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로, 정채연
정채연은 후회하는 시간마저 소중하다고 말한다.
내 속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행복 또한 휘발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 없으니까요.
늦어서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인터뷰를 시작하기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아니에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인터뷰니까, 시간이 좀 걸려도 괜찮아요. 화보 촬영이 있는 날엔 마음을 비우기도하고요.
인터뷰로 대화 나누는 시간을 좋아하나요?
좋죠. 사실 인터뷰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돌이켜보는 과정을 좋아해요. 평소 생각과 관념이 어떻게 글 안에서 그려질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일상에서참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거든요.
에디터인 저로서는 너무 모범 답안인데요.
진심이에요. 실제로도 그렇게생각하는데.(웃음)
MBTI 유형이 ISFJ라면서요.
생각과 걱정이 많은 타입이라고 하더군요.그러니까요. 그런 점이 득이 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나를 비워서 살기 위해 노력해요. 누구나 살다 보면 단순한 모습으로 지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즉흥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는 부담감 같은 게 있나요?
반반인 것 같아요.(MBTI) 뒷자리 글자가 ‘J’지만 일상에서는 즉흥적으로 행동할 때가 더많거든요.(웃음) 오히려 일할 때 J처럼 행동해요. 이미 본 스케줄을 다시한번 확인하기도 하고요.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게 마음 편해요.
오늘 화보 촬영은 어땠나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촬영에 온종일 정신없었을 텐데요.
아니요! 처음 진행해보는 콘셉트라 무척 즐거웠어요. 물론 이전 화보도 즐겁게 촬영했지만,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한것 같아 더 뜻깊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좀 더 다양한 얼굴을 그려보고 싶어요. 여태껏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얼굴이 더 많잖아요.
혹시 배우로 자리 잡은 뒤 더 분위기 있다는 말을 자주 듣나요? 혹은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거나.
그런가요? 나는 그대로인데. 점점 여자가 되고 있나 봐요.(웃음) 헤어나 메이크업 선생님들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요. 물론 모니터링하면서 ‘나한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싶은 부분은 많았죠. 그런 의미로, 가끔 일상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 큰 감사함을 느껴요. 예를 들어 양치질할 때나밥 먹을 때 내 모습을 보진 않잖아요. 그런데 배우가 되면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할 수 있거든요. 돌이켜보면 참신하면서도 즐거운 일이에요.
그러고 보면 배우라는 직업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나조차도 몰랐던 얼굴까지 가꿔나가야 하는 직업이니까.
어렵죠.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그것을 감당하고 이겨낼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도, 집에서 모니터링할 때도 형언할 수 없는 성취감이 있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앵글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해요. 어떻게 하면 좋은 얼굴을 그려나갈 수 있을지연구하고 공부하는 거죠.
연기자로서 행보에 대해 스스로 의심해본 적은 없나요?
당연히 있었죠. 사실 그 기간이 꽤 길었어요. ‘내가 연기를해도 되는 사람이 맞는 걸까?’ 하는 질문을 자주 한 것같아요. 어릴 때부터 연기자가 꿈이었지만, ‘어쩌면 나는 배우라는 직업에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러다 KBS2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어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거창한 개념은 아니에요. 이거 재밌다, 조금 더 해보고 싶다, 이 세계를 아직은 놓치고싶지 않다. 이런 소박한 진심이 배우 생활에 전념해야 한다는 확신을 준 것 같아요.
의외네요. 차근차근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만큼 별다른 의심이 없을 줄 알았거든요.
전혀요. 좋은 모습으로봐주는 건 감사하지만, 아직은 (연기자로서)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예라고 생각해요. 아, 확신을 갖게 된데에는 이런 마음도 작용했어요. 작품을 나 혼자 만들어가는 게 아닌 만큼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몸을 던져야겠다는 다짐. 촬영장에서 스태프나 다른 배우들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어내야죠.
그 노력이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나 봐요. <연모>속 정채연의 역량을 눈여겨봤다는 의견이 많아요.
감사할 따름이죠.(웃음) 첫 사극인 만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요. 퓨전 사극이지만, 조선시대 말투나 격식을 드러내야 했고요. 이전에도 작품에 임할 때마다 즐거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곡점이 된 작품은 아무래도 <연모>인 것같아요.
좋은 출발점이 된 tvN 드라마 <혼술남녀>는 어땠나요? 그때의 털털한 연기는 두고두고 회자되던데요.
사실 어린 나이에 다양한 활동을 할 때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잠을 많이 못 자던 시기였던 것만 기억날 정도로요.(웃음) 하지만 팬 사인회에 가면 팬들에게 재미있게 봤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그것만으로도 제겐 더없이 값진 작품이죠.
그러고 보면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지금까지 쭉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잖아요. 갑작스러운 여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나요?
사실 저도 2년 가까이 공백기가 있었어요. 지인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더라고요. 사실 공백기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제게는 오히려 좋은 의미로 다가왔어요. 잘 쉬었다는 느낌이랄까.
공백기에 마음을 다스리던 비결이 있나요?
너무 어릴 때부터 연예 활동을 시작해서인지 잠시 마음 놓고 쉰다는것 자체가 제겐 큰 위안이었어요. 생각도 정리하고, 뜸하던 사람들도 만나고. 그런 일상적 휴식을 취한 거죠. 그 와중에 새로운 취미 활동도 즐겼어요. 배우고 싶던 베이킹 학원에서 소규모 클래스에 참석했거든요. 좀 더 내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 것 같아요.
내 속을 들여다본다는 표현, 참 와닿네요.
그렇죠?(웃음)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수 없잖아요. 그때 이후로 저는 조금씩이라도 쉬어가는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야 내 안의 행복 또한쉽게 휘발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할 수 있거든요.
최소한의 행복을 이루려면 필요한 것이 있잖아요.
후회하는 시간도 행복에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죠.
공백기에 후회하거나 힘들어하는 연예인도 여럿 봤어요.
그 부분도 공감해요. 저도 처음에는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죠. 하지만 공백기 이후의 삶을 계획하는 시간 또한 소중한 것 같아요. 평소에는 그런 깊은 고민에 빠지는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한 단계 한 단계 설정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천천히 발견해가는 거죠.
그렇게 발견한 정채연은 어떤 사람이던가요?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이요. 행복에 대한 기준점이 낮다고 해야 할까요. 평소에도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끼는 편이에요. 그래서 쉽게 울컥할 때도 있지만, 금방 잊고 새롭게 움직일 수 있어요. 이런 성격이 부족하더라도 연기 생활을 펼쳐나갈 수 있는 요인 같아요. 제게는 좌절하고 고민하는 시간 또한 소중하거든요.
좌절하고 후회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고민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맞아요. 돌이켜보면 그것도 행복에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최소한의 행복을 이루려면 필요한 것이 있잖아요. 복잡하면서도 심도 깊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결국 그만큼 단순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만약 몸을 3일 정도 바꿀 수 있다면 우리 집 반려견을 선택하고 싶다. 이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가 있을까 궁금하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 ‘평소 마음을 비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웃음)물론 그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우리 집 강아지 ‘양치’의 단순한 성격이 참 마음에 들어요.산책을 해도 행복하고, 양배추 간식을 먹어도 행복하고,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도 행복해하잖아요. 행복에 대한 기준이 낮은 것도 있지만, 큰 욕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아이인 거죠. 집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부러울 때가 많아요.
2018년 넷플릭스 드라마<첫사랑은 처음이라서>부터2022년 MBC 드라마 <금수저>까지 쭉 주연을 맡아왔어요.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부담감보다는 책임감이 크죠. 부족한 제게 큰 기회를 주셨으니 그만큼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평소에도 목표 자체는 크게 잡지 않는 편이에요. 객관적 수치의 목표가아니라, 뭔가 보이지 않는 나만의 성취감 같은. 괜히 목표를 높게 설정하면 제 성격상 자책하고, 결국 제 안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신에 대한 관대함보다는, 그 자리 자체를 즐겨 보겠다는 의지로 들리네요.
맞아요. 어떻게 보면 당연히 부담감을 느낄 만한 자리지만, 배역에 몰입하다 보면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라고 믿어요.
아까 채연 씨가 말한 ‘연기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까지 번져간 듯해요.
그런가 봐요. 나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어주겠어요. 사실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많이 떨리고 긴장도 되지만, 사람은 성장할수 있는 존재잖아요. 그 과정에서 당연히 실수도 할 수 있고요. 이번에 못 했으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 하는 마음입니다.(웃음)
연기자로 데뷔한 지 어느덧 7년 차예요. 스스로 작품 보는눈이 생겼다고 생각하나요?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맡았던 작품의 역할들에 좋은 피드백을 주셨지만, 그것을 미리 판단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요즘엔 여러 대본을 읽고 분석하면서 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이 무엇인지 천천히 찾는 중이에요.
연기 활동을 하면서 점점 깊어지는 것이 있다면요?
좋은 답변이 될지 모르겠지만, 사람과 그 관계에 대한 이해도요. 연기에 한해 말하는 건 아니에요. 살다 보면 참 많은 사람을 마주하게 되잖아요. 연기 또한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조명하니까요.
화면 속 채연 씨는 왠지 고고해 보였는데, 오늘은 새로운 모습을 많이 접하는 것 같아요.
가끔 듣는 말이에요.(웃음)저는 뭔가 대단한 것보다는 삶의 작은 가치를 중요시하거든요.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하고요. 그래서 나만의 시간이 중요해요. 스스로를 감싸고 응원할 수 있는 시간. 뭐든 오래,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요.
스물다섯 살이죠. 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뻔한 대답일 수도 있지만, ‘나’ 그리고 ‘경험’요. 참 많은 일이 일어난 만큼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직 어려서 더 불안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선택을 믿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렇다면 배우로서 남은 20대는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지난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작품, 역할을 접하고 싶어요. 하나만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어요. 너무 많아서.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대본을 읽는데, 아직 못 해본 역할이 많더라고요. 우리 회사 팀장님에게도 매일 말하다시피 하고 있어요. 20대가 끝나기 전까지 많은 걸 해보고 싶다고요. 제 말에 질렸을지도 몰라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