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나의 가정법
또다시 골몰하는 박유나식 가정법.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 집에 가서 뭐 할 거예요? 일단 누워야죠.(웃음) 저는 완전 ‘집순이’라 스케줄이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 있어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대신 한번 불붙으면 반나절 내내 대청소를 해요. 며칠 쌓아둔 빨래랑 먼지를 싹 치우면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저녁 식사 메뉴로 정해놓은 건요? 매운 음식이요. 불닭볶음면, 마라탕도 좋아하고. 캡사이신을 따로 사둘 정도예요.(웃음) 매운맛으로 땀 한번 쭉 빼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거든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확실하네요. 지난 8월에 공개한 드라마 〈닥쳐, 내 작품의 빌런은 너야〉 이야기를 해볼게요. 숏폼 형식은 처음이었죠? 네. 호흡이 완전히 달라요. 일반 형식의 드라마는 템포 조절이 가능한데, 숏폼은 짧은 시간 안에 감정과 서사를 압축해야 하거든요. 게다가 세로 화면이라 큰 동작을 쓰기 어려운 만큼 표정으로 많은 걸 보여줘야 했어요. 오랜만에 촬영하기도 했고, 주연이라 책임감도 커서 감독님과 리딩도 많이 했죠. 그 덕분에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렵진 않았어요.

<스피릿 핑거스>도 10월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어떤 작품인지 간략히 설명해준다면요?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예요. 그림 동아리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색을 발견하고, 또 함께 성장해가는 이야기죠. 전반적으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인데, 그 안에 청춘의 고민과 위로가 담겨 있어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것 같아요.
벌써부터 기대하는 원작 팬이 많더군요. 맞아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에요. 중학생 때부터 이 웹툰을 챙겨 봤으니, 벌써 14년이 됐네요. 그때도 ‘이건 꼭 내가 하고 싶다. 내가 남그린이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컸어요. 실제로 오디션을 볼 때도 이철하 감독님께 “머리가 다 빠지더라도 탈색해서 꼭 남그린을 맡고 싶다”라고 말했죠.(웃음) 그 진심을 좋게 봐주셔서 운 좋게 이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남그린’과 박유나, 닮은 지점이 있다면요? 털털함과 당당함이요. 그린이는 극 중 그림 동아리 회장인 만큼 리더십도 있고, 주변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는 캐릭터예요. 그래서 (현장에선) 제가 거의 반장처럼 분위기를 이끌었죠. 일부러 텐션을 띄울 만한 애드리브도 많이 하고, 단체 신에선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감독님이 그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더 신나게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역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이 인물이 어떤 온도를 지녔는지, 저와는 어떤 색깔이 겹치는지 오랜 시간 고민했고요.
원작 기반 작품에 도전한다는 점이 부담되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오히려 원작 장면을 살린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든든했어요. 원작 팬 입장에서 연상될 만한 포인트가 많았거든요. 기대해주셔도 좋아요.(웃음)
또래 배우와 케미도 좋았겠어요. 그럼요. 평소에도 자주 연락할 정도로 친해졌어요. 특히 극 중 남동생 조준영 배우와는 실제 남매처럼 장난치던 기억이 나요.
민트 컬러로 염색한 헤어스타일이 화제였어요. 맞아요. 큰 이미지 변신이었죠. 머리카락이 너무 상해서 마지막 촬영 직후 바로 염색하고, 단발로 싹둑 잘랐어요.(웃음)

촬영이 끝난 뒤 공개하기까지 시간이 꽤 있었잖아요. 그동안은 어떻게 보냈어요? 알찼어요. 오디션 현장에도 자주 가고, 그사이 소속사도 옮겼죠. 스케줄이 없을 땐 집에서 쉬고요. 그 당시에는 정해진 일이 없다는 사실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 최근에 디어유 버블(DearU bubble) 채널도 오픈했어요!
남성보다는 여성 팬이 많은 편이죠? 그런 것 같아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걸크러시’ 혹은 ‘동네 언니’ 이미지가 있나 봐요. 거의 매일 채널에 들어가는데, 접속 횟수가 과한 것 같아 “혹시 제가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라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웃음) 힘들 때마다 팬과의 소통이 제겐 큰 힘이 돼요.
팬들 입장에서는 매일 접할 수 있다는 게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2015년 〈발칙하게 고고〉로 데뷔한 지 10년 차던데, 본인도 실감이 되나요? 전혀요. 여전히 스무 살 같은 기분이에요. 가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느끼긴 해요. 최근 JTBC 드라마 <더 패키지>를 다시 봤는데, 그때 제 모습이 너무 오글거리는 거예요. ‘아, 내가 한 발짝만큼이라도 성장했구나’ 싶었죠.
어떤 부분에서 성장했음을 느끼나요? 제 감정을 좀 더 명확하고 담백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됐어요. 배역을 소화할 때 처음 되뇌는 건 늘 같아요.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전에는 그 답을 찾는 과정이 조금 막연했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고요. 지금은 달라요. 같은 질문을 던져도 더 차분하게 정리해 꺼낼 수 있고,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일 힘이 생겼달까요. 그게 제 안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 같아요.

좋은 배우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네요. ‘박유나’ 하면 약 7년 전 <스카이캐슬> 속 ‘차세리’를 떠올리는 이가 많아요. 그때 모습을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음, ‘지금의 나라면 저 장면에서 어떻게 연기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돼요. 김병철 선배님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대치하는 장면이 많았거든요. 그땐 아무것도 모른 채 떨면서 찍었는데, 그 무모한 순진함과 당돌함이 화면 속에 남아 있더라고요. 그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책임감이 커져 (다시 도전한다면) 더 단단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오디션도 자주 봤다고 했는데, 데뷔한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떨리는지 궁금해요. 그럼요. 촬영보다 오디션이 더 떨려요. 상대 배역도, 공기도 온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제 전부를 보여줘야 하거든요. 준비를 많이 해도 마음보다 몸이 먼저 떠는 날이 있어요. 한번은 청심환을 먹고 들어간 적도 있고요.(웃음) 그래도 제 장점이 있다면, 어떤 결과에도 자책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번 역할은 나와 안 맞았구나 하면서 뒤돌아보지 않죠. 그래야 다음을 준비할 힘이 생기니까요.
스스로를 믿는다는 방증이겠죠. 다음 기회가 찾아와도, 언제든 다시 준비할 수 있다는 다짐처럼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저는 늘 ‘다음’이 있다는 걸 믿어요. 어떤 순간에 멈춰도, 그게 끝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해요.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단단해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면 결국 제가 원하는 장면 앞에 설 수 있지 않을까요. 힘들게 찾아온 배역은 그만큼 저를 성장하게 한다고 믿고요.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말이나 순간이 있나요? 연기를 준비하는 팬이 “언니가 제 롤모델이에요”라는 말을 해줬을 때 ‘더 단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하나 더. 집에서는 엄마가 늘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잘될 거야라고 되뇌어라”라고 말씀하시거든요. 저도 어느새 그 말을 습관처럼 따라 해요. ‘난 된다, 난 해낸다.’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작은 의식이자 제 연기를 믿게 해주는 주문이 됐어요.

좋은 동기부여네요. 스스로의 연기가 다른 배우보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평가하고 싶어요? 담백함이요. 저는 늘 ‘나’로부터 출발해요. 캐릭터를 온전히 복제하진 못해도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끝까지 완성해가죠. 그래서 과한 힘이 없고, 보는 분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잔열이 오래 남는 연기 톤, 그게 제 무기라고 믿어요.
반대로 그 가정법이 막힐 때는 언제였나요? 겪어보지 않은 극단의 감정이요. 칼에 찔린 뒤 숨을 몰아쉬는 호흡 같은 건 상상만으론 막막했어요. 다행히 현장 마다 인복이 있었죠. <비밀의 숲> 때 조승우 선배님이 호흡 하나까지 디테일을 잡아주셨고, <더 패키지>에선 류승수 선배님이 감정의 결을 알려주셨어요. 그렇게 배운 것들이 제 안에서 점점 축적돼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장르도 궁금해요. 너무 많은데, 행복한 고민이네요. 최근 한동안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와 <트리거>에 빠져서 몰아봤어요. 의학 장르도 좋고, <트리거>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는 임팩트 있는 인물도 맡아보고 싶어요. 총 쏘는 장면에서 못 벗어 나고 있거든요.(웃음)
마지막 질문이에요. 지난 20대를 스스로 평가한다면요? 덜 익었지만, 분명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아직 완성형 배우는 아니거든요. 제 안에 있는 걸 덜어내기보다는 하나씩 채워 넣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 제 색도 점점 더 선명해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