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합치’ 마이키타와 박서보 화백의 만남
삶에 스며들어 의미와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좋은 물건과 예술은 닮아 있다.
합치하는 서로를 통해 새롭고도 선명한 세계를 마주한 마이키타와 박서보 화백의 만남.
안경을 좋아하는 이들과 안경의 물성에서 오는 순수함, 독창적 미학, 혁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독일의 아이웨어 브랜드 마이키타와 설립자 모리츠 크루거(Moritz Krueger)다. 마이키타가 추구하는 독자적 방향성은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때로 고집스럽다 느껴질 만큼 흔들림 없는 이 철학이, 많은 것이 수시로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업계에서 오히려 오랜 마니아와 새로운 고객층 모두에게 신뢰받는 이유가 되어준다.
2003년 모리츠 크루거가 설립한 마이키타는 독립적 생산 방식을 개발하며 기존 안경 산업의 틀을 깨고 독자적 길을 걸어왔다. 특허받은 공학 기술과 숙련된 장인정신을 결합해 개인의 얼굴에 완벽히 안착하는 착용감과 긴 수명으로 명성을 얻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여전히 베를린에 위치한 마이키타 하우스에서 모든 제품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방식에는 일관된 기조와 철학을 유지하지만, 진보를 이루기 위해 전방위적 분야에 걸친 협업과 창의적 교류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마이키타가 혁신적 아이디어와 예술적 영감을 담는 하나의 컬트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지난 1월 뮌헨에서 마이키타 2024 신제품 컬렉션 발표 이후 주목받은 박서보 1 of 0 아티스트 에디션. 고(故)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 작품에서 상징적 색을 접목한 리미티드 에디션이자 2023년 91세로 타계하는 순간까지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이어간 박서보 화백의 마지막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 특별한 컬렉션을 소개하기 위해 마이키타 설립자 모리츠 크루거가 한국을 찾았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10월 어느 날, 연희동 박서보재단에서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간 박서보의 손자이자 박서보 재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지환과 모리츠 크루거를 만났다.
마이키타는 분야를 초월한 창의적 교류를 중시해왔습니다. 박서보 화백과의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박지환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마이키타 안경을 즐겨 착용하셨습니다. 언젠가 파리에서 함께 거리를 걷던 중 할아버지가 마이키타 광고판을 가리키며 “독일 최고 안경 브랜드다”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두터우셨죠. 이런 오랜 인연이 자연스레 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1년여의 시간에 걸쳐 컬렉션을 완성했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남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안경에 대한 애착을 갖고 계셨습니다. 단순히 시력을 교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디자인과 기능이 조화를 이룬 물건으로서 의미를 두셨고요. 모리츠 크루거(이하 M. K) 박서보 작가는 미술계의 전설적 인물입니다. 특히 그의 단색화에는 독창적 철학과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마이키타가 추구하는 미학과 연결됩니다. 협업은 마치 운명이자 오랫동안 비워진 퍼즐 조각을 맞춘 듯 자연스럽게 이뤄진 셈입니다.
거리나 시차 한계는 어떻게 극복했나요?
M. K 박서보 화백의 작업과 철학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시작한 일이기에 물리적 제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 초반부터 그의 작업을 면밀히 연구했고, 이를 통해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었죠. 드로잉부터 알루미늄 프로토타입까지 과정에서 박서보 화백은 늘 열정적으로 피드백을 전했습니다. 그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놀랄 만큼 신속하고 효율적이었어요. 예컨대 프로토타입을 보내면 2~3일 안에 답변을 받을 수 있었죠. 그의 독창적이고 정교한 시각 역시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 특히 안경 윤곽과 프레임 곡선, 가벼운 착용감에 대한 세심한 요구 사항이 놀라웠어요. 늘 절제의 미학을 강조하며 디자인을 최소화하되 안경의 본질을 극대화하려는 그의 철학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작품에서 색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안경에 담긴 세 가지 색상은 어떻게 선정했나요?
박지환 할아버지는 자연의 색이 사람에게 치유 도구가 될수 있다고 믿으며 늘 자연에서 영감받은 작품을 남기셨
죠. 단풍에 비친 햇빛에서 영감받은 메이플 리프와 부드럽고 안정감을 주는 골든 올리브, 암석에서 영감을 얻은 차콜을 안경에 담았습니다. 특히 차콜은 프레임 안쪽에 반짝임을 반영했는데, 이는 할아버지가 늘 차콜색을 표현하실 때 조개껍데기 가루를 섞어 사용한 방식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박서보 화백이 필히 반영되길 원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박지환 저와 마이키타의 창의성에 대한 완벽한 믿음과 지지를 보여주셨어요. 중간중간 작업을 보여드릴 때마다 “그래 좋다, 좋다”라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셨죠. 한국적 정서를 담기 위해 패키징에 쓰인 한지를 직접 골라 독일로 보낼 만큼 세심하게 신경 쓰셨습니다. 원하던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는 마이키타의 기술과 정성, 완성도가 더해졌기에 여러모로 흡족해하셨어요.
M. K 박서보 화백은 안경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자신을 표현하는 연장선으로 바라보았죠. 그 철학이 제품 제작
과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세 가지 색은 각각 333개로만 출시했어요. 숫자 333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박지환 총량은 999개고, 세 가지 색은 하나의 컬렉션으로 구성됩니다. 각 색이 333개인 이유는 보통 333장을 기준으로 판화를 제작하기 때문이죠. 안경에도 이런 판화적 개념을 담아내고 싶었거든요.
안경 제작에서 장인정신은 어떤 의미이며,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박지환 할아버지는 예술과 공예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특히 안경처럼 사람과 함께하는 물건은 정성이 깃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평가하셨고요. 장인정신이 깃든 물건은 단순히 기능만이 아니라 삶에 스며들어 의미를 더하니까요.
M. K 마이키타의 핵심 가치는 장인정신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제품을 베를린 스튜디오에서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외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착용하는 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능과 감성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장인정신은 예술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사고를 확장하듯 장인
정신이 담긴 제품은 사용자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죠.
안경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박지환 할아버지는 명품의 진정한 가치를 확실히 알고 계셨어요. 단순히 브랜드를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장인정신을 존중하셨죠. 이는 예술가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이키타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브랜드였고, 평소에도 제품을 즐겨 착용하셨습니다. 특히 가벼움과 독창적 디자인에 매료되셨죠.
M. K 안경은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물건입니다. 디자인과 기능의 균형이 결국 핵심이죠. 이름만을 좇기보다
는 전문성이 담긴 제품을 선택하길 권합니다. 그들이 만드는 안경은 착용감과 소재의 품질, 각 개인의 개성을 품을 수 있는 디자인을 고심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착용했을 때 ‘나의 일부분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제품이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궁극적으로 수명이 긴 안경을 쓰는 것도 중요하죠. 단종되면 부품을 찾기 어려운데, 모든 부품이 교체 가능한 제품이라면 오랜 시간 쓰면서도 환경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