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태의 영화로운 시간
THE WAY HE IS

요즘 배우 유지태를 소환하는 이슈가 많습니다. BTS 뮤직비디오 <2.0>에서 영화 〈올드보이〉 패러디가 화제인데, 보셨나요?
전체 영상은 아직 못 봤어요. 이제는 어딜 가도 한국 콘텐츠가 주목받으니 감사한일이죠.
해외 유튜버들이 단번에 〈올드보이〉 오마주라는 걸 알아채고 환호하는 반응이 인상적이더군요.
제가 참 복이 많은 배우라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 전공생 시절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동경하며 쫓아다녔는데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한국 영화계의 전성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한국 영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올드보이〉 같은 작품도 만났죠. 세상에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하지만 제가 누린 것은 운도 따랐다고 생각하기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최근에는 〈왕과 사는 남자〉로 천만 배우 타이틀까지 얻었습니다.
한때 흥행을 염두에 두고 선택한 작품도 있었지만, 기대에 못 미친 적도 있어요.(웃음) 그래서 ‘천만 영화는 내 것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까지 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얻네요.
천만 배우가 된 뒤 달라진 점이 있나요?
네이버 프로필 옆에 골드 트로피가 생기더라고요.(웃음) 체감상 크게 달라진 건 없고, 들어오는 작품과 제안이늘어난 정도입니다.

누구나 명연기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배우에게 열정만 있다면요. (중략) 이를테면, 미술을 할 때 오랫동안 선을 그어온 사람은 ‘잘’ 그을 수 있겠죠. 하지만 삐뚤고 거친 선 역시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본연의 것이 온전히 담긴다면요.
〈왕과 사는 남자〉의 한명회는 무게감 있는 외형부터 이전의 한명회와 확실히 달라요. 그 외에도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있나요?
테이프로 눈꼬리를 올린 연출도 포함될 테고. 감독님과 제작진이 이전과 다른 한명회를 그리고 싶어 했어요. 그에 적합한 배우로 저를 떠올려주셨고요. 배우가 아무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도 감독과 제작진이 같은 방향을 보지 않으면 결국 배우만 힘들어지거든요. 예전에 그걸 크게 느낀 적이 있어요. 홍상수 감독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찍을 때 체중을 102kg까지 늘렸는데, 그 변화에 대한 특별한 피드백이 없었어요. 당시엔 치열한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다소 무모했죠. 결국 배우의 노력도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뤄야 관객과 감독, 제작진에게 존중받을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점이 잘 맞아떨어졌어요.
결과가 노력에 비례하지 않을 때 힘이 빠지지 않나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죠. 연기에 진심을 담는 것, 그게 배우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애정이 있으니까 이것도, 저것도 해보는 거죠.
치열하게 준비했기에 더 아픈 손가락 같은 작품도 있나요?
있죠. 하지만 말은 못 합니다.(웃음) 노력, 결과와 상관없이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많이 느끼고 배웁니다.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보며 리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눈빛에서 애틋함이 느껴지던데, 20여 년이 지나 다시 보니 어땠나요?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제 작품을 못 봤어요. 그런데 지금은 담담하게 보게 되더라고요. ‘저때는 저렇게 연기했구나’ 하면서요. 〈봄날은 간다〉는 온전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이에요. 젊었기 때문에 연기 면에서 아쉬움도 있지만 풋풋한 모습이 그립더라고요.
그 시절의 유지태는 지금의 본인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젊음 그 자체에서 발산되는 아름다운 에너지가 있어요. 〈주유소 습격 사건〉도 당시에는 막막한 마음으로 연기했지만, 지금은 그 자체로 좋아 보여요.
그때만 담을 수 있는 모습이 있죠. 지금은 진중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제 기억에는 하얗게 탈색한 머리와 테크노 백을 맨 유지태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맞아요.(웃음) 그땐 그랬죠. 옷 사는 걸 좋아하고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알면서 온 신경이 영화에 집중된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시절의 끼와 에너지가 아직도 제 안에 숨쉬고 있긴 해요.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 모르죠.
한때 멜로의 아이콘이었어요. 그 달달한 마스크도 다시 보고 싶긴 하네요.
〈동감〉이 흥행한 후 멜로물 제안이 쏟아졌어요. 하지만 의식적으로 피했어요. 주변에 제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도 많았죠. 당시엔 스타보다 캐릭터 배우가 되고 싶었고, 그 길을 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누구나 각자 자리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 역할만큼은 나밖에 할 수 없다’는 자신감, 어쩌면 그 이상의 자만심까지 필요해요.
저는 이전의 한명회는 모르겠고 ‘내가 그린 한명회가 제일 중요한 한명회야’ 하며 연기했어요.
설사 틀렸더라도 스스로를 믿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나요?
어떤 부분에서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드라마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제가 고사한 작품이 한류를 타기도 했거든요. 그걸 했다면 배우로서 폭이 더 넓어졌겠죠. 하지만 그때는 영화를 예술이라 생각했고, 상업성만 앞세운 작품은 경계했어요.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도 그 작가성이 있었던 거고, 그 작품이 있었기에 봉준호 감독님이 영향을 받았겠죠. 왕가위(왕자웨이) 감독도 존 카사베츠 감독의 자유로움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창조했고요. 하지만 요즘은 예술성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아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이안 감독의 〈헐크〉,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처럼 상업성과 작가성을 적절히 섞을 줄 알아야죠. 그래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커지고요.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언급하신 작가성이나 예술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걸까요?
저는 누구나 명연기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배우에게 열정만 있다면요. 제가 연출한 〈마이 라띠마〉의 주연 박지수 배우가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받았는데, 그게 데뷔작이었어요. 잠재력을 보고 캐스팅했죠. 조금 투박하더라도 그 사람 본연의 목소리가 담기면 충분히 좋은 연기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미술을 할 때 오랫동안 선을 그어온 사람은 ‘잘’ 그을 수 있겠죠. 하지만 삐뚤고 거친 선 역시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본연의 것이 온전히 담긴다면요.
대답에서 배우보다 감독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현재 극본가, 감독, 영화학과 교수까지 영화와 관련한 다양한 영역에 몸담고 있는데요. 영화에 이렇게 깊이 빠져들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마틴 스코세이지, 김기덕, 왕가위 같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며 자연스럽게 빠져들었어요.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열광했고,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을 볼 때는 ‘너무 멋진데, 이건 뭐지?’라며 충격을 받았죠. 또 뱅상 카셀의 데뷔작인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 그리고 〈트레인스포팅〉 같은 작품을 보면서 문화적으로 신선함을 얻었어요. 그렇게 점점 깊이 빠져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허진호, 박찬욱, 홍상수처럼 극명하게 다른 스타일의 감독과 작업을 했어요.
배우로서는 큰 행운이죠. 박찬욱 감독은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걸 지양해요. <복수는 나의 것〉을 찍다가 〈올드보이〉처럼 전혀 다른 결의 화려한 작품을 찍으시죠. 반면, 홍상수 감독님은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지키려고 해요. 또 박찬욱 감독에게 뭔가 여쭤보러 가면 “콘티에 다 나와 있어”, “이제 그만 찾아와도 될 것같은데?” 하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으세요.(웃음) 그게 감독님 스타일인 거죠. 반면, 허진호 감독과는 현장 밖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어요. 3개월 동안 밥 먹거나 술 마시면서 사소한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죠. 그래서 배우는 감정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고,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명감독이라 불리는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요?
있어요. 각자 자기가 최고라는 자신감만큼은 확고했어요.(웃음)
‘최고라는 자신감’, 흥미롭네요.(웃음)
저도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누구나 각자 자리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 역할만큼은 나밖에 할 수 없다’는 자신감, 어쩌면 그 이상의 자만심까지 필요해요. 그게 없다면 흔들리게 되죠. 아까 한명회에 대한 질문에 답을 이어가자면, 저는 이전의 한명회는 모르겠고 ‘내가 그린 한명회가 제일 중요한 한명회야’ 하며 연기했어요. 설사 틀렸더라도스스로를 믿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건 자신이 최고라는 믿음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해요.

재미를 잃을 새가 없어요. 매너리즘은 스스로를 과신할 때 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새로운 기술도 계속 등장하잖아요. 봐야 할 영화도 한참 남아 있고요. (중략) 아직 배울 것도, 경험해야 할 세계도 많다는 뜻이에요.
요즘 과거 캐릭터의 대사를 다시 연기하는 요청이 많더군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어요.(웃음)
그만큼 인상적이기 때문일 거예요. 대사 한마디로 순식간에 그 공간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바꿔놓잖아요.상대 배우 없이 독백처럼 지난 대사를 읊는데, 어떻게그렇게 살릴 수 있죠?
낭송에 그치지 않고 ‘말’이 되려면 그 캐릭터의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우진의 삶을 살아봤고, 그 시절의 감정과 상황을 다시 꺼내 말하는 거예요.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지만, <올드보이>나 <봄날은 간다>가 워낙 상징적 작품이다 보니 계속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도 그렇고요. 그러니 배우도그 역할을 떨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전작이 호평을 받고, 잘 맞는 역할을 만나면 거기에 머무르려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역할을 해도 이전 캐릭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스스로 타입캐스팅하는 것,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잘 소화한 만큼 잘 비우는 작업 또한 정말 중요하죠.
배우 또는 감독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어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강한 여성상이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를테면요?
<킬 빌> 같은 영화도 재밌고요. 외형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강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캐릭터 있잖아요. 예를 들면, 〈문라이트〉의 남자 주인공은 깡패지만 호모섹슈얼한 성향이 있단 말이죠. 내면에 여린 면이 있는 거죠. 그런 숨은 자아를 담아내고 싶어요.
보통 매너리즘이 온다고 하잖아요. 지금까지 이야기 나눈 바로는 유지태에게는 그런 시간이 없었을 것 같아요.
재미를 잃을 새가 없어요. 매너리즘은 스스로를 과신할 때 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새로운 기술도 계속 등장하잖아요. 봐야 할 영화도 한참 남아 있고요. 션 베이커와 아리 에스터의 최근작도 아직 못 봤어요. 예전엔 구하기 어렵던 영화도 지금은 손쉬워졌고, 언어도 빠르게 변환이 되잖아요. AI를 켜놓고 보기도 해요. 그러니 이전보다 볼 게 많아졌죠. 아직 배울 것도,경험해야 할 세계도 많다는 뜻이에요.
요즘, 배우님을 전진하게 하는 동력은 뭔가요?
여전히 영화예요. 말 그대로 ‘영화’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