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ING LINES
수직과 수평이 직조한 알바니아의 지평선.

이탈리아와 그리스섬을 즐겨 찾던 전 세계 부유층이 이제 알바니아의 아드리아 해안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남부의 사란더와 크사밀은 ‘유럽의 몰디브’라는 별칭을 얻었고, 해변 도시 두러스는 2024년 방문자가 전년 대비 180% 이상 늘었다. 더불어 블로러 마리나, 두러스 요트 & 마리나 건설을 비롯한 인프라 업그레이드는 알바니아가 ‘가성비 여행지’에서 ‘호화 여행지’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때 공산주의 독재 아래 폐쇄적이던 이 나라는 지금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 흐름은 건축계에도 불을 지폈다. 숨은 비경과 장대한 자연,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품은 알바니아는 건축가에게 매혹적인 무대로 거듭나고 있다. OODA 공동 설립자 디오구 브리투는 “알바니아에 관여하지 않은 영향력 있는 건축가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NOA의 루카스 룽거 역시 “알바니아의 건축적 진화는 빠르고, 수직적이며, 다원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유수의 건축 스튜디오가 최근 공개한 청사진을 보면, 기하학적 형태와 대담한 색채 팔레트가 두드러진다. 이는 알바니아의 역사와 풍토를 고스란히 담아낸 결과다. 레고 블록을 연상시키는 외형은 석회암 산악과 협곡이 급격히 솟아오르는 고유의 지형을 존중하며, 자연과 공생하려는 설계 철학에서 비롯했다. 그리고 강렬한 색채는 티라나의 공산 시대 건축물을 선명한 색으로 칠했던, 과거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 ‘잿더미에서의 부활’을 꿈꾸며 시도했던 프로젝트가 오늘날 알바니아 전역에 생기를 불어넣는 흐름으로 확장한 것이다. 변모하며 색을 입어가는 아드리아 해안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미리 들여다본다.
붉은 미로 | 리카르도 보필
모르스 코르넬리스 에셔의 초현실적 작품을 닮은 미로 같은 건축물은 2025년 말 완공을 앞두고 있다. 리카르도 보필 건축이 알바니아 해안 도시 드르미에 설계한 레드 솔 리조트로, 강렬한 붉은색과 픽셀을 연상시키는 구조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총 1만2750m2 규모의 단지는 19채의 빌라와 20세대 아파트로 구성된다. 멀리서 보면 정사각형 박스를 연속 배치한 형태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복잡한 경로와 입체적 구조가 얽힌 미로가 펼쳐진다. 사각 매스가 들쭉날쭉 솟아오른 모습은 완만하게 굽이치는 알바니아 특유의 지형 리듬을 그대로 따른 결과물이다. 이 디자인은 리카르도 보필의 1970년대 대표작 ‘라 무랄라 로하(La Muralla Roja, 붉은 벽)’에서 영감받았다. 동시에 카스바(kasbah, 전통 이슬람 요새 건축)에서 착안해 요새형 구조로 완성했는데, 이는 외부와의 차단을 넘어 건물 간 연결성과 다채로운 조망점을 제공한다. 단지 곳곳은 외부 계단, 다리, 보행로를 촘촘히 연결해 공용 공간과 숙박 공간을 유기적으로 묶는다. 건물 전반에는 테라스, 야외 수영장, 울창한 정원을 배치했고, 바다를 향해 곧게 뻗은 계단 끝에서는 푸른 하늘과 수평선, 주변 녹지가 액자 속 풍경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 넣은 집 | 오펜하임 건축
잘레 만(Jale‥Bay) 절벽 위에 직선미가 돋보이는 리조트가 들어선다. 잘레 만 개발 프로젝트에 포함된 네 채의 빌라 중 하나로, 오펜하임 건축이 설계한다. 태초의 거친 땅 위에 매끈하게 다듬어진 매스가 놓이며, 절벽과 건물은 강렬한 대비 속에서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스튜디오는 ‘땅과 함께 짓는다(Building with the Land)’라는 철학 아래 지형을 인위적으로 평탄화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절벽선에 맞춰 건물을 끼워 넣는 방식을 택했다.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바위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섬세하고 다양한 질감이 드러난다. 주재료는 현장 타설 콘크리트로, 거푸집과 철근 위에 부은 콘크리트가 굳으며 형태를 완성한다. 외벽에는 알바니아 전통 자수에서 영감받은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자연의 거친 질감과 인공의 정교함이 한 표면에서 맞부딪치게 했다. 실내와 외부 경관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넓게 뚫린 개구부를 통해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으며, 측면으로는 거친 암벽이 드러난다. 절벽 끝에 길게 돌출된 캔틸레버 풀은 하늘과 바다 가운데서 수영하는 듯 황홀감을 선사한다

오펜하임 건축은 빌라 설계만 맡은 게 아니다. 블로러 비치 어반 개발, 티라나의 뉴 불러바드 타워, 파노라마 힐탑 리트리트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통해 블로레 해안가의 풍경을 새롭게 그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구시가지와 소다 숲, 새로 조성한 마리나 사이에 들어설 8만 9320㎡ 규모의 블로러 비치 어반 개발 프로젝트는 레고 블록을 층층이 쌓아 올린 듯한 외형으로 눈길을 끈다.

지그재그 | JA 주버트
“건축은 땅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그 땅에 응답해야 한다.” JA 주버트 건축이 잘레 만에 리조트를 설계하며 내세운 철학이다. 부지의 형태를 억지로 깎거나 메우기보다는 원래 지형 속으로 건축을 스며들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서 영롱한 바다와 황금빛 모래, 풍부한 해양 생태계를 목도한다면 그 풍경에 감히 손댈 수 없음을 절로 깨달았을 테다.
리조트는 가파른 절벽 경사를 따라 ‘지그재그’ 형태로 배치된다. 각 유닛이 다른 유닛의 시야를 가리지 않아 모든 투숙객이 탁 트인 전망을 누릴 수 있다. 직선으로 뻗은 테라스와 수영장은 바다와 산세를 한 화면에 담으며 건축과 자연을 유려하게 이어주며, 인피니티 풀은 해안선과 시각적으로 맞물려 바다와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동선은 직관적이고 간결하다. 테라스, 정원, 수영장을 오가는 수직 이동은 끊김 없는 보행로와 경사형 케이블카(푸니쿨라)가 맡아, 지형 훼손없이 층간 접근성을 높인다. 외벽은 현지에서 조달한 베라트 석재로 마감했는데, 내구성이 강한 이 돌은 자연스레 변색·풍화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건물과 땅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