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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나하벤의 항로

부나하벤의 140여 년을 지켜온 풍미와 마스터 블렌더 줄리앤 페르난데스가 그리는 다음 항로.

아일라섬 북동쪽 해안에 자리한 부나하벤 증류소.

부나하벤(Bunnahabhain) 보틀에는 배를 조종하는 선원이 새겨져 있다. 1881년 스코틀랜드 아일라섬 북동쪽 해안에는 육로가 없어 배를 이용해 원료와 오크통을 실어 나르며 위스키를 만들었는데, 부나하벤 보틀은 그 시절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바다에서 시작한 부나하벤의 개성은 맛에도 고스란히 이어 진다. 강렬한 피트 향으로 대표되는 아일라에서 논피트 스타일을 고수하며, 해안의 염분감과 오일리한 질감에 셰리 캐스크의 풍부한 풍미를 더해 브랜드만의 영역을 구축해왔다. 최근에는 그 스펙트럼을 한층 넓히고 있다. 올해 국내에 처음 선보인 ‘부나하벤 21년 캐스크 스트랭스’가 판매 시작 1시간 만에 완판된 데이어 오는 10월에는 ‘부나하벤 안 쿠안 가르브 No.1’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를 기념한 페어링 디너를 위해 한국을 찾은 마스터 블렌더 줄리앤 페르난데스. 그에게 140여 년간 지켜온 부나하벤의 DNA와 그 안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실험에 대해 물었다.

부나하벤의 마스터 블렌더 줄리앤 페르난데스.

스물아홉 살에 마스터 블렌더로 발탁되며 업계 최연소 여성 마스터 블렌더로 알려졌다. 이 타이틀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엄청난 영광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을 느꼈다. 당시만 해도 이 역할은 나보다 훨씬 오랜 경력을 지닌 사람들, 특히 주로 남성이 맡아왔기에 내가 어떤 자리에 서게 됐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최연소’나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온 무언가를 맡길 만큼 신뢰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법과학을 전공한 이력이 인상적이다. 마스터 블렌더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 이야기가 궁금하다.

원래는 경찰이나 범죄과학수사 분야에서 일할 생각이었다. 법과학을 전공하던 중 시바스 브라더스 연구소에서 현장 실습을 하며 처음 위스키의 세계에 매료됐다. 졸업 후 스카치위스키 연구소와 시바스 브라더스에서 분석과 증류 경험을 쌓았고, 2017년 디스텔(현 CVH 스피리츠)에 블렌더로 합류해 캐스크 셀렉션과 숙성을 담당했다. 그리고 2019년 말 마스터 블렌더가 됐다.

법과학을 전공한 배경이 위스키를 만드는 데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나?

법과학은 처음 보이는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하는 습관을 갖게 했다. 위스키를 테이스팅할 때도 ‘이 풍미는 원액에서 온 것인가’, ‘캐스 크인가, 숙성 환경이나 시간의 영향인가?’를 계속 질문한다. 또 서둘러 결론을 내리는 대신 여러 가능성을 세심하게 살피는 인내심도 배웠다. 이런 사고방식은 수백수천 개 캐스크를 평가할 때 매우 유용하다. 물론 위스키에는 감성과 창의성도 필요하다. 과학이 판단의 틀을 제공한다면, 위스키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감각과 경험이다.

좋은 위스키를 완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무엇인가?

‘절제’다. 캐스크의 영향이 강하거나 더 오래 숙성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위스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결정이다. 또 하나는 ‘균형’이다. 오크와 셰리, 과일, 스파이스처럼 각각의 요소가 훌륭하더라도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하면 위스키 본연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 부나하벤에서는 언제나 증류 원액 고유의 캐릭터가 분명하게 남아 있기를 바란다. 숙성은 그것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한다.

부나하벤 스튜라더, 12년, 18년, 안 쿠안 가르브 No.1.

보통 아일라 위스키 하면 강한 피트와 스모키한 풍미를 먼저 떠올린다. 그렇다면, 부나하벤 고유의 증류 원액 캐릭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산뜻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단맛, 오일리한 질감에 바다를 연상시키는 짭짤한 캐릭터가 어우러진 논피트 스타일이라 표현하고 싶다. 부나하벤 원액의 시작점은 증류소 북쪽 마거데일 강에서 끌어오는 천연 샘물이다. 여기에 피트의 영향이 없는 논피트 맥아와 아일라에서 가장 높은 증류기를 거쳐 섬세하면서도 과일 향이 풍부한 원액을 만든다. 스모키한 풍미에 가려지지 않아 원액의 산뜻함과 부드러운 단맛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숙성을 거치며 고소한 견과류와 오렌지 껍질 등의 풍미가 더해진다. 아일라 해협을 마주한 증류소의 위치도 빼놓을 수 없다. 바다가 연상되는 은은한 염분감과 산뜻한 해안의 캐릭터가 부나하벤만의 개성을 완성한다.

부나하벤 셰리 캐스크의 99.9%가 올로로소인 걸로 아는데, 올로로소가 좋은 궁합을 이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나하벤 원액에는 특유의 오일리한 질감과 해안의 캐릭터가 있다. 여기에 올로로소 캐스크의 말린 과일과 견과류, 스파이스 풍미가 더해지면 풍부하면서도 균형 잡힌 위스키가 만들어진다. 훌륭한 캐스크란 원액을 완전히 덮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깊이와 복합미를 더하는 것이다.

올로로소 외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 캐스크가 있었나?

만자니아가 매우 흥미롭다. 드라이하면서도 염분감이 있어 부나하벤의 해안 캐릭터를 부각하는 동시에 산뜻하면서 정교한 느낌을 전한다. PX는 거의 반대다. 말린 과일과 단맛, 초콜릿 같은 풍부한 깊이를 드러낸다. 같은 부나하벤 원액이라도 어떤 셰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개성이 나타난다. 최근에는 올로로소와 PX, 피노 등 서로 다른 셰리 스타일을 조합하며 원액의 가능성을 계속 탐색하고 있다.

부나하벤의 DNA를 지키면서 앞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부나하벤의 DNA는 ‘논피트’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기 부족하다. 해안의 캐릭터와 오일리한 질감, 부드러운 단맛과 견과류 풍미를 띠는데, 이 개성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면모를 끌어낼 수 있는 캐스크를 다양하게 실험하고 있다. 동시에 위스키를 마시는 전통적 관념에도 질문을 던지고 싶다. 칵테일이나 푸드 페어링, 물이나 얼음을 더하는 방식 등 위스키를 즐기는 데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이런 변화가 위스키 문화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부나하벤 스튜라더, 12년, 18년, 안 쿠안 가르브 No.1에 페어링된 스패니시 레스토랑 <가토스> 의 메뉴.

개인적인 취향도 궁금하다. 술장고에 늘 채워두는 위스키가 있다면?

항상 부나하벤 18년 한 병을 둔다. 달콤하고 스파이시하면서 해안의 특색을 지녀 계절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 늘 만족스럽다.

부나하벤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 한 병을 권한다면?

부나하벤 12년을 추천한다. 부나하벤을 특별하게 만드는 특징을 두루 담고 있다. 46.3%의 도수로 병입해 비냉각여과(Non-chill Filtered)로 원액 특유의 풍부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번 방한에서는 스페니시 레스토랑 가토스에서 페어링 디너를 선보였다. 세비체부터 새우와 관자, 문어와 오징어, 캐비아까지 해산물 중심으로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 었다.

원액 특유의 오일리한 질감은 풍부한 해산물 요리를 받아낼 만큼 무게감이 있고, 짭짤하면서도 시트러스를 연상시키는 풍미는 섬세한 식재료의 맛을 돋보이게 한다. 스페인이라는 연결 고리도 자연스럽다. 부나하벤의 셰리 캐스크 숙성과 스페인의 셰리 와인 문화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새롭게 발견한 의외의 한식 페어링도 있었나?

한국식 바비큐가 캐러멜 라이즈된 풍미, 감칠맛이 부나하벤의 고소하고 오일리한 캐릭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또 한국 음식은 짠맛과 매운맛, 발효, 산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위스키의 다양한 면을 끌어낸다는 점도 흥미롭다. 같은 위스키도 어떤 음식과 함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푸드 페어링을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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