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준은 기를 쓰지 않는다
무심하게 툭, 박해준은 기를 쓰지 않는다.

실은 오늘 인터뷰를 조금 걱정했어요. 과거 인터뷰 영상을 보니 말수가 적더라고요.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보니 말을 아끼게 돼요. 누구나 그렇지 않나요? 조심스러워서 말주변이 없어 보였나 봅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인터뷰에서 외모에 대한 칭찬이 늘 빠지지 않더군요.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 하하.
대학 시절 별명이 ‘아도니스’였다고요. 잘생겼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죠? 이제 나이도 꽤 먹었는데, 아직 그런 말씀을 해주니 고맙죠. 민망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 가수를 꿈꿨다고 들었어요. 소년 박해준의 마음을 움직인 가수가 있었나요? 그냥 ‘대통령이 되고 싶다’ 같은 막연하고 잠깐 스쳐간 꿈이었어요. 정말 가수가 되고 싶었다면 음악을 배우려 애쓰거나 지독한 리스너여야 하는데, 전 둘 다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무대에 서거나 주목받는 걸 즐기는 아이였으니, 그런 꿈도 꾼 게 아닐까요? 전혀요. 반장 선거에 나간 적이 있는데, 친구들 앞에서 공약을 말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떨리기도 하고, 내가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말을 내뱉는 게 어렵더라고요.
신중한 아이였군요. 생각해보면, 긴장하고 떨린다는 건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 것 같아요. 가수도 그냥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각하고 노래하면 되는데, 실수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연기는 안 그래요.
일인데 더 잘하고 싶지 않나요? 오랜 시간 연기하면서 훈련된 건지 몰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지 않아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임하죠. 배우는 대본과 상황이 주어지니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거든요. 그 지점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요.
그 지점이라면…. 대본을 읽고 캐릭터를 마주할 때 ‘내가 살면서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언제 이런 말을 해보고, 이런 상황에 놓여보겠나 싶거든요. 잘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 재미로 연기를 하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는 마음으로 계속 해온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알 것 같고, 할수록 나아지는 게 보이니까 손을 놓기가 아쉽더라고요.
2012년 영화 <화차>에서 사채업자 역으로 데뷔했죠. 당시 이선균 배우가 소속사가 없는 학교 후배들의 프로필을 모아 변영주 감독에게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함께 오디션을 본 배우가 이희준, 진선규, 김민재 배우인 걸로 아는데 감독님은 왜 박해준을 선택했다고 하던가요? 오디션 때 사채업자 역을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 마스크(변영주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되게 잘생긴 얼굴로’)로 그런 눈빛을 지으며 나쁜 욕을 뱉으면 진짜 무섭겠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런 눈빛은 뭘까요? 그런데 뭔지 알 것도 같아요. 저도 상대방의 눈에 이렇게 집중하며 인터뷰하는 건 처음이에요. 몰입하게 만드네요. 감독님도 이 눈빛에 끌린 걸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오디션 대본은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역이었는데 슬쩍 한 번 쳐다본 게 인상 깊으셨나 봐요. 사채업자 역은 이름도 없었지만, 그 역을 맡아 정말 좋았어요. 저한테 악랄하고 센 역할이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어요.
비록 무명이지만 관객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어요. 작품성도 인정받았고요. 뜬금없지만, 저는 운을 믿습니다. 노력도 중요한데 확실히 운이 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필모 그래피를 쭉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화차>를 비롯해 신인 시절부터 수작을 꾸준히 만났더군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작품을 통해 맺은 인연이 사슬처럼 이어졌거든요. <화차> 덕분에 <화이: 괴물을 삼 킨 아이>(2013)와 <미생>(2014), <4등>(2016)에 출연하게 됐어요. 변영주 감독님처럼 한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발견해주는 분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죠.

인물에 연민이 느껴지느냐, 정이 가느냐, 품고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요. 꼭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작품 전체에서 그런 정서가 느껴지면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기꺼이 맡고 싶죠. 작품이라는 이 집의 한쪽 벽에 시멘트라도 좀 바를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정지우 감독도 안목이 탁월한 분 아닌가요? <4등>, <침묵>, <유열의 음악앨범> 등 세 작품을 했지만 확연히 다른 얼굴이에요. 그걸 박해준이라는 한 인물에게서 발견했고요. <4등>을 작업할 때 사석에서도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그런 시간 속에서 저라는 사람을 깊이 알아가신 것 같아요. 감독님은 배우가 기본적으로 지닌 기질을 유심히 보는 분이에요.
정지우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속이 좋아야 배우다’라는 말씀을 하면서 본인은 뚫어져라 열심히 사람을 본다고 했어요. 나를 알기 위해 열심히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죠. 배우와 감독은 참 흥미로운 관계 같아요. 맞아요. 정지우 감독님은 배우가 자기 안의 모습을 그대로 꺼내 표현할 수 있도록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줘요. 그래서 대본에 갇히지 않고 훨씬 더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죠.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싶을 만큼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거든요. 이상하게도, 감독님과 작품을 할 때면 이게 연기인지 실제 상황인지 분간이 안 가는 묘한 순간이 있어요.
어떤 감정인지 궁금하네요. 오랜 시간 악역 전문 배우로 불리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 역으로 새 이미지를 입었죠. 사실 양관식이나 <나의 아저씨>의 겸덕처럼 측은한 마음이 드는 역할도 꽤 했어요. 같은 남자로서 가장 연민을 느낀 캐릭터는 누구인지 궁금해요. 배우는 자신이 맡은 모든 캐릭터에 연민이나 동정을 품게 돼요. 인물을 연구하다 보면 끊임없이 ‘너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니?’라고 묻거든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쓰이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주 악랄하고 일을 그르치는 인물에 더 연민을 느껴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면서 그 감정이 짙어지죠.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데 정작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미 선 넘는 행동을 해버리니 안타깝죠. 겸덕이나 관식이는 ‘아, 이래서 마음이 아프겠구나’라고 공감하면서, 그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는 과정을 함께 겪어나가는 느낌이고요.
연민이라는 감정이 작품을 선택할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되나요? 그럼요. 그 인물에 연민이 느껴지느냐, 정이 가느냐, 품고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요. 꼭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작품 전체에서 그런 정서가 느껴지면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기꺼이 맡고 싶죠. 작품이라는 이 집을 지을 때 한쪽 벽에 시멘트라도 좀 바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웃음)

개인적으로 저는 박해준의 많은 얼굴 중 TVING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의 남금필을 참 좋아합니다. 아, 좋은 작품이죠. 제 아내도 제가 출연한 작품 중 그 드라마를 가장 좋아할 거예요.
박해준과 금필의 닮은 점이 많아서 그런 걸까요? 그보다는 작품 자체가 참 예쁘잖아요.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릿하지만, 웃음도 나고 현실과 맞닿은 부분도 있어서 애착이 가죠.
사실 남금필이 이상적인 아버지상은 아니잖아요. 점심시간에 원하는 음식을 못 먹는다고 직장을 관두고 웹툰 작가가 되겠다는 44세 남자, 딸에게 19만 원을 빌리는 아빠죠. 실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금필이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나요? 한심하죠. 그래도 고집대로 꿋꿋하게 살다가 조금씩 성장하거든요. 아버지로서는 눈에 띄게 성장하지 않지만. 하하. 그런데 아주 순수한 인물이에요. 금필이 같은 사람이 많으면 세상이 재미있고 아름답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사람이잖아요. 사실 제 꿈이 금필이 같은 사람이었어요.
어떤 점에서요? ‘동네 아저씨’가 꿈이었죠. 그냥 집 앞 놀이터에 나가 하릴없이 아이들과 모래 놀이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들어와 TV 보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그래서 이 역할이 들어왔을 때 너무 기뻤고, 애정을 가지고 재미있게 촬영했어요.
유난히 하루가 고된 날, 위로받고 싶을 때 보면 좋더라고요. 그렇다고 위로를 억지로 강요하는 작품도 아니고요.
맞아요.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인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아쉬워요. 아직 티빙에서 볼 수 있죠?
네.(웃음) 대화가 갑자기 PPL 분위기로 흘러갔네요. 만약 실제 아들이 마흔넷에 퇴사하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한다면 응원할 건가요? 네. 저는 충분히 그럴 것 같아요. 저도 재주만 있다면 다른 걸 해볼 것 같거든요.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몇 살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연기 외 재미를 느끼는 일은 없나요? 아직은 없어요. 그렇다고 연기가 늘 재미있는 것도 아니지만요. 고생스러울 때도 많죠. 즐겁다가도 힘들고, 가끔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어요.
어떤 일이나 다 같군요. 아니다, 재밌다고 해야겠다. 재밌어요, 재미있잖아요. 하하

나이가 들수록 ‘재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일이 줄어들잖아요.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는데, 대화 내내 ‘재미’를 꽤 많이 언급했어요.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해요.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면 또 다른 재미가 따라붙는 것 같아요. 다행히 배우는 늘 새로운 환경에 놓이잖아요. 요즘 새삼 느끼는 건데, 한 작품을 온전히 좋아하는 맛이 또 있더라고요.
온전히 좋아하는 맛은 어떤 건가요? 신인 때는 여러 작품의 작은 역을 동시에 맡다 보니 아무래도 한 작품에 집중하기 어려웠어요. 집을 짓는다고 가정할 때, 과거엔 한쪽 면에만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랐다면, 이제는 집 전체를 설계하면서 하나씩 채워가는 즐거움이 커요. 주변에서 가끔 듣는 칭찬도 큰 힘이 되고요. 그만큼 책임감이 느껴져 부담이 되기도 하고.
온탕과 냉탕을 몇 번씩 오가는 기분이죠. 13년간 배우 생활을 하면서 또 어떤 재미가 있었나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는 마음으로 계속 해온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알 것 같고, 할수록 상황이 나아지는 게 보이니까 손을 놓기가 아쉽더라고요. 누구나 그렇듯, 기회가 오면 붙잡고 싶잖아요. 그리고 두 아들 대학은 보내야 하니까 열심히 해야죠. 하하
솔직한 답변이네요. 이제야 이 말을 꺼내는데, 오는 2월 11일 차기작 <휴민트>가 개봉합니다. 류승완 감독과는 첫 작업이죠? 맞아요. 고전 멜로가 녹아 있는 액션 첩보물인데, 분위기가 묘해요. 의외로 눈이 가고 여운을 주는 부분이 있거든요. 제가 맡은 역할은 북한 총영사인데, 빌런입니다.
악역 연대기를 다시 쓰게 되나요? 감독님과 처음 미팅할 때 좀 부담스럽다고 고백했어요. 악역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지만, 그간 악역 이미지가 워낙 짙어서 걱정됐죠. 그런데 감독님의 설명을 들으니 그 인물이 또 매력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빌런의 모습이 있습니다.

조인성, 박정민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박)정민이는 <더 에 이트 쇼> 때 함께했고, (조)인성이와 작업한 건 이번이 처음이 에요. 인성이는 형같이 든든한 동생이에요. 현장에서 애로 사 항이 있을 때 인성이에게 이야기하면 다 품어줘요. 만능 해결 사 같은 존재죠.(웃음) 현장을 아우르는 힘이 큰 배우예요.
본인은 현장에서 어떤 사람인가요? 깨알 같은 재미를 주는 존재랄까.(웃음) 놀리고 골탕 먹이면서 혼자 낄낄거리다 쓱 빠져나오는 얄미운 선배죠. 저는 현장에서 하자는 대로 그냥 따르는 편이에요. 능동적으로 뭘 제안하거나 의견을 내지 않죠.
욕심내는 건 없어요? 욕심은 있죠. 근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아요. 다들 바쁘고 힘들잖아요. 조금이라도 폐가 된다면 제 욕심을 관철하지 않아요.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요.
그건 욕심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런가요. 살면서 욕심을 갖고 진득하게 뭔가를 한 적이 없긴 해요. 등산도 숨이 헐떡이기 시작하면 바로 내려오죠. 꼭 정상을 찍어야 한다는 목표나 강박은 없어요. 낮은 산을 좋아하고, 한 시간 정도 코스가 딱 좋아요. 책도 두꺼우면 안 봅니다. 제 집중력은 아마 30분도 채 안될 거예요.
그래도 연기는 진득하게 하고 있잖아요.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만, 그건 앉아서 할 수도 있고, 산책하면서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한 신(scene)이 그리 길지 않아요. 하하. 그래서 제가 연기를 꾸준히 하고 있나 봅니다.
확실히 천직이네요. 그러고 보니, 제 기질과 잘 맞는 일인 것 같네요. 사실 저는 촬영장에 나갈 때 마음이 가장 편하고 즐겁거든요.
직장인으로 치면 출근하는 게 즐거운 셈이네요. 아직 재미를 잃지 않았다니, 부럽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