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신한 채수빈
<하이재킹> 속 이옥순처럼 강인하고, <나는 SOLO> 옥순처럼 매혹적인 그를 만나다.
낯을 가리는 것으로 아는데, 오늘 화보 촬영은 괜찮았나요?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콘셉추얼한 화보 촬영을 했거든요. 영화나 드라마를 찍을 때는 주로 수수한 메이크업을 하니까. 곧 개봉하는 영화 <하이재킹>을 촬영할 때는 오히려 때 묻은 것처럼 연출을 많이 해서 메이크업 전, 세면 직후가 멀쩡해 보일 정도였어요.(웃음)
여름이 성큼 다가왔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지난해 12월부터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영화를 재밌게 찍고 있어요. 드라마 촬영도 앞두고 있어 캐릭터와 관련한 수어 연습을 시작했죠. 3주 정도 됐어요. 손에 익히려고 계속 연습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써보지 않은 언어이기도 하고, 나라별로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표정도 중요해요. 예를 들어 (주먹을 쥐어 코에 갖다 대며) 이렇게 하면 ‘그냥 좋다’는 뜻인데, (활짝 웃는 표정으로 주먹을 코에 가져가 흔들며) 이렇게 하면 ‘너무 좋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얼굴 근육을 많이 쓰는 농인분들이 대부분 동안이래요. 수어 쓰는 배역을 맡은 작품 이름은 뭔가요?
<지금 거신 전화는>이라는 드라마예요. 농인은 아니고 어떤 사건을 겪은 뒤 심리적 충격으로 함구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인물을 맡았어요. 평소 말할 때 손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데, 모든 소통을 손으로 해야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극 중 상대역 이름이 ‘백사언’이에요. 그럼 그의 이름을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 손으로 다 표현해야 하는 거죠.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지만, 재밌는 도전이 될 것 같아요.
촬영 없는 날엔 뭘 하며 지내요?
촬영 준비하느라 수어 연습하고.(웃음)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조카가 태어난 지 100일이 돼서 종종 보러 가요. 자주는 못 가고 촬영이 없는 낮 시간에 타이밍이 맞으면 보러가죠.
거의 매일 일기도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매일 쓰지는 않아요. 제가 MBTI 유형 중 마지막이 P인 데다 비율도 100%가 나왔거든요. 계획적인 걸 못 견뎌요. 일기도 매일 쓰면 숙제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울적하거나 기분이 좋거나, 특별히 무슨 일이 있을 때 그 감정을 기억하려고 써요. 배역을 맡을 때도 간혹 쓰죠. 캐릭터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 조금 더 알고 싶을 때 쓰는 것 같아요.
일기 쓰는 행위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나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는 것과 글로 써 내려갈 때 정리되는 게 확실히 달라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끼적이는 거지만 그건 한 인물을 분석할 때도, 살면서 혼란스러울 때도 정리가 되죠.
좋은 습관이네요. <하이재킹>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스크린에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아 반가운데,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1970년대 일어난 비행기 납북 미수 사건이 배경이에요. ‘이옥순’이라는 승무원 역할을 맡았고요. 찍을 땐 생각지 못했는데 옥순이가 <나는 SOLO> 때문에 조금 고정적인 이미지가 생겼더라고요.(웃음) 야무진 역할이에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승무원 채용 조건이 엄청 까다로웠다고 해요. 처음 겪는 사고에 혼란스러운데도 기장, 부기장과 함께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협력하는 스토리예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다 보니 개인적으로도 감정이 더 와닿았어요.
SBS 드라마 <여우각시별>에서도 공항에서 일했는데,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항공 쪽이네요.
느낌이 좀 달랐어요. <여우각시별>의 ‘한여름’은 공항에서 일하지만 사무직으로 공항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죠. 이옥순은 승무원이다 보니 촬영에 들어가기전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친구에게도 물어보고, 지인 중 실제로 1970~1980년대 승무원으로 일한 분이 있어서 식사하면서 자문을 많이 구했어요.
재난 영화도 처음이죠. 연기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비행기라는 공간이 한정적이잖아요. 기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옷도 그대로고, 현장 자체가 좁았어요. 쉴 수 있는 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대부분 장면에 걸리는 거예요. 영화를 찍을 때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도 같이 준비할 때라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연극은 대사량이 많은 편이라 대기실에 들어가면 연극 대본을 읽곤 했죠.
두 작품을 병행한 건데, 쉽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꼭 이렇게 되더라고요. 쉴 때는 푹 쉬다가도 한 번에 몰아 하게 되기도 하고. 그래도 하고 나서는 ‘해냈다’는 마음에 뿌듯했어요.
촬영장에서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성동일, 하정우, 여진구 등 선배 배우들과 함께 거의 매일 회식을 했어요. 덕분에 현장 분위기도 즐거웠죠. 세트가 대전에 있었는데, 현장에 밥차가 와서 식당처럼 세팅해주거든요. 밥 먹는 공간에 노래방 기계랑 조명도 있어 그날그날 촬영을 마치면 파티처럼 뒤풀이를 했어요.
현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면 호흡을 맞추기도 좋으니까요.
그렇죠. 선배님들이 먼저 친근하게 대해 주시니까 서로 의지하면서 돈독하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영화, 드라마, 연극까지 모든 무대에서 종횡무진하는 걸 보면 연기에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각 매체가 본인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지.
연극은 관객이 앞에서 같이 호흡해주는 부분이 크고요. 한두 달 전에 만나 대본 리딩을 일주일 정도 하고, 함께 동선을 맞춰가요. 보통은 더블, 트리플로 역할 캐스팅을 하니까 같은 대본이더라도 누구와 연기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다르거든요. 그런 걸 보는 재미도 있고, 다른 배우가 저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이 장면을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배울 때도 있어요. 보이지 않던 부분을 보면서 꽤 공부가 되죠. 영화나 드라마는 연극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섬세한 부분을 구현해요. 한 장면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테이크를 찍기도 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등 각 매체의 묘미가 달라요.
연극이나 뮤지컬을 해본 배우들은 하나같이 ‘관객과의 호흡’을 언급하더군요.
정말 달라요. 영화나 드라마를 찍을 때는 각자 위치에서 집중하잖아요. 조명은 어떻게 쏘고 있고, 카메라는 포커스가 나가진 않는지 신경 쓰는 등 각자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죠. 하지만 무대에 서면 관객들은 온전히 우리를 관람하러 온 거니까 내가 슬프면 같이 울고, 재밌는 장면에선 웃기도 하고. 그 에너지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나요. 그리고 날마다 달라요. 같은 연극이지만 어떤 관객이 오느냐에따라 다르고, 그들에 따라 배우들의 느낌도 달라지고, 그날그날 배우 캐스팅도 바뀌니까. 같은 느낌의 연극이 한 번도 없었어요.
매력 있는 매체일 수밖에 없네요. 본인에 대해 함께 호흡한 선후배 배우들의 호평이 자자해요. 스스로 “인복이 많다”고 표현했지만, 좋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오는 법이잖아요. 평소 인간관계나 현장에서 가장 중시하는 게 있다면.
예전에는 ‘착한 아이 증후군’처럼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어요. 낯을 가리지만 그런 티를 안 내려고 일기장에도 ‘나는 왜 낯을 가려서 매번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라고 썼죠. 그런데 깨달았어요. 나만 어색한 게 아니더라고요. 다들 애쓰는 거였죠.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낯을 가려도 괜찮지 뭐’ 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겠지만, 지나치게 내가 아닌 사람이 되면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무대에 서면 관객들은 온전히 우리를
관람하러 온 거니까 내가 슬프면 같이 울고,
재밌는 장면에선 웃기도 하고. 그 에너지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나요.
건강한 변화네요.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하죠. 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 연기할 때도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얻나요?
알랭 드 보통의 스토리라인에 특별할 건 없어요. 판타지 같은 흥미로운 소재도 아니고요. 그는 살아가면서 겪을 법한 권태로움 같은 감정을 깊이 있게 써 내려가요. 표면적으로 글을 읽을 때, 내가 이 사람이라고 가정해서 볼 때, 내가 직접 겪었을 때 모두 다르잖아요. 결혼을 해본 것도, 불륜을 겪은 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이 심리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감정이 깊게 들어가 있으니까 ‘아 이럴 땐 이런 감정이겠구나’ 하면서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그의 책을 보면 감정에 대한 전공 서적 같은 느낌이 들죠.(웃음) 또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소설가는 아니지만, 이석원 작가요. 정말 솔직해서 좋아해요. 지금 읽고 있는 건 류시화 작가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예요. 반 정도 읽었는데 첫 구절이 그거예요. 그가 제주도에 갔을 때 한 행인이 “시인 아니세요?”라는 물음으로 대화를 시작해 안녕하시냐고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분이 작가에게 “제가 생각한 이미지랑 다르게 따뜻한 느낌이다”라고 말하니, 작가가 “제가 좀 이지적이게 따뜻한 사람이죠”라고 말하면서 시작되는 산문이에요. 무겁지 않은, 사람 사는 얘기죠.
자주 가는 서점도 있어요?
집 근처에 자주 가던 독립 서점이 있었는데, 문을 닫았어요. 요즘은 책을 온라인으로 사요. 먼저 표지를 보고, 책 소개를 살짝 보고, 구절을 보면서 잘 읽히고 끌리는 걸 사죠.
반려묘 하쿠와 반려견 마타를 키우는 애묘, 애견인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들에게 가장 위로받을 때는 언제인가요?
잘 때요.(웃음) 마타는 무조건 제 발밑에서 자요. 하쿠는 저랑 엄마・아빠한테 왔다 갔다 하고요. 그렇게 자는 게 익숙하니까 찰까 봐 발로 더듬더듬 해봐요. 둔탁하고 밀리지 않으면 마타고,가볍고 부드러우면 하쿠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이름은 ‘하쿠나 마타타’에서 따온 거죠?
맞아요. 하쿠가 먼저 왔어요. 제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좋아해요. 거기서 ‘하쿠’가 너무 멋있잖아요. 그래서 하쿠로 이름 지었는데, 마타가 왔죠. 마타를 처음에는 <역적>에서 제가 맡은 ‘가령’으로 지을까 했어요. 할머니댁으로 갈 뻔한 아이였거든요. 예방접종만 하고 보낼 수도 있었지만, 제가 떼써서 데려왔어요. 고양이는 영역 동물인데도 하쿠랑 마타가 서로 룸메이트처럼 존중하면서 잘 지 내줘서 감사하죠.
나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상으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거니까요.
제 연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여전히 재미있어요.
연기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어요. 배우 활동을 한 지 어느덧 12년 차예요. 직장으로 비유하면 과장 또는 차장급 배우인데, 10년 이상 활동한 배우로서 느끼는 ‘연기’는 어떤가요?
‘타인의 삶을 잠시 빌리거나 들여다보는 일’ 아닐까요. 이번에도 이옥순이라는 역을 맡지 않았다면 비행기 납북 미수 사건에 대해 그렇게 깊이 알지 못했을 거예요.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나 책임감 같은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했겠죠. 그 인물이 되어 당시 이야기를 대중에게 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연기는 어려워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같은 연기를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잘한다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어떤 영화도 누군가는 재밌게 봤는데 누군가는 별로라고 할 수도 있고. 정답이 없어서 어려운 것 같아요.
그게 또 묘미 아닌가요.
그렇죠. 다만 ‘잘하고 있는건가’ 하는 고민을 자주 하게 돼요.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겨야 하는데. 그럴 때는 주변을 믿으려고 하죠. 감독님이나 작가님, 함께하는 동료 배우를 믿으면서 해내는 거예요.
본인이 생각하는 배우란?
예전에는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재밌어 보여 배우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요. 팬들이 생기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어요. 그런데 팬들에게 힘든 시기에 제가 맡은 인물 덕분에 큰 힘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더 책임감이 생겼죠.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구나’ 하고. 나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상으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거니까요. 제 연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여전히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