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링 세계의 무한한 확장
페어링 세계의 무한한 확장. 식탁 위 조용한 혁신이 이루어진다.
한때 페어링은 곧 와인을 의미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테루아 중심의 요리 철학이 주목받고, 논알코올 문화가 확산되면서 페어링 풍경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발효 음료, 전통주, 수제 맥주, 주스, 차가 다이닝 테이블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10여년간 이어진 다양한 시도 속에서 어떤 조합은 사라졌고, 어떤 조합은 더 세분화되어 살아남았다. 대표적 예로 티 페어링은 찻잎의 종류를 넘어 추출 방식과 유리잔 형태까지 고려하며 풍미의 스펙트럼을 넓혀간다. 북유럽에서 출발한 주스 페어링은 전 세계에 뿌리내렸고, 페어링에 진심인 레스토랑은 주스 소믈리에나 티 전문가를 두고 정교한 조합을 제안한다. 지금, 가장 동시대적 페어링을 선보이는 곳을 엄선했다. 오직 페어링을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방문할 이유가 충분한 곳들이다.

주스를 요리하다
논알코올 페어링은 파인다이닝에서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독창성과 가짓수가 페어링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코펜하겐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제라니움은 그 진화의 최전선에 있다. 이곳에서 주스는 단순히 ‘술을 대신하는 음료’가 아니라 음식의 풍미를 연결하고 확장하는 핵심 매개체다. 논알코올 페어링 메뉴는 줄리아 카피에로가 전담한다. 그녀는 주스 한 잔을 만들 때 과일, 채소, 허브 또는 꽃, 세 가지 요소를 조합해 복합적 풍미를 설계한다. 때로는 요리와 연결감을 강조하기 위해 스모크, 로스팅 기법을 적용한다. 예를 들면, 소나무 가지 훈연 향을 유리잔에 가둬 스모키한 풍미를 덧입히는 식이다. 이 외에도 식전주로 내는 주스는 사과와 펜넬, 딜 오일을 블렌딩하고 딜 파우더를 뿌려 마무리한 뒤 테이블사이드에서 셰이킹 퍼포먼스를 더해 서브한다. 가리비 요리에는 말린 라즈베리, 커피, 로즈메리를 블렌딩한 주스를 곁들여 달콤쌉싸름한 맛과 허브의 여운으로 코스를 매끄럽게 마무리한다.
페루의 코예도 주스 페어링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세계 미식의 판도를 바꾼 센트럴에서 헤드 셰프로 활약한 피아 레온이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센트럴에서 그랬던 것처럼 페루의 생물다양성을 강조한 요리와 음료를 선보인다. 방대한 와인 리스트도 갖췄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논알코올 페어링을 고르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음료 코스는 토착 과일 넥타, 허브와 꽃 인퓨전, 숙성된 추출물 등 다채롭게 구성했으며, 서브 직전에 허브를 더하거나 스모크를 입히는 등 시각적 경험까지 고려해 설계했다. 대표적 메뉴로는 감칠맛이 풍부한 로체(loche) 스쿼시와 안데스 허브인 세드론(cedro’n)을 조합한 ‘로체×세드론’, 상큼한 열대 과일 루로(lulo)와 톡 쏘는 향이 일품인 안데스 페퍼트리 몰레(molle)를 블렌딩한 ‘루로×몰레’가 있다. 각 음료는 해산물 또는 뿌리채소 중심의 요리와 조응하며, 입안에서 또 다른 풍미를 만들어낸다.


감각적 티 페어링
도쿄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사젠카. 셰프 가와타 도모야는 차를 파인다이닝의 언어로 끌어들인 대표적 인물이다. 이곳에서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때로는 소스처럼, 때로는 클렌저처럼 요리의 풍미를 조율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찻잎, 온도, 추출 방식(냉침, 저온 우림, 탄산 가미 등)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 풍미가 펼쳐진다. 흑식초로 맛을 낸 돼지고기에는 향신료와 말린 장미 봉오리를 사이폰으로 함께 우려낸 운남 홍차를 곁들인다. 요리의 산미와 홍차의 스파이시한 풍미가 겹쳐지며 깊고 묵직한 여운을 만든다. 상큼한 젤리피시 요리에는 48시간 냉침한 교토의 옥로를 매칭한다. 조갯살을 넣은 봄채 전채에는 동방미인 우롱을 선택한다. 실온에서 30분간 우려낸 뒤 48시간 냉장 숙성하고, 마지막에 탄산수를 더해 완성한다. 은은하게 퍼지는 꽃 향과 샴페인을 닮은 청량감이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티 페어링은 더 이상 아시아에 한정된 문화가 아니다. 파리의 얌차는 홍콩·광둥 지방의 전통 차 문화를 전달한다. 레스토랑 이름도 홍콩식 다과 문화에서 따왔다. 셰프 아델린 그라타르는 미쉐린 레스토랑 라스트랑스에서 수련하고, 홍콩에서의 요리 경험을 바탕으로 얌차를 열었고, 티 소믈리에이자 남편인 치 와 찬과 함께 테이스팅 코스를 구성한다. 프랑스 요리 기술에 홍콩과 광둥의 풍미를 접목한 메뉴에는 타이관인, 보이차, 백목단차 등 여섯 가지 차가 어우러진다.

식을 달리해 섬세한 풍미를 낸다.


루타르.
페어링의 대서사시
전설적 레스토랑 엘불리 출신 셰프 세 명이 진두지휘하는 디스프루타르. 2024년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위의 위엄은 페어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 5시간 동안 이어지는 30여 개 코스. 이때 음료는 요리의 흐름을 조율하며, 긴 서사에 리듬을 불어넣는다. 장시간을 끌고 가려면 변주가 관건일 테다. 그래서 분자요리 기법으로 만든 애플사이다부터 럼, 와인, 주스, 사케, 스파클링 티, 위스키까지 광범위한 셀렉션을 선보인다. 간판 페어링은 트러플 보드카와 캐비아, 버터 거품으로 속을 채운 브레드 ‘판치노(panchino)’다. 자체 레시피로 병입한 이 보드카는 얇게 슬라이스한 블랙 트러플을 장기 냉침해 숙성한 것이다. 판치노와 함께 머금으면 흙 내음과 감칠맛이 어우러진 우아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또 다른 인상적인 페어링은 훈제 고체 버터 거품과 캐비아를 곁들인 요리에 매칭한 사케 ‘비덴 1999’. 미이노코토부키 양조장에서 1999년에 양조해 약 20년간 상온 숙성한 준마이 야마하이 고슈(古酒)다. 일반 사케보다 훨씬 강하고 농축된 감칠맛을 지녔으며, 숙성에서 비롯된 캐러멜, 아몬드, 버섯 노트가 인상적이다. 훈제 버터의 흙 내음, 캐비아의 짠맛과 놀라운 균형을 이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