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나아가는 최성은의 오늘
LIFE OF SCRIPT

아까 주차장에서 마주쳤는데, 못 알아봤어요. ‘오, 제인 버킨 닮은 사람이네’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어색해서 일부러 인사를 안 하는 줄 알았어요. 처음 보는데다 사람도 많으니까. 그래도 제인 버킨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데요? 머리가 짧아서 그런 것 같아요.
잘 어울려요. 올해 초에 잘랐어요. 살면서 이렇게 짧은 길이는 처음이거든요. 매일 보는 얼굴인데, 다른 사람 같아서 재밌어요. 편하기도 하고요. 한 달 전부터 넷플릭스 시리즈 <할매>를 찍고 있는데, 이번 역에서 짧은 헤어가 어울려서 유지하고 있어요.
틈틈이 단편영화에도 출연하고, 얼마 전엔 ‘대단한 단편영화제’라는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데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해요. 지금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은 걸 배우는 시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험이 연기의 자양분이 되겠죠. 배우는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삶을 연기하고, 처음 접하는 상황이기도 하잖아요. 어떤 식으로 배역과 가까워져요? 특별한 요령은 없어요. 대본을 계속 읽으면서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고민하다 보면 조금씩 어떤 통로가 보이기 시작해요. 대본에 적힌 문장 사이에 감춰진 감정 같은 걸 조금이라도 읽어내려 애쓰죠.
나와 닮은 접점을 발견하는 건가요? 맞아요. 분명 있긴 한데, 찾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온갖 걸 다 해보는 것 같아요. 오랜 기억을 헤집으면서 책도 읽고, 무작정 나가서 걷기도 하고, 같은 노래를 반복적으로 듣기도 하고요.
유독 마음을 읽기 힘들었던 인물이 있다면요? 작품을 할 때마다 이번이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11월 20일에 공개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푸른길>은요? 원작 만화에 없는 인물을 맡았잖아요. 윤수경이라는 정부 요원이에요. 윤수경은 작품 안에서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해요.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작품의 주인공인 김석과 이노세 두 형사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슬쩍 나타나서 단서를 제공하거나 앞으로 펼쳐질 사건을 예고하는 거죠.
시나리오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어요? 일단 재미있었고, 솔직히 두 주연배우가 부러웠어요. 한국 형사와 일본 형사 둘 다 너무 매력적인데, 연인처럼 싸우다 노부부 같기도 한 케미를 보면서 ‘나도 저런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연기를 잘하는 배우보다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게 맞는 연기는 무엇일지,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 부분을 감독님이 알아봐주셨어요. 이번 작품은 감독님을 믿고 연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출연을 결심했어요.
두 형사와 동일한 사건을 좇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을 것 같아요. 맞아요. 입장이 달랐어요. 윤수경이 두 형사보다 이 사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오는 부분이 아니더라도 모든
장면을 숙지하려 했죠.
윤수경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요? 한준희 감독님은 무모하지만 항상 자신감이 가득한, MZ세대에 가까운 인물로 접근하더라고요. 이번 작품에서 일본어로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일본
어 선생님이 연기도 하는 분이라 윤수경이라는 역할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평소 드러내지 않던 모습을 꺼내다 보면, 내 얼굴이지만 낯선 표정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정답 같은 연기를 좇았다랄까요. 사실 정답이라는 건 없는데 스스로를 가두는 거죠. 삐끗해서 엇나가더라도 낯선 길을 가보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어요. 그 부분을 감독님이 알아봐 주셨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은 감독님을 무조건 믿고 연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어떤 지점인데요? 연기를 잘하는 배우보다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게 맞는 연기는 무엇일지 고민했고, 제 연기가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는지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더라고요. 그 부분을 감독님이 알아봐주셨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은 감독님을 무조건 믿고 연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슬리브리스와 삭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대본을 계속 읽으면서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고민하다 보면 조금씩 어떤 통로가 보이기 시작해요. 대본에 적힌 문장 사이에 감춰진 감정 같은 걸 조금이라도 읽어내려 애쓰죠.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건데, 목소리와 발음이 좋아요. 너무 또박또박하거나 빠르지 않아서 계속 이야기를 듣고 싶달까. 중학생 때 연기 학원에 다녔는데, 선생님이 군인처럼 말하는 연습을 시켰어요. 그 영향이 지금
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조승우 배우를 좋아해서 계원예고에 진학했잖아요. 그 이유가 조승우 배우의 탄탄한 발성이나 정확한 발음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아요. 공연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영상으로만 봤는데.(웃음)
무대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카메라 앞과는 또 다른 영역이잖아요. 연극은 진짜 해보고 싶지만, 뮤지컬은 노래도 잘해야 하니까 아직 용기가 나지 않네요.(웃음)
2022년에는 <시온>이라는 단편영화의 연출을 맡았어요. 역할을 떠나 영화 자체에 열정이 많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번은 해보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이 들던 시기가 있었죠. 그래서 ‘지금 해보자’ 하고 시작하게 됐어요.
어떤 이야기예요? 영화를 만들면 꼭 시작하는 장면으로 쓰고 싶은 그림이 있었어요. 근데 장면만 있을 뿐 이야기는 없었죠. 이야기를 쓰고 팀을 꾸리는 데 3, 4개월쯤 걸린 것 같아요. 종교적으로 보수적이면서 강압적인 집안에서 자라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이에요. 가정 폭력이 있고, 이 아이가 영화 내내 누군가에게 쫓겨요. 그러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면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요즘은 어떤 감정의 작품이 좋아요? 감정이 며칠 간격으로 달라지거든요. 어떤 날은 연기가 굉장히 잘 그려질 때가 있고, 또 다른 날은 모든 게 다 틀린 것만 같고요. <할매>에서 맡은 신지현이라는 인물은 마음 가는 지점이 많은 인물이라 그런지 편하면서도 기분이 차분해져요.

그래도 중심을 잡아야 하잖아요. 촬영장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날엔 어떻게 해요? 얼마 전 밤에 <할매>를 같이 찍고 있는 정은 선배님한테 갑자기 문자가 왔어요. 때마침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 같고 모든 게 걱정이었는데, ‘재미있게 하는 놈 못 당한다’라는 선배의 문자를 보는 순간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푸른길>에 같이 출연한 신록 선배가 직접 쓰신 <절룩거리며 찾아나선 정화의 순간들>이라는 에세이를 선물로 주셨는데, 촬영장 가는 길에 약 꺼내 먹듯 챙겨 읽었어요. 위로가 되더라고요. 결국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곧 공개될 작품 이름이 ‘푸른길’이니까 유치한 질문 하나만 할게요. 최근 걸은 길 중 인상 깊은 길이 있어요? 인적이 드문 길을 좋아해서 홍제천에 자주 가요. 북적이지 않거든요. 사주에 물이 부족하다고 해서 더 끌리는지도 몰라요. 놀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산책 나온 동네 주민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좋고요.
셔츠와 팬츠 모두 Sacai, 글로브 Max Mara.
작품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공허가 크다는 인터뷰가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배우라면 피할 수 없는 감정이겠지만, 지금의 최성은은 어때요?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집착은 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엔 ‘나는 왜 취미가 없지’ 하며 스트레스 받았는데, 이제는 없을 수도 있지 해요. 저는 아침에 신문 보면서 밥 먹는 시간을 되게 소중히 여겨요.
매일 아침 뭘 먹어요? 달걀이랑 요거트, 사과, 바나나를 먹어요. 매일 똑같은 아침을 먹는데, 거기서 오는 행복이 있어요. 해가 떠 있을 때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아 아침 일찍 일어나거든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잖아요. 그게 묘미이기도 하고요. 배우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 최성은의 인생은 지금까지 어떤가요? 진짜 흘러가는대로 온 것 같아요.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30대가 되면 이런 모습이겠지 하고 그려본 게 분명 있을 텐데, 그건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정신 차려보니 서른한 살이네요.(웃음)

스물의 최성은은 서른이라는 미래를 어떻게 그렸을까요? 지금보다 심지도 곧고, 일도 더 많이 하고, 자신감 있고,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일 줄 알았어요. 근데 웬걸,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이 먹는 게 좋은 점도 있어요. 경험이 쌓인 만큼 쉽게 흔들리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거든요. 과거와 비교하면 훨씬 단단해졌어요.
연기자로서 꿈꾸는 모습이 있다면요?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그 편안함이라는 게 연기를 무던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인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여전히 ‘이게 아닌가, 저건가’ 하면서 혼자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일 때가 잦거든요. 선배들은 현장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주고받아요. 그에 반해 저는 세상 짐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끙끙 힘주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고요.(웃음)
요즘 고민은 뭐예요? 가볍게요. 차를 사고 싶어요. 면허는 있는데, 차가없거든요. 무슨 차를 사면 좋을까요? 차가 있으면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훨씬 넓어지잖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그 편안함이라는 게 연기를 무던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인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여전히 ‘이게 아닌가, 저건가’ 하면서 혼자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일 때가 잦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