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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ACY #EP. 3 이준경, 이준엽

세월을 머금을수록 형형히 빛나는 물건이 있다. 일곱 남자가 들려주는, 하나의 물건에 새겨진 저마다의 우주. 

LEE JUN KYOUNG

“카메라와 안경은 나와 아버지가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수단이다.” 

이준경

용장관 소속 사진가. 자신만의 시야로 뉴욕을 담은 사진집 <FROM BEHIND>를 출간하기도 했다.

평생을 상업 사진가로 살아온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진가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봐온 사진 세계는 내가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만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비싸고 귀한 카메라를 접할 수 있었는데, 유일하게 빼앗은 아버지의 카메라가 콘탁스 RTS다. 반자동 필름 카메라 특유의 셔터 누르는 맛이 일품으로, 어느덧 10년째 내가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봐온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꽤 근사하다. 워낙 무겁고 번거로워 자주 쓰진 않지만, 셔터음과 필름이 감기는 감각적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처음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카메라만큼 안경도 다양하게 수집하셨는데, 스무 살 초 무렵 “아빠 이거 내가 쓸게”라는 말 한마디로 내 안경이 되었다. 운전할 때, 얌전해 보이고 싶을 때, 사나워 보이는 인상을 누르고 싶을 때 이만한 안경이 없다. 눈빛과 표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유독 이 안경을 쓸 때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가면을 쓴 기분이랄까. 안경 파우치가 굉장히 독특했는데, 철이 없게도 술 취한 날 잃어버렸다. 

1992년 겨울,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한 매체 인터뷰 촬영.
2023년 파리 여행 중 즉석 사진기로 찍은 가족사진.

THE LEGACY

누구에게나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내 기준은 아버지다.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아버지라면 이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할까?’, ‘아버지라면 어떤 관점으로 촬영 현장과 호흡할까?’ 스스로 묻는다.뾰족한 해답이 나오지 않지만, 그 행위만으로 일종의 명상이나 호흡처럼 위안이 된다. 카메라도, 안경도 보기 위한 물건이다. 아버지가 봐온 세상을 이제는 내가 바라보며 공유한다. 애지중지하는 물건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숨이 넘어갈 듯 뜨겁게 사랑했던 아버지와 나의 기억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LEE JOON YUP

“아버지의 메모를 뜯어 보는 일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이자

‘미술 애호가’ 이광호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이준엽

대구와 서울에 3개 지점을 운영 중인 ‘갤러리 신라’ 디렉터.

내게 예술은 삶과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바쁜 날이면 유치원에 다녀온 뒤 갤러리에서 시간을 보냈고, 박서보·윤형근 선생님 등 아티스트를 모시러 동대구역으로 가는 차에 함께 오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당연히 갤러리 일을 이어받을 것으로 믿으셨지만, 나는 그 기대를 뒤로한 채 멕시코로 떠났다. 그곳에서 예술과 무관한 일을 하다 결국 아버지에게 붙잡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싶었다. 갤러리스트로서 타인이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해야 했고, 학문적 맥락에서 이해도 필요했다. 2020년쯤인가.

아버지와 갤러리 신라가 집중했던 ‘개념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토니 고드프리가 쓴 <개념 미술>을 발견했다. 가져도 되느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흔쾌히 건네주셨다. 나는 그 책을 정확히 다섯 번 읽었다. 정독이 끝난 뒤에는 아버지가 빼곡히 써놓은 메모를 열심히 뜯어 봤다. 경상도 남자이자 부자지간, 그리고 직장 상하 관계라는 여러 벽 앞에서 서로의 속내를 꺼내기 어려웠던 우리에게, 아버지의 메모를 곱씹는 일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이자 아버지가 아닌 ‘미술 애호가 이광호’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일이기도 했다.

갤러리를 서울로 확장한 지금, 그 책은 내게 성경과도 같다. 아버지는 개념 미술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90년대부터 이 분야를 알리기 위해 애쓰셨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먼저 걷다 보면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마다 책을 펼치면, 새로운 도전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확신이 돌아온다. 예술에 대한 정보와 아버지의 체온이 담긴 이 책은 외롭고 긴 길에서 잠시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어주었다. 

갤러리 신라 이광호 대표와 박서보 화백.
이준엽 디렉터와 이광호 대표.

THE LEGACY

어찌 보면 책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버지의 기질과 그 세계를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내가 해병특수수색대 전역 당시 받은 메달을 물려주고 싶다.“인간의 정신이 물질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준 곳에서 받은 것이다(참고로, 예술은 ‘인간의 정신이 물질화될 수 있는 유일한 분야’라고 정의되곤 한다. 하지만 이 명제는 철저히 부정되기도 한다). 어쨌든 밤을 꼬박 지새울 때,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그 메달을 보면 힘이 절로 났다. 나의 자식이 장성했을 때,아버지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메달 하나로 충분하길 바란다. 그 한계 위에서 산 사람으로기억해줬으면 좋겠고, 그 친구 또한 한계에도전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에디터 <맨 노블레스> 편집팀 사진 신용욱, 각 인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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