졌구나. 음악을 되게 좋아했구나.” 그때의 순수한 감각과 음악을 향한 그의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기타리스트 이병우는 혼자 만드는 일을 좋아하지만, 그런 시간을 충분히 가졌기에 이제는 자신의 기타 연주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 했다. “어떤날, 기타리스트, 영화음악 감독, 하물며 제가 누구인지 모르고 공연에 오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저마다 정의하는 이병우가 다르니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건 항상 어렵죠. 그래도 지금까지 기타로 먹고사는 것에 매일 감사해요. ‘기타 쳐서 뭐 먹고살래?’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하하.” 


후드 톱과 페도라, 안경 모두 본인 소장품.

기타를 50년 동안 쳤지만, 

종착지가 없어요. 매일 찾고 있어요. 

기타 하나 들고 모험을 하는 거죠. 

아, 여기는 내가 와본 곳이네. 

그럼 이쪽으로 가봐야지.

종착지 없는 모험

“기타를 50년 동안 쳤지만, 종착지가 없어요. 매일 찾고 있어요. 기타 하나 들고 모험을 하는 거죠. 아, 여기는 내가 와본 곳이네. 그럼 이쪽으로 가봐야지.” 그의 고민은 자나 깨나 기타로 새로운 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음악을 내려둘까 고민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저를 영화인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존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코네, 알렉스 노스 같은 대가가 만든 영화음악을 들으면 지금도 심장이 뛰어요. ‘아 나도 영화를 빛나게 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내가 배운 클래식을 한국적 정서와 어떻게 잘 섞을 수 있을까. 고것 참 재밌겠다’ 싶다가도 내 뿌리는 기타리스트인데, 이러다 더 이상 기타 앨범을 못 내면 어떡하지 싶기도 하고.” <장화, 홍련>, <연애의 목적>, <괴물>, <마더>, <관상>, <국제시장> 등 그의 음악과 흥행한 영화만 나열해도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를 소개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지금도 <국제시장>의 속편 영화음악을 작업하고 있다는 그는 지난 5월에 열린 제62회 백상예술대상 특별 무대에 깜짝 등장했다. 어버이날이기도 했던 당일, 배우 유연석과 함께 2025년 한 해 동안 별세한 이순재, 안성기, 윤석화, 전유성 등 큰 별을 추모하는 헌정 공연을 가졌다.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OST ‘우리’를 연주하며 우리 곁을 떠난 예술인을 기억했다. “사람들이 더러 저를 신비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먼저 나서는 성격이 아닐 뿐 전 항상 열려 있어요. 백상 특별 무대는 제게도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오늘 나를 불러준 이 자리도 그렇고요. 저도 나설 기회가 있으면 나름대로 노력해요. 언젠가는 콘서트 앙코르곡으로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직접 불렀더니 모두 나자빠지더라고. 나름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거긴 한데, 왜 그렇게까지 놀라나 싶기도 하고…” 6집 <우주기타>가 나온 지 어느덧 10년. 다음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자 자칭 게으르고 수동적이고 느긋한 사람, 이병우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다시 꾸역꾸역 만들겠죠. 그때까지는 나도 몰라요.” 

에디터 강승엽 사진 이준경 메이크업 장하준 스타일링 이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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