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ociety 안내

<맨 노블레스>가 '디깅 커뮤니티 M.Society'를 시작합니다.
M.Society는 초대코드가 있어야만 가입 신청이 가능합니다.

자세히보기
닫기

북 바에선 매일 새 이야기가 쓰인다

그중 주인이 나눠준 한 조각.

조용하고 씩씩한 손님들

나는 카페에 가면 항상 구석 자리에 앉는다. 주인과는 음료 주문 시 필요한 대화만 나누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머문다. 카페는 내게 군더더기 없는 작업 공간일 때 가장 편하다

조용한 단골손님들은 주로 그 자리에 머문다. 여기서 조용함이란 목소리의 데시벨이 아니라 대화의 부재를 뜻한다. 이들을 위해 만들어낸 소소한 운영 원칙은, 사이드 바에 앉은 분들에겐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불필요한 시선을 차단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업자들. 그들의 등을 보며 나는 한 사람의 씩씩함이란 뒷목께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피즈’도 조용하고 씩씩한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매번 진 피즈를 주문해서 내가 붙인 이름이다. 피즈는 초저녁 즈음 방문해 노트북 앞에서 골똘히 생각하다 막차가 끊기기 전 돌아가곤 했다. 그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하루에 두 번, 진 피즈를 주문할 때와 물 한 잔 부탁할 때뿐이다. 이마저도 내가 알아서 물을 가져다주면서 절반으로 줄었다. 때는 팬데믹 시절,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막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개미 한 마리 없는 초고에 그가 첫 손님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사장님을 독점하네요.” 피즈는 고정석을 벗어나 바 테이블에 가방을 풀며 말했다. 피즈에게 느끼던 내적 친밀감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기쁘면서도 걱정되었다. 말을 트게 되었으니. 이제 피즈는 안색이 좋지 않을 때나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 초고를 찾지 않을 것이다.

피즈는 바 테이블에 늘 사람이 많아 앉지 못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바 테이블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얼마간의 대화로 그가 미국 대학원 입시를 준비 중이라는 것, 매일 초고에 와서 공부하는 게 자신과의 약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의 진도는 진척이 없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데 난감한 항목을 만났다고 했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가 무엇인지’였다. “사장님은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가 뭐예요?”

“저, 제가 선생님을 동안으로 본 걸 수도 있는데요. 우리가 뭔가 대단한 실패를 하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나요?” 가장 큰 실패라니. 얼마나 영악한 질문인가. 작은 실패를 큰 실패로 썼다간 엄살로 여겨질 것이며, 설사 큰 실패를 겪었더라도 곧이 곧대로 썼다가는 책잡힐 게 뻔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실패 대신 작은 실패, 그러나 자랑할 만한 실패를 찾아보기로 했다.

피즈는 승마를 잘 배우지 못한 것과 조별 과제를 망친 것을 말했고,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자 다짐하지만 매번 늦잠 자는 것을 말했다. 귀여운 실패들이다. 주택 차고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을 미래의 스티브 잡스들을 누르고 합격하려면 좀 더 자극적인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그러다 손님 없는 홀을 보며 어쩌면 초고를 시작한 게 나의 가장 큰 도전이자 실패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완전히 실패하진 않았지만, 실패의 길목에 있다고. 그러나 내 앞에서 골몰히 작업하는 한 사람을 보면 매일 작은 성공의 씨앗을 줍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열심히 궁리했지만, 그날 우리에게 별 소득은 없었다. 달라진 점은, 그 대화를 계기로 피즈가 ‘조용한 단골’과 ‘조용하지 않은 단골’군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소처럼 사이드바에서 작업하다 뭔가 안 풀릴 때면 바 테이블로 와서 의견을 구했다. 이를테면 “사회의 다양성을 위해 어떤 기여를 했나요?”, “자신의 가치를 시험에 들게 한 사건이 있나요?” 이런 질문들 앞에서 피즈는 자주 자신의 평범함을 낙담하곤 했다. 글을 쓸수록 자기 삶이 밋밋하게 느껴진다며.

어느 때부터인가 피즈는 초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 그가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한참 후였다. 피즈는 어디로 갔을까? 바라던대로 대학원에 합격해 미국으로 갔을까? 그의 평범한 성실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말해주고 싶다. 언젠가 어떤 손님이 내게 이런 상황에도 참 씩씩하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그 말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매일 넘어져도 일어나는 게 씩씩한 거라고. 마냥 밝은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밝히려는 게 씩씩한 거라고. 그런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피즈를 기다린다. 언젠가 피즈를 만난다면 그가 어떤 실패를 썼는지 묻고 싶다. _ 김연지 문학살롱 초고 대표

찾아온 슬픔

어느 날 한 연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동네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반색하더니 공간을 쭉 둘러봤다. 대개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렇듯 음료를 주문하고 서가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 듯했다. 익숙한 방문객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 주문서로 두 권의 도서를 주문한 뒤 가게를 떠났다. 당시 철물점에서 물건을 사면 주는 명세표처럼 손님이 원하는 도서를 주문서에 적고 건네면 가격을 적어 돌려주고, 도서가 도착하면 문자를 보내주는 시스템이다. 얼마 뒤 SNS에 누군가 앙투앙북스를 태그했다는 알림이 떴다. 서가의 책을 찍어 올린 사진이었다. 감사를 표하고 북 바 계정에도 담아왔다. 사진을 본 지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 게시물 의 주인이 사진 속 책 중 하나인 <슬픔의 방문> 장일호 작가라는 것이다. 지인은 그 책을 내게 선물해준 이였다. 서점을 운영하지만 편협하게 소설만 읽는 내게는 책도, 작가의 이름도 생소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우쭐해졌다. 사교적이지 못한 나는 이후 몇 차례 작가의 방문을 알았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가 주문한 책을 수령하러 왔을 때도, 또다시 책을 주문하고 받으러 왔을 때도 알은척하지 않았다. 이유 모를 우쭐함만 커질 뿐이었다. 옹졸하게 문학만을 읽는 나는 아직도 그 책 내용을 모른다. _ 김영준 앙투앙북스 대표

서른 살 생일

흐르던 노래가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려던 찰나, 적막함 사이로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앉은 손님이다. 이윽고 그 는 내게 쪽지를 건넸다. ‘오늘의 와인이 맛있어서 한 잔 더 마시고 싶 어요. 휴지 몇 장도 더 주실 수 있나요?’ 호주산 시라즈 와인 한 잔을 따르고 넉넉히 휴지를 챙겨 그에게 향했다. 읽다 뒤집어놓은 책이 눈 에 들어왔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고요한 포옹>이다. 나도 아끼는 책이다. 산문집에는 ‘정신을 차리고 싶어 술을 마시는 자는 없다. 흐트러지고, 위안을 얻고, 잊고, 기억하고, 놓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용기를 얻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술은 ‘잠시’라는 영원의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라는 구절이 있다. 고요한 공간에서 혼자 술 한잔 마시며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내면에 깊이 빠져든다. 박연준의 산문집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 손님의 취향과 맞닿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번 더 쪽지를 건넸다. ‘혼자 위스키를 마시는 건 처음이에요. 잘 몰라서 그런데 한 잔 추천해주세요.’ 무얼 내어갈까 고민하다 부드러운 오크 향과 스파이시함이 맴도는 놉 크릭 버번을 꺼냈다. 마감 시간이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쪽지 대신 엽서를 받았다. 늘 생일을 함께 보내던 오랜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혼자 생일을 보내며 위로를 받고 간다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술과 책이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듯 책, 익다도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란다. 좋은 사람들이 술과 책을 나누며 오래오래 익어가는 공간 말이다. _ 전유겸 책, 익다 대표

멀고도 가까운 관계

책바를 운영한 지 올해로 9년이 됐다. 지금보다 반 정도 작은 연희동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지난해 여름 망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한 책바는 손님들과 소통하기도, 각자 사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모임을 하기에도 너끈하도록 만든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단골 손님 중에는 5년 넘게 인연을 이어가는 분도 꽤 많다. 얼굴만 익숙했던 S는 처음 방문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이름을 알게 됐는데, 먼저 물은 것도 아니고 순전히 예약 시스템 덕분이었다. 예약 시스템은 4년 전쯤 찾아오는 이들이 보다 편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서울 동쪽에 살고 있어 주로 주말에 이곳을 방문한다. 언제나 첫 잔은 1984.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를 읽고 영감받아 만든 시그너처 칵테일로, 아드벡과 안티카 포뮬라, 아페롤 그리고 압생트가 들어간다. 묵직한 스모키 풍미에 달콤함과 씁쓸함이 느껴지는 칵테일이다. <1984> 엔딩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끄덕일 만한 맛이다. 그는 다음 잔으로 피트 위스키를 찾는다. 라프로익과 아란 마크 리무어를 주로 마시며 동시에 책을 읽거나 아이패드로 글을 쓴다. 나는 그의 신상을 잘 모르지만 취향은 뚜렷이 기억한다. 멀고도 가까운 관계, 이 모호한 인연이 오늘도 책바를 찾는다. _ 정인성 책바 대표

에디터 김지수 사진 표기식 디지털 에디터 변상윤
LUXURIOUS BOLDNESS ARCHIVE CHIC BOLDNESS AND W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