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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미래. 두 시선이 교차한 굿우드의 네 가지 테마

GOODWOOD FESTIVAL OF SPEED

완만한 구릉과 오래된 정원, 오후 4시의 홍차. 리치먼드 공작 가문이 300년째 지켜온 굿우드 영지의 평범한 하루다. 1년의 대부분을 새소리와 잔디 깎는 소리로 채우는 이 조용한 영지는 7월이면 세상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정원으로 변한다. 올해 33회를 맞은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가 그 주인공이다. 이 축제는 첫 회를 연 1993년부터 예상을 뛰어넘었다. 주최자인 리치먼드 공작이 예상한 관객은 2000명이었으나 2만5000명이 몰려들어 환호와 자동차 굉음이 뒤섞인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 모터스포츠의 황금기를 이끈 굿우드 서킷 설립자인 조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든 ‘자동차에 의한, 자동차를 위한’ 축제가 현실이 된 순간이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굿우드의 위상은 축제 그 이상이다. 나흘간 20만 명이 서식스의 시골 영지를 찾고, 글로벌 제조사는 제네바 모터쇼가 사라진 이후 신차 데뷔 무대로 이곳을 택한다. 매년 색다른 테마와 함께 돌아오는 굿우드 페스티벌은 그렇게 자동차 문화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1 힐클라임을 달리는 닛산 300ZX 터보 IMSA GTO. 타임드 슛아웃에서 48.48초로 7위를 기록했다.
2 픽사 <카>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힐클라임에 데뷔한 라이트닝 맥퀸.
3 나흘 내내 만원을 이룬 팬존 앞 풍경. F1·모토GP 스타들의 인터뷰가 이곳에서 진행됐다.
1 1966년 르망 24시 1·2·3위를 장식한 포드 GT40 MkII 3대의 재회. 세 대가 함께 달린 것은 1969년 이후 처음이다. 

페라리를 꺾은 포드, 60년 만의 재회 

올해 굿우드 페스티벌의 핵심 테마는 ‘라이벌(The Rivals: Epic Racing Duels)’로, 모터스포츠 역사에 새겨진 명승부를 다시금 펼쳐 보였다. 제임스 헌트와 니키 라우다의 1976년 챔피언십 50주년, 데이먼 힐의 1996년 타이틀 30주년을 제치고 굿우드가 맨 앞에 세운 라이벌리는 포드와 페라리의 1966년 르망 24시 레이스다. 포드와 페라리 라이벌 구도의 시작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헨리 포드 2세는 자금난에 허덕이는 페라리를 인수해 르망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3주간의 협상 끝에 최종 서명을 앞둔 상황에서 엔초 페라리는 “페라리 레이싱팀의 지휘권은 절대 넘길 수 없다”는 전언과 함께 인수를 거절하며 자리를 떠났다. 포드는 이날부터 레이싱 명가 페라리를 꺾기 위해 이를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4년과 1965년 르망에 출전한 포드의 모든 차량은 완주조차 하지 못하며 순탄치 않은 여정을 걸었고, 페라리는 유유히 우승을 쌓아 1960년부터 1965년 까지 르망을 지배했다. 전환점은 1966년이었다. 7리터 V8 엔진을 얹은 GT40 Mk II 여덟 대를 내보낸 포드는 마침내 1·2·3위를 차지하며 페라리 왕조를 무너뜨렸고, 1969년까지 르망 4연패를 달성했다. 미국 제조사가 르망에서 우승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60년이 지난 올해, 굿우드는 그날 결승선을 통과한 세 대의 차량을 한데 모았다. 서로 다른 소장처에 흩어져 있던 P/1046, P/1015, P/1016이 굿우드 힐클라임을 첫 우승의 순간처럼 나란히 달렸다.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던 역사 속 장면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굿우 드는 이 영광을 페라리와도 나눴다. 1951년 실버스톤에서 거둔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첫 F1 우승 75주년을 기념하며 페라리 F1 역사에서 상징적인 여섯 대의 머신을 모은 것. 굿우드는 라이벌이라는 테마를 경쟁이 아닌 경의로 완성했다. 서로를 향해 이를 갈던 두 이름이 60년 뒤 같은 언덕에서 나란히 박수를 받는 장면, 그것이 올해 굿우드가 준비한 경쟁의 결말이다.


4 헌트와 마지막까지 챔피언을 다툰 니키 라우다의 페라리 312T2. 

관객이던 남자, 굿우드 페스티벌의 주인공이 되다 

1993년 여름, 제1회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의 잔디밭에 롭 디킨슨이라는 영국 청년이 서 있었다. 록 밴드 캐서린 휠의 보컬이던 그는 투어 중 휴가를 보내며 여느 관중처럼 굿우드 힐클라임을 오르는 차들을 바라봤다. 그날의 롭 디킨슨은 3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자신의 브랜드가 굿우드 페스티벌의 가장 높은 영예인 ‘센트럴 피처 마크’에 오를 거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센트럴 피처 마크는 굿우드 하우스 앞에 설치된 조각가 게리 주다의 대형 조형물과 함께 축제 전체의 얼굴이 되는 자리다. 페라리,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 같은 유명 제조사들이 거쳐간 그 자리에 디킨슨이 설립한 포르쉐 레스토모드 브랜드 ‘싱어 비히클 디자인’이 올해의 주인공이다. 디킨슨이 2009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싱어는 포르쉐 911, 그중에서도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만든 964 타입만 다룬다. 클래식 911의 원형과 현대적 기술 두 요소가 담긴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가장 아 름다운 911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가장 현대적인 산업 기술을 탑재한 새로운 911을 탄생시키는 것. 프레임을 뜯어내고, 카본 보디를 입히며 영국의 전설적 레이싱 엔진 명가 코스워스와 함께 개발한 4리터 수평 대향 6기통 엔진을 심는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라는 철칙 아래 나사 하나까지 다시 조이는 이 작업을, 싱어는 ‘재해석’이라 정의한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로커의 취미는 레스토모드라는 자신만의 언어로 자동차 산업에 새로움을 불어넣었고, 한 대에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 성장의 발판 또한 굿우드다. 2015년 첫 초청 이후 DLS, 클래식 터보, DLS 터보, 카레라 쿠페까지 싱어의 모든 신작이 굿우드에서 데뷔했다. 게리 주다의 조형물에는 싱어의 상징인 클래식과 클래식 터보, DLS 세 대가 매달려 있다. 축제 공간 곳곳에 11대의 싱어 차량이 전시되었고, 스테이블 야드 앞 전시장에서는 앞코가 비스듬히 깎인 슬랜트노즈 911이 최초로 공개됐다. 굿우드의 시작을 함께한 관객이 굿우드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올해 그 잔디밭 어딘가에도, 언덕을 오르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또 다른 젊음이 있었을 것이다.

5 굿우드 슈퍼카 패독에 오른 싱어 DLS 터보. 마티니 리버리를 두르고 있다. 6 스테이블 야드에서 최초 공개된 슬랜트노즈 사양의 포르쉐 911. 싱어가 슬랜트노즈를 손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 굿우드 하우스 앞에 세워진 싱어 스탠드. 싱어의 철학 ‘Everything 
is Important’ 배너가 걸려있다. 
1 1935년식 아우토 우니온 ‘루카’. 루카가 달리는 모습을 선보인 것은 91년만이다.
2 세바스티안 페텔에게 F1 4연속 챔피언을 안겨준 2013년 레드불 RB9. 그해 19전 중 13승을 거두며 F1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머신 중 하나로 꼽힌다.
3 3년 연속 슛아웃 정상에 오른 포드 슈퍼 머스탱 마크-E.

4 30년 만에 콕핏에 오른 데이먼 힐. 

90여 년의 시간이 오르는 언덕

굿우드 힐클라임은 카퍼레이드가 아니다. 나흘간 600대가 넘는 차와 모터사이클이 오르는 1.16마일(약 1860m)의 언덕은 시대가 다른 탈것이 같은 출발선, 같은 관중 앞에 서는 자리다. 올해, 이 언덕에 오른 가장 오래된 차는 아우토 우니온 ‘루카’다. 아우디의 전신인 아우토 우니온이 1935년 오직 속도만을 위해 만든 차로, 물방울처럼 매끈한 차체는 공기저항과 싸우기 위한 설계다. 그해 이탈리아 루카 인근 고속도로에서 평균 시속 320km를 넘겼고, 이름도 그 도시에서 따왔다. 윌리엄스 FW18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데이먼 힐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안긴 차다. 두 차례 챔피언이던 아버지 그레이엄 힐의 뒤를 이어 F1 최초의 부자 챔피언에 오른 시즌의 머신으로, 타이틀 30주년을 맞아 복원해 예순다섯의 힐이 다시 콕핏에 앉아 언덕을 달렸다. 언덕의 절정은 나흘간 가장 빠른 기록을 낸 머신들이 모여 최종 순위를 가리는 ‘타임드 슛아웃’이다. 올해의 주인공은 전기였다. 포드 슈퍼 머스탱 마크-E가 41.97초로 우승했고, 포뮬러 E의 차세대 머신 젠4가 0.5초 차로 뒤를 이었다. 전기차 두 대가 시상대 맨 위를 차지한 것은 33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연기관이 조용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F1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설계자로 꼽히는 에이드리언 뉴이가 자신이 설계한 레드불 RB17을 직접 몰아 언덕에 데뷔시켰고, 갈수록 듣기 어려워진 V10 자연흡기 엔진의 포효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인상 깊은 소리로 남았다. 한편, 이 언덕의 왕좌는 4년째 바뀌지 않고 있다. 영국의 신생 제조사 맥머트리의 스피어링이 2022년에 세운 39.08초의 기록이다. 올해는 그 최단 기록이 깨지기도 전에 스피어링의 양산형 모델 ‘스피어링 퓨어’가 공개되었다. 바닥의 공기를 팬으로 빨아들여 멈춰 선 상태에서도 2톤의 힘으로 차체를 노면에 짓누르는 1000마력짜리 전기차로, 올해 첫 고객 인도를 앞두고 있다. 

5 베를린 아티스트 로빈 바움가르텐의 인터랙티브 설치 <퀀텀 정글>. 벽면의 스프링을 누르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실시간 계산돼 양자 입자의 움직임이 빛으로 번역된다.
6 앙샹티드 툴즈의 사회형 로봇 ‘미로카이’. 여우 귀 형태의 얼굴로 병원과 공항 등에 이미 배치돼 있다. 7 관람객이 햅틱 글러브로 조종하는 로봇 손. 에딘버러 터치랩의 전자피부 센서가 로봇이 느끼는 촉감을 그대로 관람객에게 전달한다.

굿우드가 그리는 다음 세대

굿우드 페스티벌 한복판에는 미래 과학기술 전시관 ‘FOS 퓨처랩’이 있다. 2017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이라는 기치 아래 문을 연 몰입형 전시는 세계 최대 자동차 축제장에서 펼쳐진 첨단 기술 쇼케이스로, 영국 최초의 유럽우주국 우주비행사 팀 피크가 앰배서더로 관람객을 맞는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전시장에 자동차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올해 퓨처랩이 ‘새로운 개척지’, ‘보이지 않는 세계’, ‘지능형 시스템’, ‘확장된 현실’이라는 네 가지 주제에 담은 것은 달과 심해, 양자, 로봇, 그리고 뇌다. 나사(NASA)와 유럽우주국이 함께 꾸린 ‘달로의 귀환’은 반세기 만에 인류를 다시 달 궤도로 보내는 첫 유인 임무, 아르테미스 2호를 다뤘다. 영국 기업 딥(Deep)은 40년 만에 처음 짓는 개방 해역 수중 거주 시설 ‘뱅가드’를 소개했는데, 올여름 플로리다 앞바다에 설치될 이 시설은 아직 95%가 미탐사로 남은 바다를 향한 전초기지다. IBM은 양자컴퓨터의 내부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황금빛 조형물 ‘퀀텀 샹들리에’를 세워, 눈에 보이지 않는 연산의 세계를 눈앞에 가져왔다. 전시의 무게는 건강과 로봇에서 더 묵직해진다. 헬스케어 기업 랜독스(Randox)가 세계 최초로 공개한 ‘랜칩 인사이트 360’은 혈당과 콜레스테롤을 포함한 250개의 생체 지표를 150가지 질환에 대입해 병이 생기기 전 위험을 미리 읽어내는 플랫폼이다. 뇌파 기업 에모티브(Emotive)의 체험 전시 <브레인 아트>에는 줄이 끊이지 않았다. 헤드셋을 쓰면 관람객의 실시간 뇌 활동이 오로라를 닮은 영상으로 번역돼 눈앞에 흐르는데, 놀이처럼 보이는 이 기술의 종착지는 마비 환자의 잃어버린 언어를 복원하는 일이다. 나흘간 이곳을 거쳐간 관람객은 9만 명으로 추산된다. 퓨처랩의 전시는 자동차가 아닌 자동차를 만들어낸 인류에게 제시하는 미래 모습이다.

8 IBM의 퀀텀 샹들리에. 양자 컴퓨터의 내부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황금빛 조형물이다. 
에디터 강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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