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티.듀퐁의 기준
디지털 기술이 창작의 경계를 허무는 시대. 그러나 여전히 ‘손’에서 시작되는 창작을 이야기하는 에스.티.듀퐁의 CEO 알랑 크레베.
봄의 기운이 막 스며들던 4월의 어느 날, 메종 에스제이 149에서 에스.티.듀퐁의 CEO 알랑 크레베(Alain Crevet)를 만났다. 1872년 파리에서 시작된 에스.티.듀퐁은 라이터와 필기구, 가죽 제품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핵심 가치인 ‘아르 드 비브르(Art de Vivre)’를 구축해왔다. 디지털 기술이 창작의 영역까지 확장된 오늘날, 그는 여전히 인간의 손에서 출발하는 창작의 의미를 강조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브랜드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계승하고 유지해 나가는지, 나아가 협업과 컬렉터 문화, 그리고 AI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나눴다.

4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여러 차례 방문한 만큼 이제 꽤 익숙 할 것 같다. 알랑 크레베가 바라보는 지금의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국은 늘 내가 좋아하는 나라다. 이제는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패션과 트렌드를 선도하는 중요한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최근 내부 미팅이나 한국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며 인상 깊었던 점은 한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독서와 필기 문화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환경이 일상화된 시대에 전통적 필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우리 브랜드와 맞닿은 지점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에스.티.듀퐁은 매년 소량 생산으로 한정판 컬렉션을 선보인다. 이번에도 새로운 한정판 제품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이번 시즌 주요 한정판 컬렉션을 소개해달라.
올해 <해저 2만리>를 시작으로 다양한 한정판 컬렉션을 선보였다. 프리미엄 시가 브랜드 코히바와 협업한 베히케(Behike) 컬렉션은 시가를 즐기는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코히바의 정체성을 섬세하게 반영한 아이템을 구성했다. 프랑스 팝 아티스트 리차드 올린스키와 협업한 한정품도 선보일 예정인데 그의 대형 조각 작업을 듀퐁의 기술로 재해석하며 팝아트적 표현을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리차드 올린스키, 코히바 등 폭넓은 협업이 인상적이다. 협업 파트너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협업 파트너를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브랜드의 전통을 얼마나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다. 우리 팀 내부 마케팅 및 협업팀은 비교 적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을 주축으로 다양한 리서치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안할 수 있는 파트너를 발굴한다. 예를 들면, 리차드 올린스키와의 협업은 듀퐁의 상징적 기요셰 패턴을 그의 아트로 새롭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작했다. 협업은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신선한 방식으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예상치 못한 조합에서 창의성이 탄생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협업 사례는 무엇인가?
듀퐁이 중요시하는 ‘아르 드 비브르(Art de Vivre)’, 즉 삶의 예술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협업이 가장 인상 깊다. 과거 시가 클럽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한 계기로 패션 브랜드 카사블랑카와의 협업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한 지인이 몬테크리스토와 협업한 화려한 색감의 라이터를 보며 카사블랑카를 떠올렸고, 이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샤라프 타자르를 연결해주었다. 평소 시가 문화를 즐기던 샤라프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협업으로 발전했다. 단순한 비즈니스 접근이 아닌 공통된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협업이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수많은 협업을 진행하면서 ‘듀퐁다움’을 유지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협업은 철저한 리서치와 트렌드 분석을 기반으로 신중하게 선정한다. 동시에 내부 규정을 통해 협업 범위를 제한적으로 운영하며 브랜드의 감도와 시장 평가를 유지한다. 기술적 기준 역시 중요한 요소다. 기술적 측면에서 지키고 있는 부분을 사례로 들면, 과거 한 협업에서 실험적 형태의 디자인을 시도했지만 기술적 한계로 완성도에 영향을 미친 경험이 있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불량률이 높았고, 이러한 문제는 곧 브랜드의 품질과 명성으로 직결되기에 협업 파트너에게 구현 가능한 기술 범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로벌 럭셔리 시장에서 컬렉터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에스.티.듀퐁은 어떤 방식으로 컬렉터와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가?
듀퐁의 제품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상징적 기요셰 패턴을 적용한 기본 컬렉션,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한 한정판 컬렉션, 그리고 최상위 단계인 컬렉터를 위한 ‘오뜨 크리에이션(Haute Creation)’이다. 오뜨 크리에이션은 고객의 요청에 맞춰 비스포크에 가까운 방식으로 제작한다. 소수 장인들이 참여해 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며, 필요할 경우 외부 장인과 협업해 기술적 한계를 확장한다. 이는 단순히 높아진 컬렉터들의 밸류에 맞춘 전략이 아니라 창립자 시몽 티소 듀퐁(Simon Tissot Dupont)이 추구한 ‘단 한 사람을 위한 창작’이라는 브랜드의 본질에 기반한 것이다.
CEO로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동시에 음악을 작곡하고 밴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음악 활동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 일과 창작을 병행하는 원동력은?
업계 자체가 예술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가 음악이나 예술적 활동을 병행하는데, 이는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나의 밴드 멤버 역시 디즈니 임원이나(실제로 듀퐁은 디즈니와의 협업으로 한정품을 출시한 적이 있다.) 테크 기업 종사자 등 각자 전문 분야의 인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악은 모두에게 새로운 영감을 얻는 과정이다. 중요한 점은 이를 별개의 에너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일과 창작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데서 비롯된다.
에스.티.듀퐁 컬렉션을 보면 여러 국가의 문화와 유산에서 영감받은 요소가 인상 깊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의 문화와 공예에서 착안한 프로젝트를 고려한 적이 있는가?
한국의 문화와 예술적 요소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한국의 타투 아티스트와 협업한 적도 있고,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점점 커진다는 점을 체감하고 있다. 살짝 귀띔하자면, 지금도 다양한 협업 가능성을 검토 중이지만 아직 구체적 결과물을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
AI 시대에 에스.티.듀퐁만의 ‘고유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지켜나갈 것인가?
듀퐁은 AI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도 장인정신을 핵심 가치로 한다. 과거에는 80~90명의 장인과 함께 작업을 해왔지만, 지금은 보다 소규모로 운영하며 그만큼 더욱 밀도 높은 제작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AI를 장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보조 역할로서의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또 AI는 창작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고객과 시장을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하려 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창작의 출발점은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