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생경한, 유연석과 로에베의 만남
익숙한 이름 유연석, 낯선 얼굴 유연석.
어제 일본 팬 미팅을 마치고 귀국했다고 들었다. 틈틈이 관광도 했나?
팬 미팅 끝내고 3일 정도 개인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여행을 가도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보다는 맛있는 음식 먹고, 분위기 좋은 바에서 술 한잔하며 충전하는 편이다.
<운수 오진 날>의 혁수는 좀 떨쳐냈는지. 주목도 많이 받고, 강렬한 캐릭터라 여러모로 여운이 길게
남았을 것 같다.
캐릭터에 함몰되는 편이 아니라 그동안에는 역할에서 헤어 나오려고 특별히 노력할 건 없었다. 그런데 <운수 오진 날>은 좀 빨리 털어내고 싶었다. 찝찝하고 불길한 악몽을 꾸기도 했고, 워낙 강렬한 캐릭터라 촬영 끝나자마자 환기시키려고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유연석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쭉 봤다. <운수 오진 날>은 유연석이 가장 빛난
작품이겠다 싶었는데, 동의하나? 물론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안정원도,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도 여전히 입에 오르내릴 만큼 큰 사랑을 받았지만.
연쇄 살인마 혁수는 내가 한 작품 중 가장 강렬한 캐릭터인 건 확실하다.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새로웠다’, ‘섬뜩하다’ 등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더라. 사석에서 만난 어떤 분은 웃으며 인사만 했는데도 섬뜩하다고 하더라. 잔상이 있었나보다. 연기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만큼 배우에게 뜻깊은 일이 있을까. 나 역시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도전한 캐릭터라 그런 피드백을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
필감성 감독은 왜 유연석을 선택했을까?
특정 작품을 보고 선택한 것 같진 않다. <늑대 소년>, <화이>에서의 악역 연기나 <미스터 션사인>의 구동매처럼 강렬한 연기를 좋게 보셨다고 했고, 근래 보여드린 선한 이미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의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 선택이 통했다.
타이밍적으로도 좋았다. 직전 작품이 <사랑의 이해>와 <멍뭉이>였고, 대중에게 착한 의사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보니 이미지 변신이 극대화된 것 같다.
혁수 캐릭터 제안이 왔을 때 고민 없이 바로 응했나?
물론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를 포함해 이정은 선배님, 이성민 선배님 모두 캐스팅 1순위였던 걸로 안다. 두 분 모두 응한 걸 보면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뜻 아닐까. 특히 혁수 캐릭터가 상당히 독특하고 기괴하지 않나. 배우로서 확실히 탐나는 캐릭터다. 또 성민 선배님이 출연한다고 하니 더 욕심이 생겼다.
내심 자신감도 있었나 보다.
사실 걱정보다 기대감과 설렘이 컸다. 희한하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보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기보다는 함께하는 선배님들과 감독님을 믿은 것 같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혁수라는 캐릭터도 살았고, 작품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두 선배와 실제 호흡을 맞춰보니 어땠나?
두 분 모두 젊은 배우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무엇보다 후배 배우가 최상의 연기를 펼치고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다. 아이디어도 주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더라. 자신의 캐릭터를 열정적으로 만들어내는 모습도 멋있었고.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장면 장면이 살더라. 그런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자극받게 된다. 배우로서 열정, 선배로서 애티튜드 등.
대본을 보면서 특별히 끌린 부분이 있었나? 인상적인 대사를 보면 빨리 현장에서 연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배우도 있던데.
웹툰에서 혁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맑게 웃으면서 자신의 살인담을 이야기하는데,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되게 기괴했다. 미묘하고 섬세한 그 감정선을 연기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웹툰 속 혁수와 유연석의 혁수는 외모적으로 싱크로율이 높은 건 아닌 듯하다. 혁수를 극으로 끌어
오면서 취한 것과 버린 것이 있다면?
일단, 혁수의 곱슬머리는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개구리처럼 큰 눈이 특징인데, 혁수의 기괴함과 광기, 천진난만함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부분은 내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포인트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 주근깨로 표현했다. 사실 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보니 최대한 연기로 살려보고자 했다.
퍼즐 폴드 토트백 모두 Loewe.
태피스트리 블랭킷 모두 T.T.A
참 감사하고 다행인 건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택했다는 거다.
배우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다.
연차가 쌓이면서 이따금 찾아오는 매너리즘이 그 새로움을 통해 좀 극복이 된다.
매운 핫바를 먹는 장면을 포함해 직접 아이디어를 낸 신이 꽤 있었던 걸로 안다. 평소 작품을 할 때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편인가? 아니면 이번 작품에서 유난히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나?
사실 크게 아이디어를 낸 건 없다.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을 위해 감독님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사이코패스이면서 무통각증 환자라는 설정까지 더해진 친구인데, 그 캐릭터를 이해시키기 위한 고민을 많이 했다. 매운 핫바를 먹는 장면도 무통각증 설정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제안한 거고, 여느 배우가 그렇듯 캐릭터가 살도록 의견을 나눈 정도였다.
파트 1부터 2까지, 모든 장면이 긴장감 넘쳐 흡입력이 상당했다. 이 작품을 보고 ‘연기 파티’라는 말도 돌더라. 개인적으로 특별히 만족도가 높은 신이 있나?
비닐하우스에서 혁수가 호스로 오택의 목을 조이는 장면이 있다. 그때 오택을 설득하기 위해 혁수가 내뱉는 대사와 신이 가장 걱정스러웠는데, 찍고 나서 보니 혁수의 특징이 잘 담긴 것 같더라. 개인적으로 혁수의 소름 끼치는 모습이 확 살았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또 성민 선배님이 컷 중간중간 웃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해주신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다.
혁수는 극에서 악랄한 인물이지만, 배우 유연석에게만큼은 선물 같은 존재 아닐까? 혁수가 유연석에게 남긴 선물을 꼽자면?
흠, 뭐가 있을까. 평점을 말할 순 없고. 아! 앞으로 40대를, 아니다. 나이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언급하게 되네. 아무튼, 답을 드리자면 새로운 얼굴? 배우로서 또 하나의 마스크를 얻은 느낌이다. 과거에도 악역을 연기했지만 이상하게 선하고 반듯한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각인 되어 있는 것 같다. 그걸 깨고 싶어 이 작품을 선택한 건데, 나도 벽 하나를 부순 것 같아 뿌듯하다.
시청자 리뷰에도 ‘유연석의 가능성을 봤다’는 평이 많더라. 차기작 선택에 대한 부담도 있겠다.
나쁜 놈만 아니면 된다. 사실 뭐든 기회가 주어지면 연기를 할 거지만, 기왕이면 선하든 달달하든 혁수와 다른 이미지면 좋을 것 같다.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어느 정도. 강박까지는 아니고, 부담감이라고 해야 하나. 해보지 않은 캐릭터에 대한 욕심이 있다. 기존 이미지에서 계속 탈피하고 싶고, 그런 캐릭터를 찾는 것 같다.
데뷔 21년 차인 데다 꽤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는데, 아직도 그런 갈망이 있다니.
배우라면 끊임없이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있을 거다. 솔직히 이번엔 정말 신나게 연기했다. 꼭 악역이라 그런 건 아니고, 혁수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연쇄 살인마의 얼굴뿐 아니라 고등학생, 자상한 남편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았다. 시도해볼 게 많고 좀 더 과감하게 해도 될 것 같은 인물이라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같다.
생각보다 진취적인 사람인 것 같다. 촬영 중 말수가 적고, 차분한 이미지라 소극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안 해본 것, 안 먹어본 것,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모험심도 많다.
하이웨이스트 생지 데님 팬츠, 블랙 슈즈 모두 Loewe
하이웨이스트 생지 데님 팬츠, 스웨이드 슈즈 모두 Loewe.
목공, 캠핑, 골프, 사진, 요리 등 취미 부자인 것도, 오프로드 주행을 즐긴다는 말도 이제 좀 납득이 간다. 에디터처럼 사람들이 오해하는 평소 유연석의 모습이 있나?
주위에서 뭐든 딱 부러지게 할 것 같다는 말을 듣는데, 생각보다 허술하다. 하루를 30시간처럼 살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데 늘어져 있을 때도 많다. 갈수록 여유를 갖고 계획 없이 살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도 있다.
공백기 없이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꾸준히 활동해서 그렇게 느끼나 보다.
계획했던 건 아니다. 뮤지컬도 한 편 하고, 드라마도 한 편 하고, 이러다 보면 1년이 훌쩍 지나더라.
그러다 데뷔한 지 20년이 훌쩍 흘렀고.
어떻게 20년이나 연기를 했나 싶다. 초등학생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는데, 배우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10년은 어떤 성과도 바라지 말고 연기에 나를 내던져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불안감이나 조급함 같은 건 크게 없었다. 특별히 목표로 하는 지점이나 바라는 것 없이 딱 10년 동안 주어진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원 없이 해봐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때는 나도 내가 20년 뒤에 배우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10년이 됐을 때 어땠나?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10년을 더 달렸나?
10년 차에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를 만났다. 얼마나 행운인가. 좋은 작품을 만나고, 그 작품에서 긍정적 에너지를 얻었기에 지금까지 배우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데뷔작인 영화 <올드보이>도 벌써 20년이 됐다.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그렇게 됐다. 그때 스무 살이었다. 연기 학원 다닐 때 <올드보이> 의상팀으로 일하던 친한 누나가 오디션 정보를 알려줬다. 당시 지원자 중 또래가 많았는데, 그나마 내가 연기를 잘해서 캐스팅된 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유지태 선배와 많이 닮아서였더라.(웃음) 어쨌든 운 좋게도 그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고, 나의 데뷔작이 된 것 자체가 참 감사한 일이다. 데뷔 10주년, 20주년이 되면 볼 기회가 종종 있는데, ‘내가 참 운이 좋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년 전 미소년 얼굴도 참 생경하더라. 본인도 과거의 유연석을 볼 때 새삼 새롭거나 아쉬운 부분이 있나?
아무것도 모를 때인데, 그래도 잘했다 싶다.(웃음) 지금 다시 그 연기를 하라면 그만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니, 할 수 없을 거다. 뭣 모를 때라 순수하게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리면 그게 장애물이 되기도 하더라. 오히려 뭣 모를 때 도전도 하고, 과감해지는 것 같다.
맞다. 연기 테크닉은 늘었을지 모르지만, 감정과 표정 등 그 나이에만 표현 가능한 게 분명히 있다. 스무 살의 유연석은 할 수 있지만, 마흔 살의 유연석은 할 수 없는 것.
연기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 게 있나? 일에 대한 설렘이나 열정이 좀 사그라들 나이기도 하지 않나?
아무래도 젊은 시절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참 감사하고 다행인 건,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택했다는 거다. 배우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다. 연차가 쌓이면서 이따금 찾아오는 매너리즘이 그 새로움을 통해 좀 극복이 된다.
플라워 태피스트리 블랭킷 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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