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사내, 강산에
춤추는 사내

무엇을 노래하든 나만의 언어와 톤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거죠.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보다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어제 ‘생기 스튜디오’에서 공연이 있었죠? 네. 근데 오히려 제가 에너지를 받았어요. 밖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안은 열기가 가득했죠. 무대 앞 친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릴 정도였으니까. 나도 덩달아 텐션이 올라가 오랜만에 기분 좋았습니다. 뒤풀이를 진하게 했더니 오늘은 얼굴이 좀 부었네요.
SNS에서 20대쯤 돼 보이는 친구가 아버지와 함께 ‘모래내 극락’에서 공연을 즐기는 영상을 봤어요. 인상적이더군요. 그 장면 하나가 지금의 강산에를 다 설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를 보러 오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부모님이 내 음악을 들려준 영향이 크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공연장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요. 우리 회사 대표가 여성분인데, 저를 ‘형님’이라 불러요.(웃음) “형님, 요즘 세대랑 소통하면 좋지 않겠느냐”며 공연 제안을 많이 해요. 뭐, 저야 좋죠.
요즘은 어떤 레퍼토리로 무대를 꾸미나요? 어제는 블루스 기반의 밴드가 모인 콘셉트였어요. 내 음악적 배경을 보면 블루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어제는 ‘예럴랄라’, ‘우연히’ 같은 블루지한 곡만 뽑아서 공연했죠. 멜로디가 블루지할 뿐, 템포 있는 걸 좋아해서 리드미컬한 노래가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심심할 틈 없이 공연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 라이브 무대를 깊숙이 경험한 인물입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점이 있죠? 1992년에 데뷔했는데, 그때는 문화적으로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어요. 노는 문화 자체가 없어서 다들 경직돼 있었죠. 속된 말로 저도 ‘쫄아’ 있었고. 일본에 1년 넘게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유명한 뮤지션들이 앨범을 내면 일본에서 쇼케이스를 활발히 하던 시기였어요. 저는 그 문화의 수혜자였고요. 그 무대 위 뮤지션을 상상하며 가수가 됐는데,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한때는 내가 공연장에서 반말을 한다는 말이 돌았어요. 사실 분위기가 어색해서 그랬던 건데. “심사하러 오셨냐, 같이 놀자, 준비됐나?” 그렇게 던지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관객들이 “준비됐다!”라며 화답해주기도 했고요. 요즘 관객들은 알아서 잘 놉니다.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칼과 거침없이 샤우팅하던 모습이 그려지네요. 강산에가 생각하는 라이브의 매력은? 느낌이라는 건 수시로 변하잖아요. 생물이에요. 라이브는 살아 있는 것의 찰나를 표현하고 나누는 겁니다. 수천 번 부른 노래도 날마다 달라요. 오디오도 감각을 건드리지만, 라이브는 또 다른 세계죠.

2023년 데뷔 31주년 콘서트 ‘재회’를열 었습니다. 팬들뿐 아니라 과거 밴드세션과 재회하는 자리였죠. 다시 뭉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있었죠. 제주에 머물때는 고깃배 불빛만 보이는 먼 바다나 오름 밑에 매일 가요. ‘양보(Yield)’ 표지판이 있어 그곳을 ‘일드 클럽’이라 불러요. 제주 동네 친구들과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면서 막걸리도 한잔하는 곳이죠. 거기서 사유할 시간이 많았는데, 하루는 멤버들과의 관계를 수면 위로 딱 떠올려봤죠. 돌아보니 참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마음의 짐이던 감정을 싹 정리할 수 있었죠. 그러고 나서 제일 편한 동생 경천이에게 연락했어요. “모이자.”(웃음)
왜 관계가 틀어졌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삶은 결국 인간관계잖아요. 데뷔 초부터 함께한 친구들인데, 2015년 파리 공연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부러졌죠. 파리에서 세 번 공연했는데 다들 많이 힘들었고, 저도 우울증 비슷한 걸 겪었어요. 굴곡이 있었죠.
다시 합주하며 예전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나요? 체력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지만, 합주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오히려 옛날보다 좋았어요. 최근 강릉 3-4 클럽에서 공연했는데,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합주라는 것은 말이 합(合), 하나 되는 과정이잖아요. 노래에 빠져 항상 관객을 보면서 에너지를 주고받는데, 옆에서 ‘퉁’ 튀어나오는 베이스의 그루브가 좋아서 쓱 쳐다보니 그 친구가 ‘씩’ 웃더라고요. 그게 카타르시스거든.
‘…라구요’, ‘예럴랄라’, ‘넌할수있어’ 등 1집부터 쭉 명곡을 쏟아냈어요. 개인적으로는 4집 <연어> (1998)를 좋아합니다. 강산에의 색깔은 그대로지만, 더 자유로워지고 유연해진 분위기거든요. 감히 짐작 건대, 당시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제 인생에 큰 전환기가 세 번 있었는데, 그때가 세 번째였죠. 가수로 유명해졌지만, 행복하지 않았어요. 번뇌가 쌓이니 다 멈춰버렸죠. 그리고 미국 친구가 있는 LA로 떠났어요. 거기서 캘리포니아 사막을 여행하는데, 자연 속에 있어도 머리는 무거웠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바위에 앉아 석양을 가만히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삶이 대체 뭐지?’ 답은 간단했어요. 삶은 그냥 항상 여기 있었던거예요. 섬으로 비유하면, 이런 거죠. ‘아, 저 섬에 가고 싶다’해서 떠나요. 처음엔 좋죠. 하지만 익숙해지면 자기가 떠나온 그 섬이 또 그리워져요. 근데 사실 그곳이든 이곳이든 나는 항상 ‘여기’에 존재하거든요. 상황이 다를 뿐, 거기의 나와 여기의 나는 다르지 않아요. 결국 내가 꽉 붙들고 있던 관념과 생각이 나를 괴롭힌 거지, 그것들을 놓아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사실을 자각하니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전율이 생기더라고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절로 노래가 나왔어요. 참았던 숨을 ‘후~’ 하고 뱉어내는 느낌. 그렇게 한번 비워내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명징하게 보였어요.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그길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죠.

그 경험이 음악에 고스란히 투영된 셈이네요. 4집 이전에는 힘주어 노래했다면, 이후에는 자유로움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춤추는 나’는 해방감을 발산하는 것 같고요. 반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은 이전의 포크 록 감성이 살아 있습니다. 그것도 이유가 있어요.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는 동안 방송국 PD 17명이 나를 찾아왔어요. 한국에 IMF가 터져 국민을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라며, 시그널 음악을 부탁했죠. ‘넌 할 수 있어’가 히트해서 나를 찾은 것 같은데, 이미 앨범을 계약해서 거절했죠. 그런데 돌려보내고 나니 마음이 쓰여 멜로디만 있는 데모곡을 몇 개 보내주고 하나 고르라고 했어요. 하필 ‘제발 그것만은 고르지 마라’고 생각한 곡을 선택하더군요. 그게 바로 ‘연어’ 멜로디였어요. 메시지에 힘을 좀 실어달라는데, 그때 저는 이미 마음가짐이 바뀐 상태였거든요. 예전처럼 막 내지르는 노래는 그만하고 싶었죠. ‘그래, 이번 한 번만 샤우팅하자’ 생각하며 가사를 쓴 거예요.
가사는 다큐멘터리에서 영감받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가사를 고민하던 중 우연히 연어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고향으로 돌아와 산란하고 생을 마감하는 여정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고민하던 제 상황과 운명적으로 맞아떨어졌죠. 그때 책장을 살피는데 안도현 작가의 소설 <연어>가 눈에 들어왔고, 그 모든 순간이 절묘하게 맞물렸습니다. 기가 막히게 그런 순간이 찾아와요.
그러고 보면 절묘한 타이밍이 많았네요. 역시 때라는 게 있나 봐요. 그러니까 절묘할 수밖에 없어요.
운이라고 이야기 해도 될까요? 그래요, 운이 좋았어. 맞아요. 왜냐하면 내가 진짜 힘들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거든. 후배 가수 김 씨가 나를 두고 ‘럭비공’이라는 노래를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람이 다행히 어느 날 갑자기 둥지를 틀었죠. 항상 부유하며 살았어요. 이제야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죠. 미국을 여행할 때 경험인데, 그냥 바위인 줄 알았던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틈 사이사이에 작은 꽃들이 있는 거야. 모르고 지나가면 그냥 밟아요. 또 그 사막에 이상기후로 비가 한 번 내리면 바위틈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화석처럼 있다가 물을 만나서 딱 깨어나는 거예요. 내가 못 보고 있는 게 너무 많았던 거죠.(웃음)


앞서 세 번의 변곡점이 있다고 했는데, 나머지 두 번은 언제였나요? 첫 번째는 1982년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을 때예요. 미국 드라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을 보면서 대학 생활에 대한 낭만이 있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그때 다짐한 것이‘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테스트하지 않은 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그걸 나중에 ‘깨어나’라는 노래로 만들었고요. “보인다고 다 보는 게 아니고 들린다고 다 듣는 게 아니다. 익숙해진 촌스러운 잠에서 깨어나고 싶다”.
두 번째는요? 1987년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때예요. 아내의 초대로 일본에 갔는데, 흑백 세상에 있다가 갑자기 총천연색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었어요. 외모는 비슷한데 문화가 너무 달라 정신을 못 차렸죠. 그걸 경험하니 기성세대에게 반발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삐딱하게 건들거리며 다녔어요. 지금은 눈이 처졌지만, 그때는 눈꼬리를 올리고 레이저를 쏘고 다녔어요. 그러니 대기실에서도 내게 말 거는 연예인이 없었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거예요. ‘로큰롤은 이런 거야!’라고 외치면서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던 때였어요. 내가 되게 건방졌어요.(웃음)
그 모든 시간을 음악에 차곡차곡 쌓아온 것 같습니다. ‘깨어나’, ‘삐딱하게’ 등 그 시기 음악에 다 묻어나거든요. 강산에의 색깔은 분명하지만 하찌와 달파란 등 여러 프로듀서와 새로운 시도도 꾸준히 했어요. 내가 엉덩이가 워낙 무거워서 그리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누가 술 먹으러 오라면 잘 가지만.(웃음) 나는 흐르다가 만나는 사람과 인연이 닿으면 뭘 해보지, 능동적으로 노크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마음은 열려 있으니 인연이 닿으면 자연스럽게 섞이긴 하죠. 하찌는 1987년에 처음 만났는데, 그가 꽹과리의 그루브에 반해 이광수 명인에게 사물놀이를 배운답시고 한국에 머물렀어요. 3·4집을 함께 만들며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나 열정을 보고 느낀 게 많았거든요. 덕분에 사고 폭도 훨씬 넓고 풍부해졌죠. 헤어지고 나니 참 훌륭한 음악적 선생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명태’, ‘이구아나’ 등 뻔하지 않은 소재로 음악을 만드는 것도 강산에만 할 수 있는 영역 아닐까요. 그 재료들은 어떻게 찾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일상에서 모읍니다. 여기저기서 갑자기 번뜩일 때, 하다못해 단어 하나를 보더라도 ‘어!’ 하면서 무언가와 연결되면 메모를 해둬요. 이게 다예요. 제한을 두면 딱 그것밖에 안 보여요. 경계 없이 열어두면 모두 재료가 됩니다.
과거 한 영상 인터뷰에서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 가사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를 정성 들여 읊조리며 큰 위로를 받았다고, 그게 예술이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요. 노랫말, 음절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젊은 시절에 많이 들었죠. 인간으로 살면서 느끼는 감각이 다양한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
강산에 님의 가사도 그래요. 24년 전에 발매한 ‘지금’을 지금도 들어요. 사랑 노래라기보다는 위로 삼아 곱씹으며 듣거든요. 그거 우리 와이프가 쓴 가사예요. 내가 LA로 떠나면서 잠시 떨어져 있었어요. ‘지금까지 나를 케어해줘서 너무 고마운데, 앞으로는 니를 케어해라.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러고 떠났거든.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아내의 일기장에서 찾은 글이에요. 가끔 가사가 마를 때 ‘뭐 좀 없나?’ 하고 쓱 봐요.(웃음) ‘넌 할 수 있어’도 우리 와이프가 쓴 거고. 번역하고 에디팅을 했지만, 어쨌든 소스는 우리 와이프 거예요.
사랑 노래가 맞았네요. 난 이런 거 못 써요. 내 스타일이 아니지. 사랑 표현을 잘 못 하더라고.
그럼 <KISS> 앨범은어떻게만들게됐나요? 첫 키스의 달콤한 기억은 있으니, 그것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쓴 거죠. ‘Time to Dance’도 와이프가 쓴 거고. 3집 녹음할 때부터 사고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록이니, 블루스니. 내가 왜 지금 장르에 연연해. 그냥 음악 하는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데뷔 초에는 ‘이 정도는 질러야 록이지’. 이러면서 높은 소리를 내는 데만 욕심을 냈거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절로 노래가 나왔어요. 참았던 숨을 ‘후~’ 하고 뱉어내는 느낌. 그렇게 한번 비워내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명징하게 보였어요.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그길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죠.
아까 촬영할 때 벽에 기대 ‘그 앞에 세워주세요’를 불러 주셨잖아요. 음원으로 듣던 것과 또 다른 목소리였는데, 듣기 편하고 좋았어요. 사실 아직도 내 목소리를 찾고 있어요. 요즘 포구에 나가 하는 게 그거예요. 느지막이 일어나 아점 가볍게 먹고, 커피와 간식거리 챙겨 와이프와 조용한 포구로 가는 게 일상이에요. 거기서 음악 틀어놓고 낚시하는 사람 구경도 하고, 바다와 하늘 보면서 멍하게 한참 동안 있습니다. 그러다 차 안에서 실컷 노래 부르고 돌아와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불러보면서 내게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톤을 찾고 있습니다.
포구에서는 보통 어떤 음악을 들으세요? 주로 옛날 노래를 많이 들어요. 샘 쿡, 알 그린, 오티스 레딩… 대부분 흑인 음악이죠. 가끔 요즘 유행하는 음악도 찾아 듣고요.
요즘 유행하는 곡이라면? 테디 스윔스의 음악도 듣고 그래요.
리메이크 앨범 <하루아침>은 강산에의 음악적 뿌리를 엿볼 수 있는 앨범이 아닐까 싶은데요. 한대수, 김창완 선배들의 곡을 실었는데 편곡이 되게 신선했어요 ‘물 좀 주소’,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제비꽃’… 다 나에게 울림을 준 노래예요. A면과 B면의 프로듀서가 다른데 한쪽은 기존에 작업하던 하찌에게, 다른 한쪽은 달파란에게 맡겼어요. 당시 유럽에 테크노 열풍이 불었는데, 저는 트렌드에 밝은 편이 아니라 달파란과 함께 다른 맛을 내본 거죠.
가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가사만 읽을 때 이게 노래가 될까 싶은데, 막상 들으면 참 세련됐거든요. ‘와그라노’처럼 사투리를 멋스럽게 녹여내는 감각도 놀랍고요. 노랫말에 딱 붙는 멜로디가 절로 떠오르는지, 아니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와그라노’는 어느 날 까마귀가 꺅꺅 울길래 “니 와그라노”라고 입으로 뱉으면서 말소리가 참 이쁘다는 생각이 들어 노래로 지었어요. 곡을 다 만들어놓고 가사를 입히기도 하고, 반대로 스토리를 먼저 쓰고 곡을 붙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멜로디는 멜로디대로, 가사는 가사대로 따로 써둡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은 메모하고요. 그걸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조금씩 확장하고, 만들어둔 멜로디와 맞는 지점이 있으면 붙여보기도 해요. 다음 앨범 제목은 2~3년 전에 정해놨어요. 그게 EP든, 정규 앨범이든 그 제목으로 낼 거예요. 잊지 않으려고 내 노트 앞면에 써놨습니다. 올해는 발매하지 않을까 싶네요.
제목을 짓고 그 주제에 맞는 소재를 채집하나요? 제목과 상관없어도 돼요. 그거 끼워 맞추느라 자신을 고문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창작의 재미는 받아들 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도를 설명하듯 얘기하면 재미없어요.
혁오를 비롯해 젊은 뮤지션들과 협업도 꾸준히 하고 계세요. 여러 감정이 교차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나는 뭘 몰라요. 음악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죠. 음악을 공부해본 적이 없거든. 경험만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걸 잘 아는 친구들을 통해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가끔 어린 아이들의 표현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잖아요. 뭘 알아서 그렇게 할까요? 저도 그런 거예요. 물론 코드나 화성학 같은 지식도 필요하죠. 하지만 그 지식 자체가 음악이 될 수는 없거든요. 운 좋게도 내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악으로 받아들여주니 내가 음악인처럼 살고 있는 겁니다.
지난 ‘재회’ 콘서트 뒤풀이 자리에서 “저는 더 발전할 겁니다”라는 말을 했어요. 지금 강산에는 어떤 마음가짐인지 궁금합니다. 창작은 계속 하고 싶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목소리 톤은 변하겠지만 그래도 나만의 톤을 찾고 싶고, 몸이 허락하는 한 무대에 오래오래 서고 싶어요. 딱 그 두 가지입니다. 나는 목표를 정해놓고 깃발을 꽂는 그런 야망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을 때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나도 그런 음악을 하고 싶어요. 무엇을 노래하든 나만의 언어와 톤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거죠.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보다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