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인물이 선택한 차와 동행자, 그리고 함께 떠나고 싶은 길
THE ROAD BETWEEN US

사막 끝의 불빛 _ 프레인 글로벌 여준영 대표
30대 초반, 처음 구입한 차가 현대 에쿠스였다. 첫 차가 에쿠스인 사람도 드문데, 색상은 베이지색 투톤이었다. 이후 쉐보레 스타크래프트 밴, 이른바 ‘연예인 차’를 탔다. 우연히 한 배우를 후원하게 되면서 차를 그 친구에게 내어줬다. 그는 얼마 전 포르쉐 앰배서더가 됐다. 바로 김무열이다. 그렇게 몇 대의 차를 지나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차 중 하나가 BMW328i컨버터블이다. 15년 넘게 주차장에 머물러 있는 이 차는 구입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드톱과 4인승을 갖춘 컨버터블이었다. 직원들과 함께 지붕을 열고 달리는 것이 로망이었지만 지붕을 열고 달려본 것도, 속도를 마음껏 내본 적도 별로 없다. 그렇게 328i컨버터블은 로망을 품고 샀지만, 로망대로 살지 못한 현실의 메타포 신세가 되었다. 묵직한 핸들과 끝내주는 코너링을 가진 이 차의 매력을 20대 시절 라스베이거스를 향한 사막 길에서 다시 느껴보고 싶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몰고 8시간 넘게 달리던 그때, 좌우로 똑같은 풍경만 이어지는 지루한 사막을 지나 밤이 찾아올 무렵 엄청난 빛이 나타났다. 낮보다 밝게 빛나는 라스베이거스였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바라본 도시의 불빛은 거대한 핀 조명처럼 보였고,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비행기나 기차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긴 시간을 달려야만 받을 수 있는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만약 라스베이거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면 그 빛을 볼 수 없었을 테고, 8시간의 운전은 그저 끔찍한 노동이었을 것이다. 장장 8시간이나 운전해야 한다면, 수다를 마음껏 나눌 상대가 필요하다. 마릴린 먼로가 떠오른다. 평소에도 그녀를 좋아해 이브 몽땅과 촬영하다 진짜로 사랑에 빠진 작품 <사랑을 합시다>, 미스터리 가득한 그녀의 죽음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마릴린 먼로 미스터리: 비공개 테이프> 등 여러 작품을 찾아보고, 피겨, 그림, 사진 등을 수집하는데 풀리지 않는 이야기가 많다. 직접 옆자리에 앉혀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누가 못되게 굴었는지,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열 내면서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그럼 나도 같이 열 내고 맞장구쳐주게. 그렇게 끝없는 사막을 달리다 보면 라스베이거스에 당도할 것이다. 고백 하나 하자면, 운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30대 중반부터 운전기사가 있었고, 직접 운전하는 거리는 새벽에 퇴근할 때 회사에서 집까지 5km남짓이다. 그런 내가 조수석에 누군가 태우고 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회사 초창기 유난히 아끼던 직원과 야근한 날엔 그를 인천 계양까지 데려다주었고, 회사에서 운영한 레스토랑 마감 시간에 일한 아르바이트생들을 안양과 평촌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 늦은 밤 혼자 운전할 때면 문득 그 친구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마릴린 먼로를 되살릴 순 없으니, 그중 한 명을 다시 조수석에 태워보는 것도 좋겠다.

아버지의 르망, 그리고 음악 _ 베이시스트 최훈
레니 크라비츠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며 올해만 대략 서른 차례 공연을 치렀다. 요즘은 석 달째 투어 버스를 타고 유럽의 여러 도시와 국경을 오가며 연주하고 있다. 스페인 사라고사를 지나 마드리드로 향하는 A-2 고속도로변. 건조한 황톳빛 언덕과 낮은 풀숲이 창밖으로 길게 스쳐간다. 테이블 위에는 과일 바구니와 얼음 잔,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노트가 있다. 이 안에서 악기를 연습하고, 창밖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시며 때때로 글을 쓴다. 차가 아닌 집이 달리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길 위에 있다 보면 아버지의 자동차가 떠오른다. 중학생 시절, 저녁 시간이면 우리 집을 지키던 강아지 아롱이는 현관을 향해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롱이가 짖으면 나는 창을 열어 골목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자주색 르망이 들어오고 있었다. 누런 헤드라이트가 담벼락을 스치며 언제나 같은 속도로 천천히. 나는 군 제대 후 아버지께 운전을 배웠다. 주행 연습 내내 과속하지 말라는 가르침 덕분인지 지금도 천천히 운전하길 좋아한다. 지나치는 거리와 사람, 하늘과 건물을 바라보며 그 장면을 곱씹고 즐기는 게 좋다. 목적지에는 결국 도착하니, 그곳까지 가는 여정은 온전히 나만의 즐거움이다. 한결같이 차분히 달리는 투어 버스에 몸을 실을 때마다 아버지의 르망을 타고 이 길을 직접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에 아버지를 앉히고 특별한 대화를 나누기보다 그가 차 안에서 자주 듣던 제임스 라스트 오케스트라의 우아한 왈츠를 틀어주고 싶다. 차에서는 카세트테이프로, 집에서는 LP로 자주 듣던 곡인데, 푸른색 배경 아래 누워 있는 금발 여인과 그 뒤로 어렴풋이 보이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 그려진 앨범 재킷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르망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고, 아롱이의 모습도 이제 희미하다. 하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나는 유럽의 낯선 어딘가를 지나고 있지만,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르망이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자동차는 지나온 시간을 데리고 달리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베이시스트 최훈이 고른 드라이브 음악
Charlie Haden – Noche De Ronda
공연이 끝나고 버스 벙커로 돌아왔을 때, 혹은 깊은 휴식이 필요할 때 듣는다. 아주 근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뒤 여운을 곱씹을 때도 이 묵직한 베이스 선율을 찾게 된다. 스페인풍의 짙은 멜로디와 찰리 헤이든의 낮고 깊은 베이스가 천천히 몸을 감싸며, 늦은 밤의 고요한 낭만과 평온함을 남긴다. 곡이 끝난 뒤에도 잔향이 남아 하루를 천천히 내려놓게 하는 곡이다.
Mondo Grosso – 1974 Way Home
호텔에서 호텔로, 혹은 투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듣는 곡.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하루의 끝에 섰을 때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몽환적인 신시사이저와 부드럽게 흐르는 리듬이 늦은 밤의 도시와 창밖으로 스쳐가는 불빛을 떠올리게 한다. 낯선 곳에서 보낸 시간과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이 묘하게 겹쳐지는,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곡이다.

그랜저에서 골프까지 _ 폭스바겐 코리아 마케팅 김성기 부장
9월이 되어 누군가의 결혼 소식을 듣거나 선선한 공기를 마주하면 결혼을 앞두고 아내와 주말마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던 시절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에게는 2002년 식 뉴그랜저 XG Q25, 일명 그랜붕붕이가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차를 바꾸며 물려주신 10년 된 중고차로, 내 명의로 등록한 첫 차였다. 광택을 잃은 검정색 외관에 화 이트인지 회색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실내 상태임에도 아내는 조수석에 앉아 신나 했다.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 는 기억은 목적지보다 차 안의 풍경이다. 컵 홀더에 올려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서울의 거리,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다프트 펑크의 정 규 4집 <Random Access Memories>. 퍼렐 윌리엄 스의 목소리가 빛나는 ‘Get Lucky’와 ‘Lose Yourself to Dance’는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았고, 줄리안 카사블랑카스의 나른한 보컬과 몽환적 사운드 가 어우러진 ‘Instant Crush’는 그 시절 우리가 느끼던 설렘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음악 을 듣던 거리와 신호등, 잠시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 던 순간까지 하나의 장면처럼 남아 있다. 사회 초년생 시 절, 누구나 한 번쯤 폭스바겐 골프를 첫 차로 꿈꿨을 것 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서울에서 차를 소유한다는 건 주차비와 유지비, 대리운전 비용 등 생각보다 많은 비 용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마음만으로 쉽게 가질 수 있 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 의 아빠가 되는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그중 하나가 지 금 타고 있는 차다. 폭스바겐 코리아의 마케팅을 담당하 게 된 덕분에 사회초년생 시절 첫차로 꿈꿨던 골프 TDI 를 몰고 있다. 150마력의 2.0 TDI 엔진과 7단 DSG가 만들어내는 경쾌한 응답, 낮은 회전수부터 풍부하게 발 휘하는 36.7kg·m의 토크는 일상적인 주행에서도 탄 탄한 힘을 전한다. 더불어 17.3km/L에 달하는 효율까 지 갖췄으니 출퇴근부터 장거리 여행까지 부담 없이 함 께할 수 있는 차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나의 마흔네 번째 생일이다. 아내가 손수 끓인 미역국에 아이 들이 작은 손으로 만든 계란프라이까지. 소박하지만 따 뜻한 생일 밥상을 마주하고 있으니 참 많은 것이 달라졌 음을 새삼 느낀다. 오늘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느긋한 드 라이브를 하고 싶다. 곁들일 음악은 역시 다프트 펑크의 <Random Access Memories>. ‘무작위로 떠오르 는 기억들’이라는 앨범의 이름처럼 무작위 재생으로 틀 겠다. 그래도 나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Get Lucky’ 가 나올 것 같은 행복한 날이니 말이다.
김성기 부장의 추억이 담긴 드라이빙 코스
아리랑 고개 ~ 북악 팔각정 ~ 창의문 ~ 카페 럼버잭: 성북동에 서 북악산로에 올라 팔각정을 향해 천천히 산길을 오른 뒤, 정상 에서 서울 야경을 한눈에 바라보고 창의문 쪽으로 내려와 부암동 에 닿는 코스. 굽이굽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코너를 지나면 어느 순간 도심의 소음이 멀어지고, 팔각정에 이르면 서울의 불빛이 발아래 펼쳐진다. 북악스카이웨이의 매력은 산길의 리듬을 따라 가며 서울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즐기는 데 있다. 부암 동으로 내려오면 분위기도 한결 느긋해진다. 마지막 목적지는 단 골 카페 럼버잭. 추운 날에는 콘파냐를, 더운 날에는 샤케라토를 자주 마셨다.

20년 뒤에도 우리는 _ 에레보 정영철 대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메탈릭 그린 컬러에 베이지색 가죽과 우드 트림을 두른 L322 레인지로버를 떠올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운전하는 사진을 보고 멋 지다고 느낀 이유도 있지만, 이번 여정에 L322를 선택한 건 오랜 친구 DK와 동행하 기에 가장 어울리는 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접 소유한 적은 없지만, 여러 번 타 보며 경험한 L322의 공간감은 대체 불가능하다. 높은 시팅 포지션, 넓은 창이 주는 시 야와 개방감, 여유로운 실내가 어우러져 풍요로운 공간을 만든다. 우리는 고등학교 영 화 제작 동아리에서 선후배로 처음 만났다. 졸업 후 자동차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떠 난 ACCD에서 DK를 다시 만났다. 심지어 같은 자동차·운송 디자인 전공이었다. 그 길로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며,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꿈을 지지했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시절을 공유한 셈이다. 여행 의 목적지는 강원도 정선이다. 산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든다. 가을 풍경을 천천히 즐기다 파크로쉬 리조트앤웰니스에서 하루를 머문다. 파크 로쉬는 쉬는 것 자체에 집중하기 좋은 숙소다. 요가나 명상을 즐길 수도 있고, 독서를 위한 라운지, 사우나 시설도 훌륭하다. 객실에서 산을 바라보며 뒹굴기도 좋 다. 예전에는 부부끼리 와인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땐 내가 DK만큼 와 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그 마음을 담아 소 노마 커틀러의 러시안 리버 랜치 샤도네이 한 병을 열고 싶다. 20 년을 함께한 친구인 만큼 편안하고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 적당하다. 좋은 술도 시간을 함께 하는 상대가 중요하니까. 이 번 여행 역시 무언가를 경험하기보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 다. 운전이 좋은 이유도 비슷하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 이기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에 가 깝다. 창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고 온도를 조절하며 앉는 자세까지 마음 대로 할 수 있다. DK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의 20년을 추억하고 싶 다. 각자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졌고, 여전히 그대로 인것은 무엇인지.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서로 몰랐던 새로운 사실에 놀라며 낄낄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영철 대표가 추천하는 와인딩 스폿
미륵고개: 서울을 벗어나 정선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미륵고개는 두위봉 일대의 산허리를 타고 이어지는 코너의 반경과 경사가 적당해 부담 없이 와인딩을 즐길 수 있다. 노면 상태가 비교적 좋은 데다 교통량이 많지 않으니 차의 움직임에 집중하기에도 충분하다. 미륵고개 전망대에 이르면 차를 잠시 세운 뒤 높고 낮은 산줄기가 끝없이 겹쳐지며 시야를 가득 채우는 정선의 거대한 산세를 바라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