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인간일까
낯선 시대 속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위그와 뮤익의 작품을 경유하며 묻는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인가?

우리는 신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기술을 개발하고, 자연을 정복하며, 생명의 법칙마저 바꾸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현실은 신의 전능함과는 거리가 멀다. 지구는 우리의 의도와 달리 점점 더 뜨겁게 끓어오르고 해수면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바람에 실려오는 더위와 추위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고, 짙은 먼지는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인류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신이 되는 것은 확실히 실패했다.
스스로 초래한 기후변화 위기는 물론 인공지능 (AI)과 생명공학의 발전까지 더해지며 인간이 우월한 존재라는 근대 개념마저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동물과 식물, 그리고 사물과 기계가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규정지을 수 없을뿐더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마저 흐려지는 시대에 이르렀다. 다가올 미래에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손에 쥐어야 할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지금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피에르 위그의 전시 <리미널>은 바로 이 흐릿해진 경계를 눈에 보이게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 ‘휴먼 마스크’에서는 긴 머리 가발과 사람 가면을 쓴 원숭이가 보인다. 이 원숭이는 원래 후쿠시마의 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도록 교육받았는데, 동일본 대지진으로 지역이 폐허가 된 이후에도 그곳에 홀로 남아 있다. 이것은 인간인가, 동물인가? 신작 ‘이디엄’에서는 보테가 베네타와 협업해 만든 황금색 마스크를 쓴 퍼포머들이 유령처럼 전시장 안을 걸어 다닌다. 마스크에 부착된 센서가 실시간으로 미지의 목소리를 생성하고, 인간의 육체는 단순한 운반체가 된다. 영국의 문화평론가 마크 피셔가 저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말했듯이,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했던 것이 낯설게 변할 때 더욱 기이한 감각이 느껴진다. 위그의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연출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그동안 믿어온 질서를 새롭게 바라본다.
한편 4월 14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론 뮤익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열린다. 그는 위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조망한다. 뮤익은 핏줄이나 주름까지 눈에 띌 정도로 극사실적인 인간 조각을 만들고 신체 크기를 왜곡함으로써 낯선 감각을 자아내왔다. 그의 대표작 ‘Boy’에서 소년의 불안한 표정과 5m가 넘는 과장된 신체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존재의 위태로움을 느끼게 하며, 작가의 아버지를 실물 크기보다 훨씬 작게 만든 ‘Dead Dad’에서는 죽음이라는 생명의 유한함과 인간의 물리적 한계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이토록 연약한 존재다.
예술이 우리가 알던 경계를 허물듯, 과학 역시 우리의 신념을 무너뜨려왔다. 현대의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진화생물학은 우리 인간이 유전적으로 다른 생물과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음을 밝혀냈다. 우리는 특별하지도, 유일하지도 않다. 거대한 생태계 흐름의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그 너머의 진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아직 모른다는 것. 이것이 부족한 생명체인 우리가 알아낸 전부다. 이제야 맞이한 낯선 시대 속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위그와 뮤익의 작품을 경유하며 묻는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인가? 그렇다면 우리를 여전히 인간으로 머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세계의 변화는 필연적이고, 우리의 존재 또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그럼에도 아직 ‘인간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낯설고 두려울지라도 스스로를 성찰하는 용기, 서로의 연약한 손을 잡는 온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다가올 미래에 우리는 어떤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아직 선택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김지연 미술비평가.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다. 책 <등을 쓰다듬는 사람>, <마리나의 눈>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