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다섯 명이 말하는 작품 속 인물에 관한 이야기.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를 계속 생각한다. 실재하지 않는 인물일수록 더욱 그렇다. 소설의 활자 사이, 노래의 음절 끝에 깃든 사람들. 작가는 그를 만들지만, 완성하는 것은 결국 독자다. 그러니 같은 인물이라도 읽는 사람의 수만큼 얼굴은 각양각색이다.
상상은 사실보다 더 선명할 때가 있다. 텍스트가 침묵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채워 넣는다. 그가 어떤 냄새를 풍겼는지, 웃을 때 어느 쪽 눈꼬리가 먼저 올라갔는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 배우부터 영화감독, 작가,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LP 바를 운영하는 사장이 저마다 방식으로 상상한 누군가를 이야기한다. 그 상상이 결국 자신을 닮았는지도 모른 채.

1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1926년작 장편소설. 자전적 소설로, 모더니즘 사조를 따른다.
2 <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의 1995년작 장편소설. 작가 특유의 유머로 30대 중반의 미혼남이 성숙한 성인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3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의 1906년작 소설. 작가의 청소년기 경험을 바탕으로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맞서 싸우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다.
4 <바늘과 가죽의 시>, 구병모의 2021년작 장편소설. 늙지 않는 생을 살아가는 인간화된 요정 ‘안’을 통해 영원의 삶을 시처럼 풀어낸 소설이다.
5 <눈썹달>, 2004년에 발매한 이소라의 6집 정규 앨범. 이 앨범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여자 가수’와 경향신문 선정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수록됐다.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제이크 반스’

민규동 영화감독 겸 제작자.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각본과 감독을 맡아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오감도>, <내 아내의 모든 것>, <간신>, <파과> 등 영화 각본과 감독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소설은 그를 설명하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늘 그렇듯,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 그를 상상해왔다. 파리의 어느 카페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 제이크 반스. 머리카락은 짧고 단정하게 빗어 넘겼을 것이다. 포마드를 쓰되 번들거리지 않게. 1920년대 파리의 아메리칸이지만 관광객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의 헤어. 측면은 짧고 윗면만 살짝 볼륨이 있는 형태. 면도는 매일 하되 가끔 하루를 건너뛴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이 오히려 그를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옷은 트위드 재킷, 어깨가 잘 맞는 것. 그는 옷에 공들이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셔츠는 흰색 또는 옅은 블루. 타이는 하되 느슨하게. 바지는 울 소재의 하이웨이스트, 약간의 여유가 있다. 구두는 갈색 브로그. 닦여 있지만, 완벽하진 않다. 완벽함을 경계하는 남자이기에. 코트는 낙타색 울 오버코트. 파리의 11 월, 센강 변을 걸을 때 깃을 세운다. 손목시계는 1917년에 출시한 까르띠에 탱크. 전장의 기억을 사각 케이스 안에 눌러 담은 듯한 형태. 늘 시간을 확인하지만, 서두르는 법이 없다. 주머니엔 골루아즈 담배와 성냥. 라이터는 쓰지 않는다. 성냥불을 켜는 그 순간의 정지가 그에겐 필요하다.
그가 앉아 있는 카페는 셀렉트 또는 라 클로즈리 데릴라. 창가가 아니라 안쪽, 그러나 출입구 전체가 보이는 자리. 압생트로 시작해 와인으로 넘어가는 밤. 리오하 레드. 스페인산이어야 한다. 팜플로나의 피에스타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마신다.
시드니 베쳇의 소프라노 색소폰이 밤을 가르는 몽마르트르의 재즈 클럽. 제이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표정을 짓는다. 음악이 배경이 되는 순 , 그는 비로소 조금 쉰다. 폴리 베르제르에서 조세핀 베이커가 파리 전체를 들썩이게 할 때도, 그는 그런 열광의 가장 바깥 자리에 서 있다. 그림은 사지 않고 본다. 몽파르나스를 천천히 걷는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앞에서 오래 멈춘다. 목이 길고 눈이 텅 빈 얼굴들. 과잉 없이 슬프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거기서 찾는 것처럼.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 7월의 태양 아래 그는 흰 셔츠에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른다. 소몰이 행렬이 좁은 골목을 뒤흔드는 아침, 그는 이미 광장 한편에 서 있다. 군중이 열광하는 동안 그는 투우사의 움직임만 본다. 화려하지 않고 정확한 것.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고요한 사람. 제이크가 투우에서 찾는 것은 쾌락이 아닌 존엄이다.
그는 브렛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 그 결핍을 그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낚시를 하러 간다. 부 르게테의 차가운 강물이 발목에 닿는 곳으로 들어가 말없이 낚싯줄을 던진다. 그 침묵이 그의 가장 깊은 언어다. 나는 이 남자를 영화로 찍은 적이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상상해왔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남자를. 스타일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감추는 방식이 드러내는 방식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때. 제이크 반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인물이었다.
닉 혼비의 소설 <하이 피델리티>, ‘롭 플레밍’

장윤수 ‘카타오모이(짝사랑)’와 ‘요캇타네(다행이군)’라는 LP 바를 운영한다. ‘외부 음식도 가능하지만 다른 손님들과 나눠야 합니다(소분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같은 천연덕스러운 소리를 메뉴판에 써놓고 생각보다 손님이 너무 많이 온다며 한숨 쉬지만, 이 또한 의도적 설계와 치밀한 고집으로 보인다.
닉 혼비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다. 옹색하고, 외골수이며, 별 볼 일 없다. 조그마하고, 장사가 안 되는 레코드 숍을 운영하고 있다. 장사가 안 되는 건 그의 한물간 취향 때문. 요즘 들어 잘되는 일이 없어 좋았던 날에 집착하고 있다. 스스로에게라면 모르겠다만, 누군가 옆에서 보기에는 멋진 인생이 아니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같은 이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외모가 누추한 사람 중에는 스스로의 외모를 ‘대단히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외모에 관심이 없거나 안 꾸미는 게 아니다. 분명 신경 쓰고 있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분한데, 그것이 일반적이거나 객관적인 평가 기준에 놓일 수 없기에 누추해 보이는 것이다. 소설 중 구체적으로 묘사된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떤 것을 걸치고 있을지 그림을 그릴 순 있다. 목이 ‘살짝’ 늘어나 아직 버릴 때는 안 된 티셔츠, 여기저기 올이 나간 아크릴 카디건, 물이 다 빠져 위사와 경사의 경계가 불분명한 리바이스 오렌지 탭 청바지, 그리고 닳아 밑창이 기운 컨버스 슈즈. 장신구 따윈 없을 것 같은데, 있어도 카시오 시계 하나 정도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입고 다니리라 유추하는 것은, 그에게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꾸미기 같은 본업 외 무엇에 투여할 만한 시간과 돈이 없는 사람이라면, 음반과 음악만으로 충분히 즐거워 다른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20대처럼 좋았던 시절에 매인 한물간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외모와 일상은 연속한다. 얼핏 그는 대단히 무신경하게 삶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옷장 속, 아니 세탁기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고 나서 일 좀 하다 퇴근한 후 자주 가는 동네 펍에서 맥주 한잔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술은 ‘맥주와 기타 등등’ 정도로 이해하며, 관계는 섹스할 때 좋았는지 아닌지 정도로 평가한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피곤해서 이루어나갈 의지는 없다. 좋았던 날, 좋았던 사람, 좋았던 경험을 자주 추억하는데 그것은 진짜 좋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추억하는 것 말곤 딱히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수하고 하찮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닉 혼비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인 만큼 자주 등장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는 내적으로 조금이나마 성장했고 현실을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는데, 앞으로 인생에 대한 계획을 조금이나마 그리며 마지막 장면에 다다른다. 나는 이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장하지 않아도 되고, 명쾌하지 않아도 되며, 계획 없이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살던 대로 살아도 그냥저냥 살 수 있는데 뭘 더 바꾸고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지금은 충분하다. 가랑이 터진 청바지와 건조대에서 걷은 티셔츠를 입고 나서 가게 생맥주를 마시며 대충 일하는 척하다 퇴근해 씻지 않고 잠드는 삶. 이런 날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이 진정 맞기 때문인지, 아니면 롭 같은 닉 혼비 소설 주인공들이 겪는 중간 과정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관심도 없다. 그저 나와 닮은 사람의 이야기인 게 좋았다. 우주로 나아가 외계인과 우정을 나누다 생명과 문명을 아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롭의 별 볼 일 없는 삶도 나쁘진 않고, 나의 정체된 날도 제법 쏠쏠하다.
구병모의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 ‘안’

홍사빈(배우) 스무 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다. 남보다 시작이 늦었다는 생각에 독립영화와 장편·단편을 합쳐 100편 이상 영화에 출연하며 경험을 쌓았다. 직접 시나리오와 연출에 도전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화란>과 <탈주>, <더 킬러스>, <극장의 시간들>에 출연했다.
언제나 상상을 빌려 저릿한 현실을 짚어내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 그곳에 등장하는 ‘안’은 기원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나타나 영생을 누리는 요정이다. 구두 장인으로 일하는 그는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주기적으로 거처와 모습을 바꾸며 살아간다. 구두를 짓는 반복적인 노동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완성된 구두 한 켤레마다 그의 정체성이 조금씩 덧입혀진다. 지독하리만큼 길고 지독히도 지루한 일생이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영생을 유지한다는 건 결국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다. 어쩌면 그에게 취향이란 그저 살기 위한 가면에 불과할지 모른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안의 옷장은 무채색 상의와 평범한 청바지뿐이다. 가끔 구두를 지을 때 자신이 품지 못한 다채로운 색을 섞어 넣으며 아쉬움을 대신할 뿐이다. 마트에 간 안은 시식 코너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안은 인간처럼 무언가를 먹으며 목숨을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평범한 인간답게 보이기 위해 먹는다. 만만한 식빵을 고른다. 무언가를 올려 먹어도 좋고, 발라 먹어도 좋다. 냉장고 안을 떠올려본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가공식품, 기분이라도 낼까 싶어 사둔 맥주와 와인···. 아무래도 식빵과 어울리는 음식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도, 먹기 위한 목적도 없다. 안은 이따금 텅 빈 존재인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안은 때때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인간다움’을 상상해 보곤 한다. 유한한 삶이기에 반짝일 수 있는 아름다운 순간들. 자신에겐 그것이 없다는 사실이 안을 짙은 외로움에 빠뜨린다. 그러니 인간다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정도가 이 고독한 요정의 유일한 취미일 것이다. 만화를 즐겨 보는 안은 어느 날 넷플릭스에서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을 보게 된다. 마왕을 쓰러뜨린 후,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 수명이 짧은 인간 동료들의 죽음을 겪으며 비로소 이별과 기억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다.
화면 속 프리렌을 보며 안의 뇌리에 스친 구절이 있다. “인간의 수명은 짧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들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하며 눈물짓는 프리렌의 마음을 이해하는 한편, 여전히 체념하는 자신을 보며 낙담한다. 프리렌과 자신의 차이가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그것은 바로 ‘용기’였다. 만남과 이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
그제야 안은 깨닫는다. 내심 사랑했던 여인 ‘미아’를 조용히 떠나보내야만 했던 마음, 인연을 맺었던 노부인에게 알은체 하지 못하고 멀리서 행복만 빌어주던 방어적인 태도는 모두 이별이 두려웠기 때문임을. 누구나 이별을 경험한다. 안은 더 이상 이별을 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멋진 가죽옷을 지어 입는 꿈을 꿔본다. 늘 누군가의 발만 비추던 거울 앞에, 자신이 상상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서본다. ‘이래도 되는 걸까?’ 내심 망설이지만 이내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씩 웃는다.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안은 그렇게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향할 것이다. 상실을 딛고 또 다른 자아를 찾아, 누구보다 멋진 모습으로 열렬히 사랑하는 안의 이야기를 나는 진심으로 보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한스 기벤라트’

김보라(배우) 2005년 아역 배우로 데뷔해 22년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드라마 <터치>, <SKY 캐슬>, <사마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 영화 <암전>, <굿바이 썸머>,<천국의 아이들>, <괴기맨숀>, <옥수역 귀신>, <침묵> 등에 출연했다.
한스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계절은 ‘초겨울’이다. 해는 짧아지고 어둠은 빠르게 깔린다. 아침 공기가 축축하게 세상을 적시고, 사람들은 뿌연 안개 속으로 바삐 지나간다. 한스는 사람들과 눈을 잘 마주치는 편은 아니다. 대화를 나눌 때 두 귀는 상대의 말에 집중하며 경청하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서툰 사람이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 잠시 뜸 들인 뒤 짧게 대답하곤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는, 막 사라진 온기가 땅속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초겨울’과 닮아 있다.
한스는 화려함과 가장 먼 곳에 있다. 머리는 단정하지만 완벽히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지저분한 모습은 싫어하기에 손으로 몇 번 쓸어 넘긴 흔적만 남아 있다. 지금 시대라면 미용실에서 “너무 꾸미지 않은 평범한 스타일로 해주세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튀지 않는 방향으로 ‘평범’을 택한다. 눈썹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도 그의 새하얀 피부를 감추진 못한다. 밤마다 찾아오는 고심은 그를 수면에서 멀어지게 하고, 창밖으로 들리는 새들의 날갯짓은 푸른 새벽으로 그를 초대한다. 눈 밑에 자리한 짙은 다크서클은 그를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잠에서 깬 이른 아침, 그는 누워 있는 대신 외출 준비를 한다. 서둘러 걷는 사람들 속에 자연스레 합류하는 한스. 짙은 회색 코트 속으로 바랜 셔츠가 내비친다. 옷을 고르는 그의 기준은 언제나 ‘무채색’이다. 흰색보다는 검정, 검정보다는 회색. 로고가 드러나는 옷은 절대 입지 않으며, 새 옷을 입을 때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닳아버린 옷으로 손을 뻗는다. 신발도 검정에 가까운 무난한 팀버랜드 옥스퍼드 슈즈를 신는다.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신지만, 구두 어퍼의 작은 흠집을 제외하면 깔끔한 상태인 것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오랜만에 쇼핑할 때면 늘 찾던 브랜드와 디자인을 고르는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한스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도 눈에 띈다. 평범함을 원하는 그가 눈에 띄는 이유는 쉽사리 감춰지지 않는 한스만의 강렬한 분위기 때문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대신 숨기고 싶어 하던 그는 그것마저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버스에 앉아 유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도 한쪽 귀에만 연결해 외부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 온전히 음악에 빠지기보다 바깥소리를 함께 곁들일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용한 클래식이나 포크송을 즐기는 한스는 닉 드레이크 같은 목소리에 한두 가지 악기로 만든 여백이 있는 음악을 좋아한다. 나머지 여백 사이로 세상 살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품고 있는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이다.
한스는 따뜻한 티를 즐겨 마신다. 클래식한 식탁에 앉아 찻잔을 쥔 채 사색에 잠기는 한스. 사람을 그리워하지만 가까이하지 않는 한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시선 끝에 사람들이 걸릴 때면 그들의 모습에서 삶을 이해하려 한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그를 유약한 인간으로 만들었지만, 사람을 향한 사랑을 멈추진 못했다. 언제나 인정을 바라는 그에게 사람은 목표이자 수단이 되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다. 그의 사색은 다정하지만, 냉소적이고 잔인하면서도 희망적인 것에서 온다. 특별할 것 없지만, 평범한 삶에서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의 순박함을 나는 사랑한다. 마음 깊은 곳에 따뜻함을 품고 서늘한 거리를 걷는 그에겐 언제나 ‘초겨울’이 따라온다.
이소라의 노래 <시시콜콜한 이야기>, ‘윤오’

장우철(작가) 글과 사진을 다루는 작가. 오랜 시간 <GQ> 코리아와 <데이즈드> 코리아에서 에디터로 일했다.(그때 가수 이소라와 두 번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독창적인 기획으로 특별한 페이지를 펼쳐내던 에디터십으로부터, 지금은 자신만의 생각과 작업에 집중하는 작가로서 글을 쓰고 전시회를 연다. 종로구 이화동에 작업실 겸 갤러리 ‘미러드’를 열고 있다.
사랑했고, 버려졌다. 그걸 “어쩔 수 없는 일이야”(<난 행복해>, 1995년) 노래로 부르는 마음이라니. 나는 그녀의 무대를 두고 늘 형극 같다 생각했으니, 깎아서 짓이겨서 토하듯이 부드럽게 소리 내는 가혹이야말로 이소라 노래를 겪어내는 매혹이라 여기는 것이다. “난 너에게 편지를 써, 내 모든 걸 말하겠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2002년) 그녀가 노래하면, 우리는 편지를 기다렸는지도 모르면서 ‘모든 걸’ 들어야 한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소라 노래’라는 폐쇄적 장르 속에서 그 숱한 ‘너’와 ‘그대’는 누구일까. 성급한 호기심으로 답을 구하지 않음은, 이미 떠올리고 있기 때문에. 그때 내가 아파한 사람, 그때 나를 아프게 한 사람, 우리들 각자의 너와 그대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로 불쑥 ‘윤오’라는 이름이 던져진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이름이다. 이것은 박제된 비극을 부화시키는 무슨 시시콜콜한 파멸의 신호인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2004년 겨울 초입에 나온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다. 늦은 밤, 잠들었을 친구에게 전화를 건 ‘나’와 전화기 저쪽 친구의 대화가 나란히 흐른다. “나는 모르겠어 윤오의 진짜 마음을” 하면서 ‘나’의 말이 전화기 저쪽으로 연이어 전달되고, 친구는 그런 ‘나’를 걱정한다. 그럼 같이 걸을 때도 한 걸음 먼저 가서 ‘나’를 자꾸 울게 만드는 윤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윤오는 방금 잠들었다. 그의 얼굴은 미남과 거리를 둔다. 단번에 타인의 시선을 빼앗는 부류가 아니다. 오늘 저녁 시내버스에서 백팩을 메고 퇴근하던 사람, 내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릴 그 사람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다”(<바람이 분다>, 2004년)는 평범함이고, 하필 ‘나’는 그것에 빠진다. 윤오는 누구나처럼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Track 9>, 2008년) 살면서, 그런 말을 가사로 쓰지도, 노래로 음미하지도 않는다. 아무렴 그는 ‘이소라 노래’를 안 듣고도 잘 살아왔다. 말해 뭐해, 건강하다. 무해하다. 싱겁게 웃는다. 이상한 고집이 있지만 아는 사람만 안다. 그의 일상은 저 지독한 예술로부터 멀고, 마모된 사무용 가구의 질감에 가깝다. 윤오에게선 무슨 향이 나지 않는다. 셔츠에서 빨래 냄새, 바지에서 다림질 냄새가 스친다. 옷을 못 입는다는 지적을 듣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가만 보면 손이 참 크다. 손톱은 가지런한데, 왼손 엄지를 오랫동안 물어뜯은 자국이 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윤오의 특별함을, 다정함을 기억하려 애쓴다. 표정들이, 말투가 내게 있으니까. 그런데 증명이 안 된다. “음 마음을 보여줘요”(<믿음>, 1998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말해야 할까. 그의 다정함은 병인 양 머리 위를 지나는 바람임을, ‘나’는 모르고 우리는 안다. 윤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한 곡의 주석이 아니라, 이소라의 모든 노래에 어른거리는 ‘그대’의 다른 허상이다. 그는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바람이 분다>)라는 문장의 하나뿐인 주어이자 ‘나’의 고통을 모르는 견고한 벽의 복수(複數)다. 그의 백팩에는 ‘나’와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구원의 문장이 들어 있지 않다. 결국 윤오의 진짜 모습이란 내 것일 수 없는 타자성의 완성이다. 그는 “나만 원한다고”(<제발>, 2000년) 했던 과거로서, 날마다 기억이라는 궤도를 선회하는, 미남도 악인도 아닌 채 우리 곁을 스치는 실연의 알리바이다. “그늘진 얼굴, 참 못생겼어”(<Tears>, 2004년) 이런 ‘나’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달리, 윤오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고 사라져간다. 응답받을 수 없으므로 노래는 점점 기도가 되어간다. “다 잊기로 해 나를 믿기로 해, 아멘”(<Amen>,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