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증류소의 귀환
잠들어 있던 증류소가 다시 깨어나고 있다.

사진 출처 디아지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금융 위기 여파로 문을 닫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령 증류소(ghost distillery). 건물은 폐허가 되었거나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캐스크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숨 쉬며 누군가의 손에서 위스키로 빚어지고 있다.
위스키 애호가라면 최근 ‘유령 증류소’라는 수식어를 단 제품이 부쩍 늘어난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지난 3월, 디아지오는 전 세계 200병 출시한 조니워커 52년에 캄부스, 칼스브리지, 글레누리 로얄, 글렌로시, 글렌 알빈 등 한때 디아지오가 소유했던 유령 증류소의 고숙성 원액을 블렌딩해 브랜드 역사상 가장 희귀한 위스키를 탄생시켰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WG&S)는 지난 1월 론칭한 와일드무어에 유령 증류소의 원액을 블렌딩한 점을 강조하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WG&S 가문이 60년간 개인 소장용으로 수집한 몰트와 그레인 위스키 원액 중 엄선한 ‘에이션트 리저브(Ancient Reserve)’를 블렌딩해 한정 수량 생산한 제품이다. 이처럼 유령 증류소의 가치를 견인하는 건 바로 ‘희소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물음표가 생긴다. 2024년 들어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는 위스키 시장에서 과연 희소성이 유효할까? 맥캘란 1926이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단일 병 경매 최고가(약 35억4000만 원)를 경신했고, 한정판 및 고연산 위스키의 출시는 점점 활발해지는 추세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에 대해 미국증류주협회(DISCUS) 공공 정책 및 전략 책임자인 크리스틴 로카시오는 “증류주 산업의 전체 매출 중 60% 이상이 하이엔드 및 슈퍼 프리미엄 제품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라며 “많은 소비자가 소비를 줄이고 있지만 여전히 특별한 한 병을 원하며, ‘더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럭셔리하게 즐기는 것’을 선택하고 있죠”라고 덧붙였다. 즉 초고액 자산가에게 희귀 위스키는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 자산이며, 위스키 브랜드 역시 이에 맞춰 위스키를 수집품으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령 증류소가 위스키 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것이다. 더 이상 증류가 불가해 먼 미래에는 구할 수도 없는 위스키 말이다. 최근 2차 시장 또는 경매에서 거래되는 가격을 보면 납득이 갈 테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인 리틀밀의 250주년 기념 에디션 ‘리틀밀 45년’은 지난해 12월 RM 소더비를 통해 약 635만 원에 판매되었다. 한편, WG&S는 1976년 폐쇄된 레이디번 증류소의 고숙성 위스키를 매년 한정판 컬렉션으로 선보이고 있다. 지난 1월에는 50년 숙성 위스키에 하종현 화백의 작품을 라벨로 입혀 한정판으로 출시했는데, 가격이 약 3억 원을 호가한다. 이는 스코틀랜드 증류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 가루이자와 증류소의 52년 숙성 위스키는 지난해 11월 RM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가 3억7900만 원을 훨씬 웃도는 약 5억6000만 원에 낙찰되며 희귀 위스키 시장 침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유산을 복원하다
유령 증류소의 부흥을 단순히 마케팅이나 투자 관점에서만 볼 일은 아니다. 스카치위스키의 유산을 복원하고 계승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디아지오와 이안 맥클라우드 디스틸러스는 수년에 걸쳐 폐쇄된 증류소의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특히 디아지오는 약 600억 원을 투자해 최첨단 시설을 구축하는 한편, 과거 직원들의 증언과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전통적 증류 방식과 풍미를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브로라는 2021년 5월, 포트 엘런은 2024년 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유령 증류소가 다시 가동될 수 있었던 데는 독립 병입자의 역할도 컸다.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까지 독립 병입업자들이 위스키 애호가를 위해 로즈뱅크 증류소의 원액을 병입해 공급해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로즈뱅크가 훌륭한 싱글 몰트로 명성을 쌓게 된 배경이죠.” 2017년 로즈뱅크 증류소를 인수한 이안 맥클라우드의 브랜드 개발 디렉터 고든 던다스가 전한 말이다. 실제로 독립 병입자들은 포트 엘런과 브로라, 로즈뱅크가 공식 재가동되기 전부터 잠들어 있던 캐스크를 발굴하고 병입하며 그 희소성을 강조해왔다. 동시에 고품질로 신뢰를 쌓으며 증류소의 명성과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고든 앤 맥페일, 시그너토리 빈티지, 카덴헤드, 던컨 테일러, SMWS, 이들의 호기심과 열정으로 빚어온 역작이 있었기에 묻힐 뻔한 이름이 오늘날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