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사이, 노재원이 발견한 마음
BETWEEN GOOD AND EVIL

재킷 Recto, 셔츠 EENK, 쇼츠 THE KNIT COMPANY, 부츠 Dr.Martens, 삭스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노재원은 참 오묘한 배우 같아요. 노재원이 연기하면 선과 악의 구분도 무의미해지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제로 선과 악이 꽈배기처럼 얽혀 있잖아요. 그래서 ‘그 구분이 과연 의미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각자 사정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헤아리면 이해되거든요. 곧 개봉하는 <타짜: 벨제붑의 노래>도 이름이 같은 장태영과 박태영 두 남자가 함께 성장하면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예요. 질투, 사랑, 연민 같은 감정이 얽히면서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해지죠.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타짜: 벨제붑의 노래>의 박태영을 준비하면서 또 어떤 경험을 했을지 궁금하네요. 이번 작품에서 카드 플레이가 빠질 수 없으니 카드나 칩을 매일 들고 다니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요한이 형, 최국희 감독님이랑 홀덤도 자주 쳤고요.
노재원, 변요한, 최국희의 승률은 어땠어요? 제가 일단 부동의 꼴찌였어요. 게임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그것보다 흥미로웠던 건 요한이형은 장태영처럼, 저는 박태영처럼 카드를 치더라고요.
사람마다 집중할 때 나오는 표정이나 제스처가 다르잖아요. 박태영의 어떤 모습을 살리고 싶었어요? 박태영은 어떻게 카드를 칠 것인가를 연구하기 전에 노재원은 당황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블러핑할 때 어떤 습관을 보이는지 파악하려 했어요. 박태영은 결핍이 가득한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주변을 살피며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떠올렸어요. 박태영이라는 인물을 제 삶에 대입한 거죠.
박태영이 느끼는 결핍의 근원은 무엇이던가요? 사랑과 관심,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에요. 박태영은 친구를 배신하는 악역인데, 그렇게만 단정하면 너무 일차원적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 마땅히 누려야 할 가족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늘 발버둥 치며 자랐어요. 그런데 정말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건 잃게 되잖아요. 그래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팬츠와 슈즈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느 배역이든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박태영에게서도 닮은 구석을 찾았나요? 저도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아요. 제 연기를 사랑해주는 팬과 동료 배우, 가족이 있어도 더 큰 사랑을 원해요. 그래서 내가 만약 박태영처럼 성공을 앞둔 기로에 섰을 때 친구를 배신할 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고요.
(짧은 침묵) 배신을 할 수도..?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잖아요. 안 하려고 엄청 노력할 것 같아요. 선을 넘는 건 한순간이니까.
노재원의 욕망은 무엇으로부터 출발하나요? 저는 주변 사람을 위해 성공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어요. 각자 삶이 있고, 내가 성공한다고 주변 사람까지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행복은 각자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기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코트 Paul Smith, 셔츠와 팬츠, 타이 모두 Ferragamo, 부츠 Dr.Martens.
‘서울독립영화제 60초 독백 페스티벌’을 통해 노재원의 연기를 처음 제대로 봤어요. 연기라기보다 진짜 마음을 내어놓은 것 같던데. 그때 스물아홉이었는데 ‘서른 살이 되기 전 마지막 20대에 뭘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어요. 여러 독백을 준비했는데, 60초라는 짧은 시간에 기승전결을 담으려니 자꾸 산으로 가더라고요. 대신 제 시시콜콜한 고민거리를 말해본 거죠. 군대 전역 후 피부가 안 좋았거든요.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그래서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다시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할머니가 등산을 좋아하시는데, 잠시 편찮으셨어요. 할머니랑 등산을 많이 못 다닌 게 후회되더라고요. ‘재원아, 할머니랑 꼭 등산 자주 다녀’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지금은 회복하셔서 종종 함께 산에 가요.
지금 다시 60초 독백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다시 하게 된다면, 제 이야기를 하기보다 특정 작품의 한 장면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어떤 작품이요? 넷플릭스 시리즈 중 <베이비 레인디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마사 스콧이라는 여자가 한 남성이 베푼 작은 친절에 빠져 그를 스토킹하는 이야기예요. ‘나는 누군가를 집착하듯 좋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재킷과 팬츠, 이너 톱, 베스트, 슈즈
모두 Dries Van Noten.
이야기를 듣다 보니 노재원이 처음 연기한 날이 궁금하네요. 유치원에서 재롱 잔치로 단군신화 연극을 했어요. 너무 재밌어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정작 무대에서 얼어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스스로 되게 작아지는 기분이 들면서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럽던지.(웃음) 처음으로 인생의 쓴맛을 봤어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좋아했네요. 진심으로 연기가 좋다고 느낀 건 입시 준비를 할 때였어요. 제 가장 큰 장점은 연기 자체를 재밌어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대학을 세 번이나 떨어졌는데, 그렇게 슬프진 않았어요. 물론 사수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웃음) ‘난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막연한 믿음이 항상 있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순간, 놓치면 안 되는 순간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면요? 한 연극에서 할아버지 역을 맡았는데, 당시 연출 대표님이 제 연기를 보고 아쉬워했어요. 너무 인정받고 싶고, 잘하고 싶어서 한동안 매일 탑골공원에 가서 어르신들 바둑 두는 것도 구경하고, 대화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었죠. 그리고 공연을 하는데, 대표님이 인정해주더라고요. “재원아 너 진짜 잘한다. 네 연기 정말 최고다.” 그 말을 듣는데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아, 이렇게 연기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거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제로 선과 악이 꽈배기처럼 얽혀 있잖아요. 그래서 ‘그 구분이 과연 의미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각자 사정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헤아리면 이해되거든요.

후드 톱 Ferrgamo, 레이어드 톱 RECORDING HOUSE.
왜요? ‘오로지 인정받기 위해 연기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연기는 그저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 말곤 아무것도 없구나’, ‘연기를 장기자랑하듯 하면 안 되겠다’라는 저만의 신념이 생겼죠.
근데 누가 연기 못 한다고 하면 속상하지 않아요? 제가 또 수긍이 빠른 편이라 괜찮았어요.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부족했거든요. 마침 개봉한 <크루엘라>라는 영화를 보면서 ‘난 크루엘라야’ 하고 상상하며 버틴 기억이 나네요.(웃음) 그리고 단편영화 찍을 기회도 있었고, 서울독립영화제에도 나가고, 학교에서 공연하면 주연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여러 번 있어서 연기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의심하진 않았어요. 정말 재미있게 살아온 것 같아요.
오히려 요즘 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엔 오로지 재미를 위해 연기를 했다면, 지금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어요. 큰 자본과 많은 인원이 투입될수록 느껴지는 책임감도 다르고요. 근래에는 다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을 많이 하다 보니, 날카롭거나 강한 이미지로만 비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어요.
아직 연기에 헌신할 마음과 체력이 잔뜩 남아 있거든요. 연기를 정말 행복하게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마음속으로 항상 ‘관객 여러분, 마음을 열고 제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세요!’ 하고 외치고 있죠.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면요? 저한테도 따스함이 있거든요.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보는 이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작품으로요.
노재원은 어떤 작품을 볼 때 위안을 받아요? 장르 가리지 않고 잘 만든 영화를 보면 위로가 돼요. 한 작품을 위해 배우와 스태프가 헌신한 결과물을 보면 경이로운 기분이 든달까.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무한한 존경심이 생기죠. 그리고 영화를 더 풍부하게 해주는 음악이 좋을 때 여운이 오래가요.

레더 코트 STU, 베스트와 팬츠 모두 Kimseoryong,
레더 글러브 Berluti, 슈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타짜: 벨제붑의 노래>원작에도 작품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퀸의 ‘Bohemian Rhapsody’가 나오잖아요. 노재원을 상징하는 음악을 꼽아본다면요? 영화에는 ‘Bohemian Rhapsody’가 안 나와요. 음원 저작권이 너무 비싸서.(웃음)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해 종종 생각하는데,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좋아해요. 그래서 피아노 연주도 연습하고요.
노재원이 연주하는 ‘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궁금하긴 하네요. 뒷부분이 너무 어려워서 아직 완곡까지는 무리예요.(웃음) 인스타그램에 검은 화면으로 피아노 소리만 나오게 올린 적이 있긴 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연주 영상도 올려볼게요.
인스타그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림도 그려요? 그림도 종종 올리길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서완을 연기하며 그리기 시작했어요. 감독님이 극 중 서완의 정신세계에 살고 있는 화룡 로렌크란츠를 떠올리면서 그림을 그려보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실제로 제가 그린 그림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오프닝에 나와요. 진짜 뿌듯했죠. 이후로는 딱히 그리지 않다가 최근 집에서 쉬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캔버스랑 물감을 사서 그려봤어요.
‘어떤 마음과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우주를 그리고 싶은데, 그림을 그릴 줄 모르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붓에 물감을 묻혀 무작정 캔버스에 물감을 튀겼죠. 예술성을 표현하기보다 진짜 할 게 없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미술 교사인 작은아버지의 영향을 조금 받았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림을 보면서 ‘노재원은 본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림으로도 자신을 표현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답답할 때도 많고 정말 우유부단하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못났다 싶지만, 제 성격의 한 부분이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요.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할 때 노재원은 어떤 배우예요? 계속 발전 중인 배우. 아직 연기에 헌신할 마음과 체력이 잔뜩 남아 있거든요. 연기를 정말 행복하게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마음속으로 항상 ‘관객 여러분, 마음을 열고 제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세요!’ 하고 외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