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번역가 6인이 한국 문학을 이해하는 방법
프랑스, 미국, 캐나다, 러시아, 아르헨티나 번역가 6인이 말하는 초월번역 이야기.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피에르 비지우 번역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일은 늘 즐겁지만, 내겐 도전적 과제이기도 하다. 특히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번역할 때는 깊은 고민과 이해가 필요했다. 그의 문체가 매우 섬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 만큼 문장의 감정을 다른 언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집에 존재하는 광원은 내 앞의 촛불뿐이었다. 저 그림자가 생기려면 촛불과 벽 사이로 새가 날고 있어야 한다”는 문장은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뿐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이 얽힌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 그 미묘한 질감을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가장 중점적으로 둔 요소는 문장에 드러나는 모호함과 그 불명확한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꿈이 될 수도 있고, 꿈이 될 수도 없는 장면. 죽은 자들의 그림자가 울부짖는 과거, 불가능한 현실. 이렇듯 복잡한 세계를 그대로 전달하려면 어떤 면에서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번역 과정에서 함께 작업한 최경란 선생님이 여러 번 구절을 낭독해줘 서로 의견을 조율했고, 그 덕분에 원작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를 최대한 살릴 수 있었다. 한국문학을 번역하면서 가장 큰 고심은 문장의 질감을 살리는 일이다. 그 질감이 한국문학의 힘이라고 믿는다. 우리를 저 멀리 데려가 다른 존재에 눈뜨게 할 줄 아는 것. 한강 작가의 저서 네 권을 프랑스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며, 그의 밀도 있는 세계를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하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피에르 비지우(프랑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를 포함한 15권 이상의 한국 소설을 번역했다. 특히 지난해 최경란과 함께 번역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유하 <무림일기>, 니콜라스 브라에사스 번역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일은 문화적 변화와 역사적 흐름을 모두 이해하는 과정이다. 유하의 <무림일기>는 특히 그 복합성이 배가된 작품이다. 1980년대 한국을 무협 장르의 시선을 통해 다루고, 동음이의어와 복잡한 언어적 뉘앙스를 갖춘 만큼 이 문화에 대한 근원적 이해가 필요했다. 39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라는 문장을 접하며 이 소설의 전개가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무협 장르’라는 문학적 구조를 이용해 한국사를 재해석하는 그의 작가적 역량이 놀라웠다. 한국문학을 접하다 보면 이런 사회적·문화적 흐름을 하나의 장치로서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작품이 많다는 걸 느낀다. 이전에 번역한 이상의 <오감도>, 강경애의 <강경애 단편문학>,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등 모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계급적, 성(性) 문화적 사건을 주제로 다룬 만큼 한국문학의 실존주의적이고 대담한 힘을 깨닫곤 한다. 본래 한국문학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문 출판사를 열게 되었다. 언젠가는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번역가로서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
니콜라스 브라에사스(아르헨티나)
한국의 영화와 문학 세계에 빠진 뒤 고국 아르헨티나에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 ‘화랑’을
설립했다. 이상의 <오감도>,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등 다양한 작품을 번역했으며, 소규모 한국문학 워크숍과 세미나도 개최하고 있다.
이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마시 카라브레타 칸시오 벨로 번역
이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와 세 번째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공동 번역한 것은 삶의 큰 전환점이었다. 번역가이자 시인 최돈미 선생님의 멘토링을 받으며 번역이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시 속의 시’를 발굴하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번역은 정확한 사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적 도약을 해야 한다”라는 이원 시인의 조언이 그 깨달음을 뒷받침한다. 원작의 감성을 정확하게 살리면서도 언어 간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에 삽입된 시 ‘철, 컥, 철, 컥’에서는 구문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스타일이 신선하고도 도전적이었다. 이 시의 쉼표는 시각적 및 문법적 ‘스타카토’를 만들어 산문시의 전통적이고 유동적인 형태를 강조하고 시간의 흐름을 조종한다. 하지만 영문 속 쉼표 효과는 한국어보다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기에 시공간을 파괴하는 이 느낌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이 컸다. 그래서 여러 번 문장을 되뇌고, 쉼표를 통해 멈춰야 할 구간이 어느 곳인지 머릿속에 형상을 구상하며 작업했다. 이렇듯 서양 문학의 전통적 형태와 다른 한국문학을 접할 때, 그 특성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살리고 영미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나는 비록 어릴 때 한국어를 배우지 못했지만, 한국문학과 언어적 세계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한국문학을 더 많은 미국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한국계 여성 시인들이 국제적으로 과소평가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영어로 대변하는 일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마시 카라브레타 칸시오 벨로(미국)
고은지와 함께 번역한 이원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통해 ‘2022 한국문학번역상’ 번역 대상을 수상했다. 2015년 도널드 홀 시문학상, 2016년 플로리다 북 어워드에서 동상을 수상한 <아워 오브 옥스 (Hour of the Ox)> 저자이기도 하다.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키릴 바티긴 번역
지난 10년간 동양학 분야에서 40권 이상 책을 번역해왔지만, 한국문학을 접하게 된 건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국문학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완벽한 창구가 되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미국에서 처음 출간한 영미 소설이다. 그렇기에 작품 자체는 일제강점기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내 번역 업무는 한글이 아닌 영문을 러시아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리아 오세트로바, 안나 세미다는 내가 한국과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영미 소설임에도 다양한 한국 단어(이를테면 ‘인연’처럼)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만큼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소설 속 한국 문화의 정서를 투명하고 직관적으로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번역하며 다뤄온 내 중국어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 번역하면서 가장 신선했던 문장은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라는 도입부였다. 두 가지 의미를 갖춘 단어 ‘꿈’을 번역하는 데 고민하던 기억이 난다. 잠자는 동안 꾸는 실제 꿈과 마음속 이상이나 환상을 의미하는 꿈. 이 두 단어의 차이를 러시아어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웠고, 고심 끝에 ‘꿈’의 핵심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복합성을 따져볼 때 번역이란 단순한 언어적 변환을 넘어 원작의 핵심적 감정과 메시지를 보다 섬세하게 옮기는 작업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의 수많은 작업물 중에서도 <작은 땅의 야수들> 은 다른 언어로 쓰일 때도 한국적 은유의 힘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키릴 바티긴(러시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옌의 <탄샹싱(Sandalwood Death)>을 비롯한 40권 이상의 영어 및 중국어 소설과 논픽션을 작업했다. 그는 처음 접한 한국문학 <작은 땅의 야수들>의 러시아판 번역을 맡아 ‘2024 톨스토이 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김이듬 <히스테리아>, 제이크 레빈 번역
각 작품의 고유한 특성과 뉘앙스를 해석하며, 그 언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은 번역가의 의무다. 김경주, 김민정, 김이듬 등 다양한 한국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며 한국 시인과 영미권 독자를 잇고자 노력해왔다. 특히 김이듬 시인의 <히스테리아>는 번역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작품이다. 이 시집은 날카로운 심리적 요소와 함께 한국 소수자, 특히 여성 인권에 대한 과감한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 그중 ‘시골 창녀’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논개의 시점에서 쓰인 시로, 한국 사회의 기생과 그에 대한 편견을 반영하면서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나는 지금 지방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는 마지막 구절을 번역하면서 오랜 시간 고심했다. ‘천기’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에 소외받았던 진주 기생 문화를 배워야만 했다. <히스테리아>는 블랙 코미디 장르 특유의 직관적이고 유쾌한 방식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이러한 한국문학의 창의적이고 다채로운 표현 방식에 여전히 큰 흥미를 느낀다. 김이듬 시인과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 시인으로 김민정·김행숙 등이 있지만, 서로 비슷한 점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한국문학의 섬세한 표현 방식과 사회적 메시지를 영미권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늘 고민한다.
제이크 레빈(미국)
시인, 번역가,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12권 이상 책을 저술· 공저·번역 또는 공동 번역했으며, 출판사 ‘블랙오션’의 달나라 한국시 시리즈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가 2020년 공동 번역한 김이듬 시인의 <히스테리아>를 통해 미국문학번역가협회가 주관하는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상했다.
황정은 <연년세세>, 재닛 홍 번역
본래 꼼꼼한 성향이지만, 한국문학을 대할 때는 더 오랜 기간 글과 씨름하게 된다. 앙꼬 작가의 그래픽 노블 <나쁜 친구>를 번역할 때는 한국 특유의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표현하기 어려웠고, 한유주 작가의 <불가능한 동화>를 번역할 때는 실험적 구성과 종종 반복되는 말장난을 자연스럽게 번역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작품은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다. 가족 내 세 세대 여성의 사회적 트라우마가 주제인 만큼 한국인이 아닌 독자들도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 슬픔의 본질을 찾기 위해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한편 <연년세세>를 번역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제목의 사자성어가 담고 있는 정서적 깊이를 영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연년세세’라는 사자성어는 여러 해가 거듭해 이어진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윗사람의 안부를 묻는 편지글 끝 혹은 축복을 빌거나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Year after Year’, ‘Year by Year’ 또는 ‘Every Year’ 같은 번역이 가능했지만, 이 사자성어의 깊이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고 느꼈다. ‘Years and Years’라는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복수형 ‘years’의 사용과 반복적 표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and’를 사용함으로써 좀 더 확장된 느낌을 주었고, 수평적이면서도 수직적인 의미를 동시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 번역은 좋은 친구이자 뛰어난 시인, 번역가인 잭 정님이 제안했다). 또 영문 출판사에 한자를 내지 속지에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했는데, (한자를) 읽지 못하더라도 이 표현의 신비와 깊이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닛 홍(캐나다)
밴쿠버에서 활동하는 작가이자 번역가.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 번역으로 영국작가협회가
주관하는 TA 퍼스트 번역상과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다. 김금숙의 <풀>과 마영신의 <엄마들> 번역으로 ‘하비상’ 최우수 국제도서 부문에서 두 차례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