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유행곡
유행은 고전음악에도 유효할까.

얼핏 들으면 ‘클래식 음악’과 ‘유행’이라는 두 단어는 공존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과연 꼭 그럴까? 현재 필자는 미국 작곡가 윌리엄 볼컴의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을 연습하고 있다. 최근 유튜브 채널에서 이 곡을 심심찮게 추천하며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양인모의 연주 영상은 롱플레이 버전까지 포함하면 현재 800만 뷰를 기록 중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에 대한 관심이 다소 낯설던 작곡가 볼컴의 음악을 유행곡으로 만든 셈이다. 클래식 장르의 특성을 고려하면 ‘우아한 유령’은 1970년에 작곡한 곡이기에 아주 뒷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많은 이가 명상 트랙으로 애청하는 에릭 사티의 ‘짐 노페디(Gymnope’die)’ 경우도 짚어보자. 1980년대만 해도 이 작곡가나 작품에 대한 인지도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앞서 말한 볼컴과 달리 사티는 거의 160년 전 사람이다. 명백한 뒷북이란 얘기다. 솔직히 1993년에 상영한 <101번째 프로포즈>에서 문성근이 김희애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이 곡을 연주하기 전까지는 대부분 에릭 사티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늦게 불붙은 에릭 사티의 인기는 또 다른 불을 지폈다. 그의 왈츠 ‘난 널 원해(Je te veux)’가 침대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그를 명실공히 가장 힙한 클래식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 밖에도 드라마, 영화, CF 등 영상 매체에서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하면서 급작스럽게 지명도를 얻는 클래식 음악은 많다. 영화 <플래툰>에 삽입된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수많은 시네아스트에게 영감을 준 말러의 ‘아지에토’ 등 쉽게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무대로 메인스트림에 오른 라흐마 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도 임윤찬이 연주하기 전, 영화 <샤인>에 삽입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음악이라는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장르는 어쩔 수 없이 영화나 드라마, 광고 같은 이해하기 쉬운 내러티브에 얹힐 때 대중에게 훨씬 쉽게 와닿는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방법으로 깜짝 유행하기도 한다. 2년 전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품 ‘알레그로 D장조’ 악보가 발견되어 조성진의 초연으로 전 세계에 발표되면서 ‘모차르트 신곡’이라는 신드롬이 잠깐 일어났다. 이듬해 또 다른 모차르트의 실내악곡 ‘아주 작은 밤의 음악’이 발견되었고, 얼마 후 쇼팽의 ‘짧은 왈츠 A단조’ 악보가 또 발견되면서 클래식계가 잠깐 시끌벅적했다. 물론 언급한 세 곡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 있는 곡으로 부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곡들이 워낙 규모가 소소한 작품이라 클래식 팬에게 즐거운 해프닝 정도로 기억될 만한 수준일 뿐 지속적으로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이보다는 훨씬 유의미한 유행이 일어나기도 한다. 러시아 작곡가 블라디미르 바빌로프가 위작으로 발표한 카치니의 작품 ‘아베마리아’가 좋은 예다. 물론 이 작품도 본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바로크 작곡가 줄리오 카치니의 이름으로, 즉 가작 형태로 발표했다는 이벤트 자체가 인지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이 곡은 앞서 말한 세 곡의 소품과 비교할 때 여전히 자주 무대에 올려진다. 또 1992년 소프라노 던 업쇼와 런던 신포니에타의 음반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는 잘 기획한 클래식 앨범 하나가 어떻게 하나의 명곡을 발굴해내는지 보여준 좋은 예다.
클래식 시장 자체가 워낙 침체된 지금, 대중매체를 이용해서라도 명맥을 유지하는 현실에 부정적 시선을 던질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제한적인 가두리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은 늘 경계해야 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베토벤 ‘월광 소나타’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베토벤은 단 한 번도 루체른 호수 위에 떠 있는 달빛을 상상하고 그 곡을 쓴 적이 없다. 그저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루드비히 렐슈타프의 감상이었을 뿐이다. 그 감상평 하나 때문에 지금 전 지구인은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달빛을 떠올리는데, 사실 이는 베토벤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세상에 알리는 의무는 오늘날 연주자에게 가장 무거운 숙제일 것이다. 그들만이 전혀 왜곡 없이 음악을 청중에게 순수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살균된 영매’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호로비츠라는 20세기 최고 피아니스트가 없었다면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남긴 555개의 보석 같은 건반 소나타를 우리는 몰랐을 것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없었다면 피아노홀릭인 나 같은 사람도 알캉이라는 작곡가의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직관한 임윤찬의 통영국제음악제-골드베르크 무대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그가 서주처럼 연주한 ‘Round and velvety-smooth blend…’(신예 작곡가 이하느리(19)가 작곡한 5분여짜리 소품)를 통해 이하느리라는 천재 작곡가와 같은 땅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시대를 앞서기 마련이다. 가끔 운좋게 시대를 잘 만나서 생전에 영화를 누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대부분 예술가는 동시대에 이해받기에는 너무 이른, 최전방, 아방가르드, 그 어딘가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그들의 결과물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유행을 탄다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불가피한 현실일 수도 있다.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요한 세바스찬 바흐라는 서양음악의 알파-오메가 같은 존재를 우리는 아예 몰랐을 것이다. 이는 멘델스존이 남긴 수많은 걸작과 맞먹을 만한 또 다른 멘델스존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김영욱 SBS 예능국 PD, <피아노홀릭>을 발간했으며, 유튜브 채널 ‘피아노홀릭’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