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ACY #EP. 1 유지태, 이강소, 최영훈
세월을 머금을수록 형형히 빛나는 물건이 있다. 일곱 남자가 들려주는, 하나의 물건에 새겨진 저마다의 우주.
YOO JI TAE
“만년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삶의 태도와도 같다. 잉크의 농담과 선 굵기를 스스로 조절하듯,
삶 역시 각자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유지태
1998년 데뷔 후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왕과 사는 남자> 등 굵직한 작품을 남겼으며, 현재 배우, 감독, 건국대학교 영상학과 조교수로 활동 중이다.
문학가가 펜으로 글을 쓰듯 감독은 카메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써 내려가는’ 행위라는 선언이었다.
1998년 영화 〈바이 준〉으로 데뷔하고 필모를 채워갈수록 나는 영화라는 매체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왕가위(왕자웨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작품을 보며 영화의 깊이감을 알아갔고, 그들은 나를 이 세계로 이끈 스승과도 같다. 그중에서도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의 ‘카메라-만년필론(came’ra-stylo)’은 큰 울림을 남겼다. 그는 카메라를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사유를 써 내려가는 도구로 정의했다. 문학가가 펜으로 글을 쓰듯, 감독은 카메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써 내려가는’ 행위라는 선언이었다. 여기서 영감받아 아그네스 바르다 감독은 ‘영화 쓰기(cine’criture)’라는 용어를 창안했다. 그 영향인지 모르지만, ‘쓴다’는 행위는 배우이자 감독인 내겐 특별한 의미였다. 언제인지 어렴풋한데, 그 갈망을 좇아 몽블랑 노트와 마이스터스튁 솔리테어 듀에 클래식 만년필을 산 기억이 있다. 여전히 서재 한편에 자리해 있다.
만년필로 써 내려갈 때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 좋다. 필압에 따라 하얀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느낌 때문에 크로키 작업을 할 때 붓펜과 만년필을 번갈아 사용한다. 일정하지 않은 선과 번짐에서 감정이 드러난다는 점도 흥미롭다. 손 글씨가 매력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 부지런히 연습할 때도 있었는데, 아직 미려하게 쓰지는 못한다. 그래도 뭔가 떠오를 때면 노트에 펜촉을 올린다. 그렇게 쓰는 시간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필력(筆力)은 연기와 닮았다는 사실을. 부단한 연습과 체화를 거쳐야 비로소 미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삐뚤빼뚤 서툴러도 자신만의 색과 감정이 담기면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THE LEGACY
내게 만년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삶의 태도와도 같다. 잉크 농도와 선 굵기를 스스로 조절하듯, 삶 역시 각자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내 아이나 소중한 제자에게 펜을 건넨다면, 아스트뤽의 카메라-만년필론이 담고 있는 영화의 가치도 함께 전하고 싶다. 스스로를 마음껏 표현하고 삶을 써 내려가라는 바람을 담아. 자신만의 굵기와 농담을 만들고, 그 기록이 쌓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LEE KANG SO
“아버지의 이안리플렉스 카메라는 나를 예술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이강소
설치 작업을 비롯해 비디오, 사진, 회화, 조각, 판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실험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 미술을 이끌어온 거장이다.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물려받은 뒤, 나는 자연스럽게 예술 세계에 가까워졌다. 1953년 초여름, 6·25전쟁이 막 끝난 직후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내게 아버지가 건넨 것은 롤라이 리플렉스와 자이스 아이콘(Zeiss IKON) 두 대의 카메라였다. 전후의 궁핍한 시절인 만큼 더없이 귀한 물건이었고, 아버지도 자랑스럽게 건네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2안 렌즈의 큰 롤라이 리플렉스는 손에 쥐기엔 너무 커서 형에게 양보하고, 라이카와 비슷한 크기의 단단한 자이스 아이콘만 내가 소장하게 되었다. 옛 동독에서 생산한 이 카메라는 어린 내게 더없이 신비로운 아이템이었고,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을 찍으며 찰나를 붙잡는 일의 즐거움을 알아갔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세상, 인화를 거쳐 드러나는 이미지는 나를 신기한 세계로 이끌었고, 카메라는 어느새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카메라 렌즈가 포착한 세계가 다를 뿐 아니라 인화된 사진과 나는 미로 같은 관계처럼 느껴졌는데, 이는 2000년대 초반 사진 작업의 씨앗이 되었다. 오는 8월 개인전에서 이 사진들을 한자리에 모을 계획이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카메라는 중학교 2학년 때 잃어버리고 말았다. 운동장 야구장 백네트를 페인트로 칠하던 미술반 활동 중 어딘가 걸어둔 게 마지막 기억이다. 그 후 나는 카메라를 모으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손에 쥘 때마다 아버지가 처음 건네주시던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카메라는 지금 손에 없지만, 그것이 열어준 세계는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THE LEGACY
서예와 풍류를 즐기던 할아버지, 사진을 즐겨 찍던 아버지. 두 세대에 걸친 감각의 유산은 나를 예술가로 만든 밑거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미술반 활동을 시작했고, 헌 책방에서 미군 부대로부터 흘러 들어온 <타임>과 <라이프>를 뒤적이며 추상표현주의와 전쟁 사진들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나는 그렇게 예술가가 되어갔다. 물건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다음 손으로 건네질 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함께 따라온다. 나도 언젠가 소중히 다루던 것을 자식들과 나누겠지만, 그 물건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결국 그의 몫일 것이다.
CHOI YOUNG HOON
“그저 오래된 신발 한 켤레가 누군가에겐 소중한 보물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눈으로 무엇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인지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갖길 바란다.”
최영훈
아이웨어 브랜드 프레임 몬타나와 스펙스 몬타나 대표.

1982년, 어머니가 나이키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오셨다. 친구가 나이키 대리점을 시작해서 뭔지도 모르고 사 왔다는데, 나는 정확히 알았다. 그게 어떤 신발인지. 동경의 대상이자 테니스 스타인 존 매켄로가 신던 신발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적 운동화가 2000~3000원 할 때 나이키는 2만 원이 넘는 초고가 신발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맛이 무섭다고, 어렸던 나는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가질 수 없어 한이 됐다. 마흔이 넘어 그 한을 풀기 위해 빈티지 나이키를 모으기 시작했다. 심플하지만 아름다운 실루엣과 디자인, 그리고 색 조합이 매력적인 1970년대부터 1983년까지 모델을 주로 모았다. 대표적으로 1973년에 출시한 스팅 오리지널은 나이키 러닝화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신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이다. 프레임 몬타나를 운영하면서 사무실 한쪽에 빈티지 스니커즈 갤러리를 만들었다. 방문객들이 그림처럼 감상하고 잠시나마 옛 추억을 회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금 돌이켜보면 한이란 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어릴 적 갖지 못한 덕분에 불혹을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설렘을 느끼니 말이다.
THE LEGACY
제약 없이 모든 걸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취향을 갖기 힘들다. 고민하지도 않아도 쉽게 가질 수 있으니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아들이 어느덧 의젓한 어른이 된 모습을 보며 이제 품을 떠났구나 하는 마음에 시원섭섭한 감정을 삼킬 때가 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가르칠 것도 없지만 단 한 가지 부탁하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잃지 않았으면 한다. 주변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졌으면 한다. 별것 아닌 그 취향이 삭막하고 지루한 세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