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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의 여정

  바젤에서 베네치아까지. 아트 어드바이저 칼 라르손이 예술을 고르고 사유하는 방식. 


빈티지 재규어 E-타입을 타고 취리히에서 바젤로 향하는 칼 라르손과 그의 고객. 

 바젤의 밀도

매년 6월이면 아트 바젤이 열리는 스위스 바젤로 향한다. 일주일 동안 이 작은 도시는 세계 미술 시장의 중심이 된다. 인구 20만 명 남짓의 소도시지만 파운데이션 바이어러, 쿤스트 뮤지엄 바젤, 샤울라거, 비트라 캠퍼스까지 세계적 미술관과 건축이 밀집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예술 도시다. 바젤에서의 루틴은 늘 비슷하다. 파운데이션 바이어러 맞은편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본 뒤 페어로 향한다. 아트 바젤 공동 설립자이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갤러리스트 에른스트 바이어러가 세운 이 미술관은 해마다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쿤스트 뮤지엄 바젤도 빼놓지 않는다.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에 이르는 컬렉션 덕분에 페어에서 만난 동시대 작품을 미술사의 긴 흐름 속에서 다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방문 때 관람한 헬렌 프랑켄탈러 회고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전시였다. 이번 여정은 취리히에서 시작했다. 오랜 고객이자 이제는 친구가 된 부부와 호숫가 레스토랑 시하우스 헤를리베르크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스위스에 오면 슈니첼도 의식을 치르듯 챙겨 먹는다. 다음 날 아침, 라인강에서 수영한 뒤 고객의 빈티지 재규어 E-타입을 타고 바젤로 향했다. 보통 VIP 프리뷰 ‘퍼스트 초이스’에 맞춰 도착하는데, 한 해 미술 시장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매년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올해 바젤은 팬데믹 이후 시장을 휩쓴 투기적 열기가 아닌 차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분위기는 우아했고, 컬렉터들의 태도는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이애미가 예술과 패션, 셀러브리티 문화가 뒤섞인 축제에 가깝다면, 바젤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컬렉터들은 갤러리스트와 긴 대화를 나누고, 작품의 프로버넌스를 논하며, 미술관과 페어를 오간다. 그럴싸한 레스토랑이나 밤 문화는 부족할지 몰라도, 나는 오히려 바젤의 그런 무심함이 좋다. 이 도시는 애써 사람을 유혹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 많지 않으니 미술에만 오롯이 집중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라인강 전경. 

쿤스트 뮤지엄 바젤 내부. 
8월 23일까지 쿤스트 뮤지엄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규모의 헬렌 프랑켄탈러 회고전의 전시 작품.

올해는 43개 국가와 지역에서 290개 갤러리가 참가했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거장들의 작품이 있었다. 하우저 앤 워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Abstraktes Bild(940-7)’을 2000만 달러에 판매했고, 피카소의 ‘Le peintre et son mode`le dans un paysage’는 3500만 달러에 출품됐다. 가고시안 역시 개장 직후 윌럼 더 쿠닝과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연이어 판매하며 올해 시장의 흐름을 가늠케 했다. 그러나 이런 거액의 거래는 바젤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 페어의 진면목은 규모보다 밀도에 있다. 몇 블록 안에서 피카소의 걸작과 신진 작가를 만나고 큐레이터와 컬렉터, 갤러리스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친다. 작품과 사람, 기회가 이토록 응축된 장소는 미술계에서도 드물다. 올해 처음 선보인 ‘바젤 익스클루시브’는 그 밀도를 한층 높였다. 190여 개 갤러리가 주요 작품을 바젤에서 처음 공개하며 이 도시를 다시 찾을 이유를 하나 더 만들었다. 6월의 바젤은 1년 중 내게 가장 중요한 일터이기도 하다. 작품과 사람, 고민과 선택 사이를 오가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은 수천만 달러 규모의 거래는 아니지만, 내가 자문하는 두 명의 컬렉터가 스웨덴 화가 폴 페예르스키욀드의 작품을 구입한 일이었다. 우리는 노르덴하케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본 뒤 다른 부스를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같은 그림 앞으로 돌아왔다. 갤러리스트와 함께 작업 방식과 연작의 맥락을 이야기하며 그림 앞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런 ‘거리 두기’가 진정한 컬렉팅의 출발이라고 믿는다. 아트 페어에서는 현장 분위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실제보다 강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수백 점의 작품을 본 뒤에도 계속 떠오르는 그림이라면, 이미 그 작품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좋은 컬렉션은 비싸거나 유명한 작품을 모으는 것이 아니다. 한 작품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이 쌓일 때 비로소 컬렉션이라 부를 만한 것이 된다.


아르세날레 항만을 내려다보는 닉 케이브의 브론즈 조각 ‘Amalgam(Origin)’. 인간의 몸에서 뻗어 나온 가지 위로 새들이 내려앉는다. 

베네치아의 여백

아트 바젤을 뒤로하고 비엔날레가 열리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같은 예술을 다루지만, 두 도시의 시간은 전혀 다르게 흐른다. 바젤이 효율적이고 상업적인 곳이라면, 베네치아는 연극적이고 파편적이며 예측 불가능하다. 비엔날레를 관람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전시 공간보다 도시를 거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수상버스를 타고 내리다 우연히 팔라초 안의 전시를 만나고, 골목을 돌아 나오면 성당과 조선소, 정원이 자연스럽게 다음 전시장이 된다. 계획했던 동선은 자주 무너진다. 하지만 그 우연이야말로 베네치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길을 잃는 편이 더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에서는 숙소 역시 목적지였다. 올해 문을 연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베네치아에 머물렀다. 15세기 궁전인 팔라초 도나 조반넬리를 건축가 알린 아스마르 다만이 새롭게 복원한 호텔로, 객실은 47개뿐이다. 이곳은 건물이 견뎌온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박물관처럼 박제하지 않았다. 오래된 시간을 오늘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인 듯한 공간이다. 복원된 프레스코와 무라노 유리, 컨템퍼러리 가구, 숨겨진 안뜰은 베네치아 저택에 초대받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호텔은 단순히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산마르코 광장과 조금 떨어진 곳이라 비엔날레를 둘러보기에도 더없이 좋은 위치다.

올해 비엔날레의 테마는 ‘In Minor Keys’다. 고(故) 코요 쿠오가 남긴 마지막 기획이다. 전시는 거대한 정치적 선언보다 기억과 공동체, 영성과 같은 조용한 감정에 귀 기울인다. 그 분위기는 베네치아라는 도시와도 닮아 있었다. 베네치아는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로 기억되는 도시가 아닌 물 위에서 부서지는 빛과 오래된 벽면,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걷는 동안 마주한 장면이 겹겹이 쌓여 비로소 베네치아를 기억하게 만드는 도시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영국관과 독일관, 북유럽관을 돌며 여러 작품을 만났지만, 여운이 길었던 작품은 거대한 설치미술보다는 클라라 크리스탈로바의 ‘Lust for Life’였다. 쓰러진 나무 위에 자리한 세라믹 생명체는 폐허와 은신처, 현실과 동화를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전시는 중심 무대인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에서 끝나지 않는다. 산마르코 아트센터에서 이우환의 작업을 만나고, 폰다치오네 프라다에서 아서 자파와 리처드 프린스를 본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베네치아라는 거대한 미술관은 11월 22일까지 열려 있을 것이다. 

며칠간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본 뒤, 나는 라 돌체 비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에 올랐다. 여행의 여운을 좀 더 누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라 돌체 비타’ 시대를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와 미쉐린 셰프 하인츠 베크가 선보이는 다이닝도 이 열차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올해 처음 운행을 시작한 이 열차는 이탈리아 전역을 연결하는 럭셔리 슬리퍼 트레인으로,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에서 출발해 토스카나와 시에나를 거쳐 로마까지 1박 2일 동안 달린다. 내가 머물렀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베네치아 호텔에서는 전용 보트와 자동차로 산타루치아역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토스카나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고, 시에나에 잠시 내려 도시를 둘러봤다. 열차 안에서는 시간마저 천천히 흘렀다. 지난 며칠을 차분히 되짚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속도였다. 창밖으로 베네치아가 서서히 멀어질수록 떠오른 것은 누군가의 작품보다 그 작품을 만나기까지 걸었던 길이었다. 진정한 아트 여행은 유명한 전시를 많이 보고 작품을 소유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세상과 작품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씩 넓혀가는 길이다. 


아트 딜러이자 어드바이저 칼 라르손.

칼 라르손 | 아트 딜러 & 아트 어드바이저 

3대째 가업을 잇는 아트 딜러이며, 동시대 미술과 작가, 컬렉팅을 다루는 글로벌 플랫폼 더 아트 리포터(The Art Reporter) 설립자다. 스웨덴 출신의 그는 세계 각국의 개인 컬렉터를 자문하고 있으며, DJ 아비치(Avicii)의 아트 컬렉션 구축에도 참여했다. 그와의 작업을 계기로 LA로 이주해 아트 어드바이저로 활동 중이다. 

칼 라르손 에디터 이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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