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라는 새로운 미디엄
커다란 화면 위에 선과 점, 면이 차곡차곡 쌓이며 풍경이 드러난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고향 요크셔의 자연이다. 주머니에 작은 수첩을 넣어 다니며 주변 풍경을 그렸던 그는 칠순이 넘어 아이패드 펜슬을 손에 쥐었다. 그린 과정을 재생할 수 있는 아이패드의 특징을 이용해 종종 스스로 그린 방식을 확인하는 ‘드로잉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이 개인적 경험을 지금 서울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호크니가 직접 참여한 몰입형 전시로 화제가 된 런던의 ‘라이트룸’을 그대로 들여온 ‘라이트룸 서울’이다. 최근 1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몰입형 전시는 쉬운 오락거리가 되어버렸다. 차별점없는 콘텐츠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관람객도 늘고 있다. 이번 호크니의 전시 역시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는 평도 있지만 생존 작가가 직접 전시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갤러리현대가 개입한 점에서 기존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호크니는 시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를 놓치지 않고 작업에 이용해왔다. 사진, 복사기와 팩스, 폴라로이드 필름, 컴퓨터 프로그램, 아이폰을 거쳐 아이패드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초대형 스크린과 고화질 프로젝터까지 표현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것을 보면 그가 이 또한 미술의 새로운 표현 매체, 즉 미디엄(medium)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술에 기술의 스펙터클을 더한 것만으로 관람객이 놀라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리움에서 전시 중인 필립 파레노는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하고 목소리를 전달하는 등 AI로 전시장 전체를 연결한다. 63빌딩에서는 AI에게 데이터를 학습시켜 추상적 이미지를 생성한 작품으로 유명한 레픽 아나돌의 신작을 전시한다. 공학을 전공한 신교명 작가는 스스로 그림 그리는 AI 화가 ‘이일오’를 개발해 함께 활동한다. 이제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강이연 작가는 NASA와 협업한 작품 ‘Passage of Water’를 유엔기후변화 협약에서 발표했다. 담수 부족의 심각성을 알리는 직관적 영상은 세계 각국에 경종을 울렸다. 데이터는 말할 수 없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예술의 힘이다. 또 권하윤 작가의 신작 ‘잊어버린 전쟁’에서는 기술을 매개로 역사와 기억의 사각지대를 발굴한다. 작가는 수년간 수집해온 자료로 잊혀진 사건을 재구성했고, 실감 나는 VR로 제작했다. 기기를 쓰고 어둠 속에서 만난 인물의 손에 내 손을 포개면 오래전 그가 본 것이 내 눈 앞에 재생된다. 타인의 기억을 내 것처럼 경험하는 사이, 사건에는 여러 개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로는 이렇게 기술이 아날로그적 경험을 만들고 공동체를 회복하도록 이끈다.
이제 예술과 기술 사이에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
아니 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하다. 기술이라는 도구를
손에 쥐고 얼마나 더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지,
더 통찰력 있는 작품을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호크니 전시에 이어 국내 작가와 협업한 작품을 라이트룸 서울에서 선보이고 싶다는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는 “중요한 건 언제나 새로운 미디엄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다. 이제 예술과 기술 사이에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 아니 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하다. 기술이라는 도구를 손에 쥐고 얼마나 더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지, 더 통찰력있는 작품을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기술의 그늘 아래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어쩌면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서로를 연결하는 히든 카드 역시 기술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 디스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인간은 자주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SNS가 우리를 연결 짓는 동시에 단절시켜 개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것처럼, 기술을 손에 쥔 채 욕망에 흔들린다면 예술의 소통 능력을 무너뜨리고 미래를 망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는 늘 약간의 기지와 조금 더 많은 긍정을 가지고 스스로 망친 것을 재건하며 여기까지 왔다.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멸망시키기는커녕 추상화의 또 다른 국면을 열었듯이 나는 기술이라는 미디엄 앞에서 조금 더 희망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싶다.
김지연
미술비평가.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 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다. <마리나의 눈>, <필연으로 향 하는 우연> 등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