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을 사랑하는 자, 샌프란시스코로
요즘 시대의 미식의 시작은 샌프란시스코다.
지금 가장 뜨거운 미식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미쉐린 스타를 얻었고, 올해만 총 28곳이 별을 달았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건 한국계 셰프 코리 리가 이끄는 ‘베누’가 10년째 미쉐린 3스타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베누는 <흑백 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 요리사) 심사위원이자 현존하는 국내 유일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모수’의 안성재 셰프가 오픈 멤버인 곳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미식을 대표하는 얼굴, 베누
미식 열풍에 맞춰 떠난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베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발 전부터 미쉐린 3스타를 향한 기대감에 내내 두근거렸다. 저녁 6시에 시작한 식사는 10시가 돼서야 마쳤지만, 약 4시간의 식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부드러운 직원들의 응대, 완벽에 가까운 요리 순서와 맛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작은 요리(small delicacies)’라고 적혀 있던 첫 번째 코스에서는 전채 요리만 몇 차례가 나왔는지 모른다. 그중 홍합 속에 당면과 채소를 넣어 입안에 폭죽이 터지듯 식감과 맛의 향연이 펼쳐지던 요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송이로 만든 샤오룽바오, 토마토 젤리와 굴 젓갈, 캐비아를 김부각에 곁들여 먹는 요리, 새롭게 재해석한 갈비탕 등 디저트를 포함한 12가지 메뉴가 식탁에 등장했다. 베누의 진가는 사실 재방문할 때 드러난다. 방문 이력이 있는 고객에게는 새로운 메뉴를 내어주기 때문. 또다시 이곳을 찾고 싶은 이유다.
이토록 다양한 미식
샌프란시스코는 과거 멕시코의 영토였고, 19세기 골드러시 현상으로 이민자 유입이 많아 다양한 문화적 특성이 어우러진 도시다. 미쉐린 가이드에 등재된 ‘SPQR’은 아담한 공간에서 정교한 수제 파스타를 선보이는 이탤리언 레스토랑이다. 파스타 테이스팅 메뉴와 코스 와인 페어링을 주문하면 고르곤졸라와 호두, 발사믹을 곁들인 라비올리나 조개와 홍합 소스를 얹은 오징어 먹물 사프란 링귀니 등 요리에 잘 어울리는 와인을 다채롭게 맛볼 수 있다. 취향 있어 보이는 현지인들이 미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SPQR이 도시에서 가장 핫한 식당 중 하나임을 확신했다.
타지 캠턴 플레이스 호텔 내 ‘봄베이 브래서리’에서 맛본 프랑스식 현대 인도 요리도 인상 깊다. 그릭 요거트와 그린 망고로 채운 ‘요거트 크로켓’은 식전 입맛을 돋우고, 이어 나온 매콤한 ‘프라운 망고 커리’는 한국인의 입맛을 저격했다. 요리도 요리지만, 인도 왕실 같은 분위기의 봄베이 브래서리 인테리어는 식사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 여행 내내 머물던 포시즌스 엠바카데로의 ‘오라포’는 호텔만큼이나 입과 마음을 즐겁게 해준 공간이다. 호텔에 단 하나뿐인 레스토랑이자 바(bar)지만 ‘하이브리드’처럼 조식과 런치, 디너와 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첫날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몸과 정신은 구운 문어 요리에 ‘플라워스 소노마 샤도네이’ 한 잔을 마시자 금세 활기를 찾았다. 매일 아침은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와 향긋한 커피로 활기차게 열었으며, 떠나기 전날 밤 오라포의 수석 바텐더 데이빗과 함께한 믹솔로지 워크숍은 진과 버번, 메즈칼 총 세 종류로 변주한 네그로니 칵테일을 맛보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이 도시의 밤은 낮보다 뜨겁다
샌프란시스코는 폴리네시아에서 비롯한 티키 바, 이제는 보편화된 크래프트 칵테일 바, 알카트라즈 에서 좌초된 배로 만든 ‘올드 십 살롱’처럼 역사를 지닌 바까지 바 문화가 발달해 있다. 그중 ‘바 아이리스’와 ‘퍼시픽 칵테일 헤이븐’ 총 두 곳의 바를 방문했다. 금방 해가 지는 도시임에도 두 바의 분위기는 사람들과 열기로 가득했다. 먼저 간 바 아이리스는 일본 문화와 재료에서 영감받은 칵테일을 선보인다. 전체적 분위기 역시 일본 어느 도시의 밤에 머무는 듯했고, 시소와 쇼추, 사케 등으로 완성한 ‘시소 & 토닉’이나 1920년대 오사카를 떠올리며 산토리 히비키, 콥케 포트 와인을 넣어 만든 ‘아카다마’ 등이 인상적이었다. 퍼시픽 칵테일 헤이븐은 근 몇 년간 ‘노스 아메리카 베스트 바 50’ 순위에 오른 바임을 증명하듯 젊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십스미스 진 베이스에 깔라만시, 파파야 코디얼을 더한 ‘P.C.H 김렛’이나 하인 코냑과 듀어스 12년 스카치, 차이 티 등을 넣은 ‘툭툭 티’처럼 음료는 대체로 상쾌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마지막 날 오전에는 문을 연 지 두 달이 채 안 된 신상 레스토랑 ‘카페 세바스찬’에서 식사를 했다. 이곳은 마이애미의 유명 셰프 브래들리 킬고어의 새로운 레스토랑으로, 아침과 점심 메뉴도 맛있지만 특히 페이스트리 맛이 훌륭하다. 갓 구워 따듯하고, 섬세한 결의 페이스트리를 꼭 맛보길 권한다. 바로 앞에는 트랜스 아메리카 레드우드 공원이 자리해 식사 후 거닐기도 좋다.
꿈같던 미식 여행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한국식 타파스 레스토랑 ‘반상’, 도미니크 크렌 셰프의 ‘아틀리에 크렌’과 ‘바 크렌’, 2회차 방문이 더 궁금해지는 베누까지. 가고 싶거나 다시 가고 싶은 장소를 샌프란시스코에 남겨뒀고, 아쉬움은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줄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다(It All Starts Here, San Francisco)’는 도시의 슬로건처럼.
SSAL
샌프란시스코에서 지금 떠오르는 한식 파인다이닝을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쌀’이라고. 푸근한 미소와 요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던 배준수 셰프와 나눈 대화.
레스토랑 이름은 쌀가게 주인의 손자로, 어릴 적 쌀을 갖고 놀던 추억을 담아 지은 것으로 알고 있다. 쌀이 추구하는 방향이 궁금하다. 랍스터성게죽, 숯불갈비, 훈제 굴과 인절미 크루아상 등 음식으로는 거부감 없이 다가가되 내부에서는 한국적인 걸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배 작가와 서예가 출신 한재혁 작가의 작품을 걸고 전상근 작가의 달항아리를 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에 오는 손님에게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 기물에도 신경 쓰는데, 개인적으로 한식을 프랑스 접시에 담으면 요리의 성격이 희석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광주요나 놋담, 거창 유기 등을 주로 쓴다.
셰프로서 느끼는 샌프란시스코의 매력은 무엇인가? 직접 재배하고 기르는 생산자를 만나 식재료를 살 수 있다. 식당 문을 열고 나서 파머스 마켓에 가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다. 생산자와 긴밀하게 소통하면 재료에 담긴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그게 곧 요리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귤이 제철인데, 과일 파는 농부가 “여름에 우박이 많이 내려 볼품없는 게 많다”고 하면 내가 “아이스크림으로 만들 테니 싸게 달라”며 가져온다.
2022년 미쉐린 1스타를 처음 획득하고 바뀐 점이 있는지. 메인 요리로 갈비를 주로 했지만 메추리 요리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거래처에 연락해 메추리 20마리를 달라고 했더니 쉽게 주지 않았다. 미쉐린 1스타를 받고 전화해서 화끈하게 “나 전에 연락했던 배준수 셰프다. 메추리 50마리만 달라”고 하니 대표가 웃더라. 메추리를 받는 데까지 8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때부터 메인이자 시그너처로 메추리 요리를 선보이게 됐다. 포항 살 때 부모님이 맥주 한 잔하시던 ‘통나무집’이라는 식당의 훈제 치킨이 정말 맛있었는데, 거기서 영감받아 만들었다.
쌀이 운영하는 패밀리 멤버십이 인상적이다. 도입한 계기와 운영 방식이 궁금하다. 레스토랑 홍보를 잘 하지 않는다. 한 번 먹고 나서 SNS에 올리고 끝이 아닌,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싶다. 멤버십을 이용하는 고객은 대부분 여유 있는 이가 많고, 장시간 식사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애피타이저를 원하지 않으면 메인 요리만 내어주거나, 200달러만 받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메뉴를 구성하는 등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식을 베이스로 한 레스토랑이 동서부 등 캐주얼・파인을 막론하고 미국 전역에 생겨났다. 많은 선택지 가운데 쌀은 어떤 식당이 되고 싶은지. 뉴욕에서 ‘아토믹스’를 보며 한식 붐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샌프란시스코에도 그런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 이곳에 재팬타운,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코리아타운은 없다. 내가 50대쯤 됐을 때는 코리아타운이 생기면 좋겠다. 미식으로 각광받는 도시에서 한식 셰프로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