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파뉴의 들꽃, 스코틀랜드 해안의 해초. 진의 풍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여름을 꿀꺽.
COAST TO FOREST

FRANCE ORIGIN ÉTÉ 2023
병 속에 봉인한 랭스의 여름
갈색 병 안에 샹파뉴의 2023년 여름이 아직 살아 있다. 오리진은 샴페인 애호가들이 먼저 알아본 진이다. 만든 사람이 컬트 샴페인 생산자 엠마뉴엘 브로셰이기 때문이다. 그는 몽타뉴 드 랭스 북단의 작은 마을 빌레르오뇌에서 1997년부터 ‘르 몽 브누아(Le Mont Benoî ît)’ 단일 밭 2.5헥타르를 일구며 재배부터 양조까지 직접 맡고 있다. 진 역시 자신의 샴페인과 같은 땅에서 난 재료만으로 만든다. 샹파뉴아르덴의 밀과 보리로 내린 증류주, 샴페인 포도 찌꺼기로 만든 브랜디인 마르 드 샹파뉴, 그리고 몽타뉴 드 랭스 언덕의 야생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라벨의 ‘에떼(ÉTÉ, 여름) 2023’은 그해 여름 채집한 꽃으로 풍미를 더했다는 서명이다. 잔에 코를 대면 만개한 꽃밭이 흩날린다. 여과를 거치지 않아 질감은 도톰하고, 50도라는 도수가 무색하게 둥글게 넘어간다. 얼음 한 조각 올려 샹파뉴의 여름을 천천히 녹여 마셔볼 것.

SCOTLAND ANOTHER HENDRICK’S
흰 약병의 반전
헨드릭스의 도발이다. 25년간 검은 약병을 고수해온 헨드릭스가 처음으로 흰 병을 내놓았다. 어나더 헨드릭스는 9년 만에 선보인 정규 라인업이자, 말 그대로 ‘또 하나의’ 헨드릭스다. 1999년 오이와 장미라는 조합으로 진의 문법을 새로 쓴 마스터 디스틸러 레슬리 그레이시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헨드릭스를 다시 만든다면? 답은 오렌지 블로섬과 카카오 빈이었다. 멕시코의 한 바에서 칵테일에 띄워 나온 카카오 꽃한 송이가 그 시작이었다. 오리지널 보틀의 11가지 보태니컬과 오이・장미의 골격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흰 꽃과 초콜릿의 켜를 얹었다. 잔을 들면 주니퍼와 시트러스가 먼저 피어오르고, 한 모금 넘기면 오렌지꽃의 화사함 뒤로 카카오의 쌉쌀함이 벨벳처럼 깔린다. 초콜릿을 입힌 오렌지필일까. 익숙한 듯 낯설지만, 자꾸 끌린다.

ITALY MALFY GIN CON LIMONE
아말피 해안을 짜 넣다
파란 병목과 노란 라벨, 그 차림새부터 이 진의 목적지는 분명하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고 샛노란 레몬이 지천에 널린 아말피 해안이다. 정작 이 진을 만드는 곳은 북쪽이다. 토리노 근교 몬칼리에리에서 1906년부터 이어져온 가족 경영 증류소 토리노 디스틸러티. 하지만 재료는 남쪽 태양이 키운 것들이다. 아말피 해안의 명물인 길쭉한 스푸사토 레몬 껍질과 시칠리아산 레몬이다. 레몬을 알코올에 담가 우린 뒤 진공 증류기에서 낮은 온도와 압력으로 뽑아내 열 손상 없이 향을 보존한다. 다디단 레몬 사탕이 아니라 방금 껍질을 비틀어 짠 생레몬 향이 살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에 토닉을 더해 마시면 이따금 바닷바람이 스치고, 그 바람에 레몬 향이 딸려온다. 올여름, 지중해는 꿈도 꿀 수 없다면 이 병을 열자.
KOREA TOUCH GIN
막걸리 양조장이 증류한 한국 숲
서울에서 나고 자란 진이다. ‘나루 생막걸리’로 전통주 신에 새 물길을 낸 성수동 한강주조가 하이터치증류소를 세우고 처음 내놓은 서울산 진이다. 흔히 쓰는 주정 대신 한국 전통 방식으로 빚은 쌀 발효주를 직접 증류해 밑술로 삼고, 쌀은 인근 농가의 햅쌀만 쓴다. 막걸리를 빚던 손이 증류기를 잡았기에 가능한 방식이다. 25가지 보태니컬과 세 번의 증류로 담은 것은 한국의 숲. 향은 솔잎처럼 상쾌하고, 잔향은 송진처럼 오래 머문다. 소나무 그늘 아래서 마티니를 마신다면 바로 이 맛일 것이다.

AUSTRALIA FOUR PILLARS OLIVE LEAF GIN
올리브 한 그루
마티니의 감초, 올리브가 할 일을 잃게 만드는 진이다. 멜버른 근교 야라 밸리의 포 필러스가 빚은 짭조름한 세이버리 진이다. 이 진의 시작은 올리브 수확철 농원을 찾은 어느 날이었다. 빅토리아주 코브람 이스테이트에서 갓 짠 올리브 오일을 맛본 뒤, 오일도 보태니컬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후 1년간의 시험 증류 끝에 세 가지 품종의 저온 압착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과 올리브잎을 함께 증류하는 레시피를 완성했다. 잔에서는 올리브잎의 푸른 향과 로즈메리, 베이리프가 허브 정원처럼 겹쳐지고, 입안에서는 그린 올리브의 씁쓸하고 짭짤한 맛이 스친다. 한 입 꿀꺽 넘기면 오일과 마카다미아가 만들어낸 매끄러운 질감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마티니에 어울리는 가장 완벽한 올리브가 이미 잔 속에 들어 있다.

JAPAN KYOTANGO MAIRINGEN DISTILLERY FRESH CRAFT GIN
비 갠 교토 숲
스읍! 숲에서는 누구나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다. 문득 낯선 향이 스치면 걸음을 멈추고, ‘킁킁’ 그 향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마이린겐은 바로 그 순간처럼, 숲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경험을 담으려 했다. 교토 단고반도 해발 620m 산정에 자리한 증류소는 주변에 자생하는 식물을 가장 신선할 때 채집해 술을 빚는다. 어떤 것은 당일 아침에, 어떤 것은 증류 30분 전 수확해 증류기에 담는다. 구로모지(낙엽 관목), 달군 돌로 급속 로스팅한 구마자사(조릿대) 등 14종의 보태니컬을 쓰고, 경도 10의 초연수와 경도 180의 초경수를 블렌딩해 완성한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비 갠 뒤의 숲속 공기. 갓 꺾은 가지와 젖은 흙, 이슬을 머금은 잎사귀가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말린 허브의 농밀함 대신 살아 있는 식물의 생기가 느껴진다.
JAPAN KI NO BI SEI
교토의 사계
교토의 숲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오래 바라볼수록 향이 깊어진다. 키노비는 쌀 증류주를 베이스로 유자와 히노키, 산쇼, 교쿠로 차 등 교토를 대표하는 식재료를 층층이 쌓아 올렸다. 특히 세이(勢)는 도수를 끌어올려 키노비의 풍미를 더 강렬하게 밀어붙인 에디션으로, 고도수임에도 거칠지 않고 풍미가 단단하다. 첫 입에 타격감이 오지만, 오리지널의 깨끗함과 맛의 균형은 그대로다. 갓 깎은 편백처럼 맑고 상쾌하며, 유자의 산뜻함과 산쇼의 알싸함이 천천히 번진다. 마실수록 정원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더욱 짙어진다.

UNITED KINGDOM MERMAID GIN
파도가 지나간 자리
혀를 타고 파도가 밀려온다. 영국 남부 와이트섬에서 증류한 머메이드 진은 해안 절벽 아래 자라는 록 샘파이어와 손으로 채집한 엘더플라워를 담았다. 핵심 보태니컬인 록 샘파이어는 현지에서 ‘인어의 키스(Mermaid’s Kiss)’로 불리는 식물. 바다를 담았지만 비릿하지 않고, 해풍처럼 맑고 시원하다. 물고기 비늘을 새긴 푸른빛 병만큼 이 진이 담고 싶었던 맛도 선명하다. 레몬 제스트의 산뜻함으로 시작해 그레인 오브 파라다이스의 후추 같은 스파이스가 치고 올라오고, 마지막엔 바다 공기의 은근한 짠내가 느껴진다. 굴이나 생선 요리와도 잘 어울리지만, 가장 좋은 페어링은 여름 저녁의 바닷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