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구태여 더하거나 꾸미지 않는 채식 전문 한식당 ‘비움’의 미학.

과거 비건 레스토랑과 메뉴는 해외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변화 영향과 미식 신의 확장으로 국내에서도 관련 식당과 메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식품 기업과 셰프들의 다양한 시도로 레스토랑이 속속 생겨났고, 그 중 호평받는 곳도 여럿이다. 그럼에도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채식’은 왠지 2% 아쉬운 느낌이 들고, 대체육은 어색하게 육류를 흉내 낸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비움은 조금 다르다. 진관사의 놀라운 사찰 요리를 접한 김대천 셰프의 경험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신채(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를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채소’로 맛을 낸 건강하고 경쾌한 한식을 완성했다. 우리나라 제주도와 지리산, 울릉도까지 땅과 바다에서 자란 재료 본연의 맛은 극대화하고, 셰프의 특기인 발효와 숙성으로 깊이를 더한다. 다수의 한옥을 작업해온 착착 건축사무소 김대균 소장이 구성한 천장 대들보나 황토벽, 직접 제작하거나 장인이 만든 식기들. 공간과 메뉴를 만들 때 1000년 전 선인들이 먹던 집밥을 떠올린 김대천 셰프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2월 어느 날 점심에 방문한 비움은 톡톡과 세븐스 도어, 텐지몽이 있는 건물 1층에 있었다. 도심이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물 입구는 평화로운 절에 들어서는 듯했고, 입구에 진열된 장독대를 보니 고향집에 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장독대에는 셰프가 직접 담근 장이 보관돼 있고, 장은 모두 요리에 사용한다. 한옥을 본뜬 공간은 목재 위주로 꾸몄고, 절제된 색으로 안온한 기조가 두드러진다. 평균 2시간 이상 소요되는 코스 시간을 고려해 의자는 식사를 음미하기도, 중간중간 기대기도 적당한 기울기로 의뢰해 제작했다. 등 부분을 한옥 창살의 세로선으로 채운 점도 인상적이다. 이기조 작가의 백자, 최기 작가의 나무 수저, 김윤진 작가의 테이블 매트와 아이스 버킷, 청주 잔까지 기물에도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였다.

식사의 시작은 ‘초조반’. 이른 아침에 먹는 식사라는 의미로, 하루 다섯 끼를 먹던 임금이 새벽에 처음 일어나 먹는 아침을 뜻한다. 나무 쟁반에 정갈하게 담은 떡과 제철 재료로 담은 절임, 감칠맛 도는 능이표고죽과 곡물 차가 앞에 놓이니 마치 임금이 된 기분이었다. 하루를 여는 식사인 만큼 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이 속을 편안하게 했다. 코스에 술 네 잔을 곁들였는데, 초조반과 함께 나온 술은 ‘크룩 그랑 뀌베 브뤼’였다. 섬세한 프랑스 샴페인과 한식의 조화가 꽤 잘 어울렸다. 이어서 ‘수라’가 시작됐다. 춘하추동, 지수화풍을 주제로 요리를 전개하는 비움은 땅의 봄, 물의 여름, 불의 가을, 바람의 겨울에서 영감받아 자연 변화와 만물의 순환을 음식으로 표현한다. 그중에서도 지수화풍의 ‘화’에 속하는 몇 가지 반찬이 기억에 남는다. 간장에 조린 뒤 비장탄에 구워 숯불 향을 살린 버섯과 비움 수제 고추장으로 양념해 구운 더덕구이는 고기 반찬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조포사 두부도 인상 깊다. 비움의 시초가 된 진관사는 왕실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들어 공급하던 절이다. 맷돌로 정성스레 콩을 갈아 만든 두부를 신도들과 나누며 공덕을 회향했다는 진관사의 전통처럼 먹는 내내 감동이 이어졌다.
비움의 추천 페어링
막걸리
단백질 함량이 적은 찹쌀 다복찰을 사용하며, 삼양주법으로 세 번 빚어 걸쭉한 탁도와 맛을 구현했다. 이는 ‘수’에 해당하는 해조류의 질감과 어울림이 좋고, 감칠맛을 살려준다.
청주
막걸리 채주 전 먼저 올라온 술을 대나무 용수로 맑게 걸렀다. 단맛과 신맛의 균형이 좋아 반주로 적합하다. 술병과 함께 개인 술잔을 내어, 서로 권하고 따르며 즐길 수 있도록 제공한다.
하귤주
달고 씁쓸한 맛이 매력적이다. 새콤하기보다는 묵직하며, 반과상을 먹을 때 중간중간 클렌징 역할로 곁들일 것을 권한다. 다도에서 나오는 우전차와 마시면 차 맛이 극대화된다.

이것만으로도 흡족한데, 유자 껍질을 사용해 새콤하게 클렌징해주는 후식에 이어 한국식 디저트 코스 ‘반과상’이 나왔다. 생강과 잣으로 만든 생란, 도라지 정과와 곶감말이 등 계절을 살려 만든 전통 과자는 기분 좋은 단맛으로 식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곱게 담은 디저트도 훌륭하지만, 함께 나오는 우전차는 비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차다. 소믈리에를 겸하는 고대현 지배인이 고향 제주에서 차밭을 운영하는 지인에게 받아오는 차로, 24절기 중 첫 번째 봄비가 내리는 곡우 이전에 거둔 것이다. 수확 시기가 이른 어린 차인 만큼 향을 음미하기 위한 첫 잔, 그리고 보다 깊은 맛의 두 번째 잔, 총 두 번 제공한다. 비움에서는 한정 기간 동안 디너 코스가 끝나면 손님들에게 보자기로 단정하게 싼 선물을 준다. 두 종류의 밥과 몇 가지 반찬을 담은 목합이다. 처음 식당에 온 이에게 주는 도시락은 다시 빈 목합을 들고 방문했을 때 밥과 반찬을 채워준다고. 김대천 셰프는 목합이 비움과 손님을 연결하는 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목합을 제작했다. 원형이 된 1920년대 도시락 통은 식당 입구에 전시되어 있으며, 이를 복각하기 위해 수소문 끝에 교토 현지 장인에게 맡겨 공수했다고 한다.

메뉴에 적혀 있던 ‘잎이 떨어진 자리에 꽃이 피고 꽃이 진 곳에 열매가 맺힙니다’, ‘번민과 해로움을 비우고 평온과 이로움은 채우는 먹을거리를 내놓고자 합니다’라는 말이 이곳의 모든 시간을 관통한다는 걸 몸소 느끼며 번민 없이 식당을 나섰다. 우연히 진관사 사찰에서 채식 요리를 경험한 셰프가 고안한 채소 한식, 그 건강하고 경쾌한 맛은 색다른 보양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비움의 디너 코스
초조반, 수라(지·수·화·풍), 반과상 순서로 나오는 메뉴 일부 들여다보기.

초조반
쑥개떡과 호박 장아찌를 포함한 몇 가지 절임, 속을 따뜻하게 하는 곡물 죽, 계절 곡물의 특징을 담은 차로 구성했다.

수
미역이나 톳처럼 신선한 해조류와 채수를 기반으로 만든 동치미 국수 등 여섯 가지 반찬과 요리가 나온다.

화
불을 사용한 요리들. 우엉과 버섯으로 속을 채운 만두, 비장탄에 구운 버섯, 녹두 빈대떡과 더덕구이 등이 나온다.

풍
밥과 국, 다채로운 반찬이 등장 하는 반상. 젓갈이나 오신채를 넣지 않고도 시원한 맛을 내는 김치, 뜨끈한 아욱국과 잡곡밥 등 춘하추동 사계절을 음식으로 표현한다.

반과상
모약과와 생란, 도라지 정과, 곶감말이, 대추떡 등 계절을 살려 만든 전통 과자와 제철 과일.
와인도 곁들일 수 있지만, 채소 한식을 전개하는 만큼 전통주 비율이 높다. 지역별 청주와 증류주는 총 40여 종을 갖췄다. 다양한 주류 중 고대현 소믈리에가 주조하는,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술 페어링을 추천한다.
주소 서울시 강남구 학동로97길 41, 리유빌딩 1층
인스타그램 @bium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