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油)턴하는 자동차 브랜드
최근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 대부분이 전기차 개발 및 생산 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자동차 회사들이 전기차 전환에서 슬쩍 발을 빼는 진짜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닐까.

최근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 대부분이 전기차 개발 및 생산 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폭스바겐은 전기차와 관련해 투자금 100억 원을 줄였고, 메르세데스-벤츠는 2030년 모델 라인업을 전부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계획을 절반으로 하향 조정했다. 당연히 각 브랜드의 전기차 관련 전략 및 제품 계획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령 미니는 영국 옥스퍼드 공장에서의 전기차 생산 계획을 전면 보류했다. 영국 브랜드 미니의 전기차가 앞으로도 계속 중국산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울러 마세라티는 MC20의 전기차 버전 ‘MC20 폴고레’의 개발 계획을 완전히 취소했다. 모기업인 스텔란티스의 투자 철회에 따른 결정이다. 안 그래도 라인업이 빈약한 마세라티가 경쟁사의 비약적 전동화를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고성능 V8엔진을 하이브리드 직렬 4기통으로 완전히 대체하겠다는 전략을 수정했다.
자동차 회사들이 전기차 전환에서 슬쩍 발을 빼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간 발목을 잡던 규제가 느슨해져서다. 그들이 지금까지 전기차를 앞다퉈 개발한 건 글로벌 주요 시장의 여러 정책 때문이다. 아직 실효성이 없는 ‘내연기관 완전 판매 금지 법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약 15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ZEV나 중국의 NEV 같은 기준이 문제다. 꽤 오래전부터 자동차 회사들이 내연기관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해선 일정 비율만큼 전기차도 함께 팔거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런데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면서 이런 규제들이 힘을 잃었다. 새로운 미국 정부는 전기차 의무화 및 보조금 지원 폐지를 선언하고, 파리기후변화협약까지 탈퇴하며 화석연료 회귀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게다가 유럽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유럽연합(EU) 입법 기구인 유럽의회는 이미 지난해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인 유로 7을 확정하며 내연기관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자동차 선진국’의 이런 움직임은 자국 산업 보호에서 비롯된다. 미국이 조금 더 노골적일 뿐, 유럽도 결은 비슷하다. 요즘 ‘독 3사’ 자동차의 품질과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느꼈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다. 레거시 자동차 브랜드들은 전동화 및 자율주행 기술 개발 등에 투입되는 연구개발비를 현재 판매하는 제품에서 충당하고 있다.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을 절감해 연구개발(R&D)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중국의 저가 전기차 때문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자동차 회사와 기존 자동차업체의 사정은 다르다. 중국회사들은 백지상태에서 전기차에 집중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산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투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적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이상 내연기관에 맞춰 몸집을 부풀려온 기존 완성차업체보다 당연히 유연하고 빠를 수밖에 없다. 사실 이는 자동차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태양광·풍력발전 등 친환경과 관련한 신사업은 이미 중국 기업이 장악했다. 이쯤 되면 미국과 유럽의 결정도 어느 정도 이해된다.
물론 자동차 산업이 이대로 퇴보하진 않을 것이다. 인류는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재해를 목격했고, 전동화가 필수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이미 전기차의 장점도 직접 경험했다. 당분간 하이브리드나 주행거리 연장 전기차(EREV) 같은 혼합 내연기관이 득세하겠지만, 결국 우리는 전기차 세상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지금의 시장 흐름은 ‘기술적 조정’ 쯤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무서운 이야기다. 각 정부가 억지로 벌어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레거시 자동차 기업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니까.
류민 평론가 겸 콘텐츠 기획자. <자동차생활>, <모터트렌드>를 비롯한 여러 자동차 언론 매체에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