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ACY #EP. 2 강민철, 노일환
세월을 머금을수록 형형히 빛나는 물건이 있다. 일곱 남자가 들려주는, 하나의 물건에 새겨진 저마다의 우주.
KANG MIN CHUL
“요리는 기술만이 아닌 축적된 시간과 감각 위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이 자개함이 조용히 일깨워준다.”
강민철
세계 3대 프렌치 거장(조엘 로부숑, 알랭 뒤카스, 피에르 가니에르)의 레스토랑을 모두 거친 유일한 한국인 셰프. 강민철 레스토랑과 기와강을 이끌고 있으며, 모두 2026년 미쉐린 1스타를 얻었다.
본격적으로 프렌치 셰프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어머니를 통해 할머니의 자개함을 물 려받았다. 생전에 할머니는 “이건 꼭 민철이에게 줘라”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그 한 마디에는 나를 향한 깊은 응원이 담겨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요리 에 흥미를 보이던 나를 유심히 지켜보시며, 어머니를 통해 그 길을 걷게 하셨다. 그래서 이 자개함은 내게 응원과 믿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 2021년 내 이름을 건 레스 토랑을 열었다. 2019년 피에르 가니에르 셰프가 내게 김치를 만들어보라고 한 적 있는 데, 일주일 숙성된 김치를 맛본 그는 본점 메뉴판에 ‘김치 민철’이라고 써서 올렸다. 그 경험은 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프렌치 요리를 공부했지만, 한 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국적 터치를 더하는 데 집중했다. 프랑스 전통 팬에서 완성한 소스와 장독대에서 숙성된 장을 한 접시에 조화롭게 담아내듯, 서로 다른 시간과 문화 가 만나는 지점을 탐구해왔다. 요리뿐 아니라 식기와 담음새에 한국적 미감을 녹여내는 것 또한 나의 일인데, 이 자개함 하나에서도 많은 것이 떠오른다. 내게 이 물건은 ‘초심’ 과 ‘뿌리’를 상기시키는 존재다. 요리는 기술만이 아닌 축적된 시간과 감각 위에서 완성 된다는 사실을 이 자개함이 조용히 일깨워준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물건의 의미와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진다.
THE LEGACY
요리는 결국 사람과 시간의 이야기다.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그 기술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살아온 시간과 감각이다. 그래서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 오랜 시간 손에 익은 칼일 수도, 나만의 방식으로 완성한 레시피 노트일 수도, 하나의 공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물건과 공간이 아닌 그 안에 담긴 ‘과정의 가치’다. 할머니의 자개함에서 내가 믿음의 메시지를 읽어냈듯이 물건의 이면에 쌓인 고민과 선택, 그리고 시간의 흔적을 함께 발견하길 바란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오래, 더 깊이 남으니까.
NOH IL HWAN
“김동식 선자장의 합죽선과 이강효 작가의 달항아리는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우리의 삶을 대하는 태도다.”
노일환
한국 공예 작가 매니지먼트와 이커머스를 운영하는 솔루나 아트 그룹 대표. 현재 약 20명의 작가가 소속돼 있으며, 서울과 홍콩을 기점으로 아시아 컨템퍼러리 아트 & 생활용품을 소개하고 있다.
2016년, 취재를 위해 전주에 사는 김동식 선자장을 찾았다. 그의 자택에 자리한 작업 공간 동성공 예 안으로 들어서자 황칠 향이 은은한 합죽선이 가득했는데, 취재를 마치고 떠날 무렵 합죽선 한 자루를 내게 건넸다. 그의 시간을 기록하러 간 자리에서 다가오는 시간을 바람처럼 흘려보내는 물 건을 선물받은 것이다. 그 경험은 시간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로 남게 되었다. 이후 이강효 작가의 공방에서 차를 마시다 우연히 달항아리 한 점을 보며 비어 있음 속에서 시간이 쌓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딸에게 시간을 담아 건넬 수 있는 물건으로 선물하고 싶어 그 달항아리를 품에 안 았다. 지금 달항아리는 늘 보이는 곳인 집 거실에 두고 감상하며, 합죽선은 여름철에 자주 들고 다 닌다. 종종 주위 사람들이 어디에서 난 것이냐며 묻는다. 김동식 선자장의 합죽선을 보고 질문을 던지면 “한 사람의 삶과 시간이 접혀 있는 구조”라며 조용히 펼쳐 보인다. 사용할수록 손에 길들고, 접히는 결은 점점 부드러워지며 보이지 않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 이강효 작가의 달항아리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보이지만, 이 속에 각자의 시간과 해석이 머물다 스며들겠죠” 라고 설명한다. 흐름과 머무름이 같은 자리에 놓인 순간, 나는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삶과 시간을 전 달하는 사람이 된다.
THE LEGACY
시간을 흘려보낼 것인지, 담아둘 것인지 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에 이 두 물건은 단순한 사물의 가치가 아닌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황칠 합죽선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전하는 물건이다. 모든 순간을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흘러가야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시간도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한다. 한편, 이강효 작가의 달항아리는 삶의 ‘과정’을 담은 그릇이다. 달항아리 속은 비어 있지만, 쓰임과 시간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쌓인다. 삶이란 미완성으로 시작해 끊임없이 채우고 비우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