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소니

시간이 안 날 것 같아 촬영 전에 인터뷰를 먼저 하게 되었네요.
뭐 어때요. 인터뷰를 먼저 하는 것도 새롭고 재밌을 것 같은데요.

오늘 화보 촬영 콘셉트를 보고 기대 중이라고 들었어요. 화보 촬영에 열정이 넘쳐 보여요.
포토그래퍼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을 보면 신기해요. 촬영을 약속하고 나서 (포토그래퍼가) 나의 어떤 얼굴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콘셉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도 중요하죠.

같은 카메라 앞에 서지만, 연기할 때 촬영과는 또 다른 느낌인가 봐요.
배우는 작품 속 서사에 따라 표정을 만들고, 대사로 대중을 설득하는 직업이잖아요. 반면, 화보 촬영은 포토그래퍼의 의중에 따라 나를 맡기면 되니까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오늘 홀가분해 보이네요. 아, 도쿄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맞아요. 어제 돌아왔어요. 생각해보니 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더라고요. 그래서 둘이 시간을 맞춰 다녀왔죠. 넷플릭스 <기생수: 더 그레이> 촬영이 끝나서 여유도 생겼고요.

촬영은 작년에 끝났을 텐데, 공개일을 기다리느라 답답하진 않아요?
음, 이젠 좀 익숙해진 것 같아요. 작품 촬영이 끝나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작품 촬영을 위해 집중하려고 해요. 요즘 대부분의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과 과정을 거치잖아요. 팬데믹의 영향도 컸고요. 그래서 (작품 공개에 대한) 업데이트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거의 잊고 지내요.

기다림의 미학처럼요?
그렇죠. 그러면 작품이 공개될 때 기분이 더 좋더라고요.(웃음)

일본 만화 원작인 <기생수>가 워낙 유명한 만큼 <기생수: 더 그레이>를 기대하는 이도 많던데요.
그러니까요. 제 친구들도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딱 그 만화책을 읽던 세대거든요. 이렇게 제 작품을 기대해주는 건 처음이에요.(웃음) 그만큼 저도 얼른 보여주고 싶어요.

소니 씨도 고등학생 때 원작을 읽었나요?
아니요. 그때만 해도 제가 겁이 많았거든요. 주변에 <기생수>를 좋아하는 친구는 많았지만, 작품 속 분위기가 왠지 무서웠어요.

아무래도 다크 판타지 장르라 강렬한 액션 신이 많죠.
맞아요. 그때는 그게 참 무서웠는데. 여하튼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나고 작품을 준비하면서 제대로 원작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혼자 무작정 만화 카페에 가서 6~7시간 동안 만화책을 읽었죠. 그러고 나서야 원작의 깊이감을 체감할 수 있었어요.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깊고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더라고요. 집에 가서도 며칠 동안 그 작품이 생각날 정도로 여운이 길게 남았어요.

그 여운은 결국 작품을 읽으면서 뭔가를 새롭게 깨달았거나 고민하게 되었다는 방증이겠죠.
그런 것 같아요. 인간과 자연 생물의 공존뿐 아니라 인간 사회 속 계층 간 대립을 관통하는 주제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더 대단하죠. 어떤 장면이나 인물에 억지로 메타포를 새기지 않고, 작품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왔을 때 문득 그런 주제 의식을 느끼게 하니까요.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 곧바로 이어진다는 부분에서 경외심마저 들었어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주위 공기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어요. 살아 숨 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숨을 갑자기 참다가 쉬게 되면 공기가 지나가는 길이 느껴질 정도로 그 소중함을 자각하게 되잖아요.

작품을 읽고 나서 실사화한다는 부담감이 크지는 않았나요?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보니 부담감이 없진 않았죠. 하지만 우리가 원작 <기생수>를 리메이크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기생수: 더 그레이>는 원작의 세계관만 가져와 ‘한국에서 기생수가 발현되었다면?’ 하는 가설로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원작 팬들이 이 작품에 대해 어떤 방향을 기대할지도 사실 알 수 없는 부분이에요. 원작과 비슷하길 바라는지, 아니면 아예 차별화된 작품을 기대하는지 가늠하기 어렵죠. 일단 재밌게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새롭게 구성했는지 발견하는 것도 원작 팬 입장에서는 충분히 흥미로운 부분이 될 것 같아요.

작품 촬영 환경은 어땠어요? 그간 체험해보지 못한 SF 장르인 만큼 느낌이 새로웠을 것 같은데.
사실 아직도 매 작품 촬영이 늘 새롭고 흥미로운 세상처럼 느껴져요. 단순히 새로운 배역의 옷을 입는게 아니라 그에 따라 배역의 화법과 작품 환경도 바뀌니까. 그중에서도 이번 작품은 유독 새로웠어요. 물론 이렇게 많은 CG를 구현한 작품도 처음이지만, 연상호 감독님과 첫 작품이라 더 신선했어요.

연상호 감독의 촬영 스타일은 본인과 잘 맞던가요?
그럼요. 촬영장 분위기도 좋았지만, (감독님의) 촬영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느낌을 가장 크게 받았어요. 선택과 집중을 보여주신다고 해야 할까. 배우가 신 안에서 보여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 배우의 강점은 무엇인지 무서운 속도로 읽는 느낌이에요. 보통 촬영 환경이 의미 없이 늘어지면 출연진의 텐션도 떨어진 채 끝마치곤 하는데, <기생수: 더 그레이> 촬영 현장은 오히려 힘을 받고 퇴근했던 기억이 많아요.

연상호 감독이 배우 전소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음, 전해 듣기로는 감독님이 예전부터 제가 출연한 독립 영화나 다른 작품을 본 뒤 저에 대해 궁금해하셨다고 하더군요. <기생수: 더 그레이>가 아니어도 함께 촬영해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사실 이 작품의 섭외 연락을 받았을 때 정말 놀랐거든요. 정확히 저의 어떤 부분을 보고 연락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체로 감사한 부분이죠.

그러고 보니 2014년 <사진>을 포함해 다양한 독립 영화와 단편영화에 얼굴을 비쳤죠. 그때의 활동이 배우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요?
맞아요. 그 무엇과도 빗댈 수 없는 시간이죠. 그때의 시간이 배우 인생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어요. 내 배역과 대사의 소중함도 그때 체감했고요. 대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군분투해 독립 영화를 만들던 기억이 나요. 새벽에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에 가서 촬영했던 그런 기억들.

독립 영화를 촬영하면서 가장 깊이 느낀 부분이 있다면요?
독립 영화는 사람과 시간, 예산이 모두 부족하니 (작품 촬영의) 호흡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너무 목마른 거예요. 내 배역이 조금 더 오래 살아 있으면 좋겠고.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사실이 너무 섭섭하고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상업 영화를 촬영했을 때 큰 행복감을 느낀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촬영 기간이 더 길잖아요. 독립 영화 촬영이 작품과 배역에 대한 소중함을 안겨준 것 같아 지금도 뜻 깊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 배역이 오래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니 자연스레 영화 <소울메이트> 속 죽음을 맞이한 ‘하은’이 생각나네요.
그것 말고도 작품 속에서 여러 번 죽었어요. 영화 <죄 많은 소녀>에서도 그렇고, 영화 <악질경찰>에서도 죽거든요. 아,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도요. 그러고 보면 <소울메이트> 속 ‘하은’은 그나마 오래 살아남은 배역이에요. 아무리 픽션이라도 내 배역이 이런 결말을 안 맞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남아 있지만.(웃음)

<소울메이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선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었죠. 그런 부분에서 tvN 드라마 <화양연화 –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이하 <화양연화>)과 <소울메이트> 촬영은 더 특별했을 것 같아요.
너무 좋았죠. 두 작품 모두 지나간 시대를 다루지만, 느낌은 달랐어요. 먼저 <소울메이트>는 제가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반가웠죠.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휴대폰 문자메시지라든가, 고등학생 시절의 교실처럼 아련해지는 것들. 그에 반해 <화양연화>는 처음 접해보는 것이 많은 만큼 신기하고 새로웠어요. 공중전화로 약속을 잡고, 삐삐를 보내고 하는 것들은 제가 체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작품을 더 하고 싶었어요. 지금의 기술 발전은 당연히 편하고 감사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시대만의 진득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소통 수단은 불편하지만, 더 간절하고 애틋하다고 해야 할까.

맞아요. 20세기가 품은 고유한 정서가 있죠.
근데 또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지금 같은 배달의 개념도 없었고, 간단한 요리를 하려 해도 마트에서 이것저것 장을 봐야 했으니까. 무엇을 하더라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그 번거로움과 답답함 속에는 타인에 대한 소중함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도 그런 시대적 질감을 좋아해서인지 궁금해요.
맞아요. 거기에 상대적으로 요즘 영화보다 막 나가는 느낌이 있어요.(웃음) 요즘 영화는 대중에게 설득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이야기의 구성이라든가, 인물에 대한 그런 묘사를요. 근데 옛날 영화는 ‘모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냥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 하고 외치는 느낌이에요. 순간적으로 박력이 느껴지죠. 최근에 본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초콜릿 고마워>라는 영화도 그런 지점을 갖고 있는 작품이에요. 이 작품을 꼭 한번 접해보고 싶었는데, 온라인에서는 볼 수 있는 곳이 없는거예요. DVD로만 시청할 수 있다고 하길래 중고 플레이어를 장만해서 봤어요.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단순한 이야기지만, 작품의 박력이 있다 보니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좋은 영화를 볼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나요?
주위 공기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어요. 살아 숨 쉰다는 느낌도 들고요. 왜, 숨을 갑자기 참다가 쉬게 되면 공기가 지나가는 길이 느껴질 정도로 그 소중함을 자각하게 되잖아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체감하게 해주는 장치 같은 거죠. 그래서 저는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가장 좋아해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현실로 돌아오는 그 시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잖아요. 그 간극이 주는 황홀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느낌이 드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확실한 것은 제 욕심에 공백이 없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저는 저라는 재료를 최대한 많은 작품에 써보고 싶거든요.
성공과 실패를 떠나 다양한 배역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이 빨라져요. 영화를 진정성 있게 몰입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배우가 되었다는 것이 운명처럼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웃음) 사실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갔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어요.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대단하고 존경스럽거든요. 물론 배우 일도 어렵긴 하지만요. 근데 내가 이것 말고 뭘 했을까, 뭘 좋아했을까 자문해보면 더 생각나는 게 없어요. 혹시라도 다른 게 생각난다면, 그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거예요.(웃음)

몇 년 전 인터뷰에서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또 너무 기쁘게 하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계속하는 것 같다”고 한 말 기억나요?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꼈는지 궁금했어요.
정답이 없어서 힘든 것 같아요. 연기가 만약 <수학의 정석>처럼 풀이법과 공식이 있는 과목이면 더 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그런 과목이라면 최대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연기는 그런 개념이 아닌 것 같아요.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연기가 만족스러운지, 보는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주는 연기인지도 고민하게 되죠. 누군가를 따라가지 않고 나만의 연기를 만들고 싶은데, 그런 부분에서 아직도 부족함을 체감하고 있어요.

준비해야 할 것도, 고민해야 할 것도 여전히 많아 보여요. 데뷔한 지 이제 7년 남짓인데, 원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어느 곳으로 나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 욕심에 공백이 없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저는 저라는 재료를 최대한 많은 작품에 써보고 싶거든요. 성공과 실패를 떠나 다양한 배역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편하고 익숙한 곳에서 멀어지더라도.

준비했던 질문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슬슬 촬영장으로 가볼까요?
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