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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 조르디 로카의 스무 가지 리추얼

 기억과 호기심을 놀이 삼아 살아가는 셰프, 조르디 로카의 달콤한 놀이.

조르디 로카(Jordi Roca)는 디저트를 하나의 창작 분야로 끌어올린 요리사다. 그가 파티시에 셰프로 있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엘 셀러 드 칸 로카’ 레스토랑은 두 차례나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 정상에 올랐고 2014년 ‘월드 베스트 페이스트리’ 셰프에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30만 명. 이만한 영향력을 지닌 요리사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엘 셀러 드 칸 로카는 요리사 부모 밑에서 자란 삼 형제가 1986년 문을 연 레스토랑이다. 맏형 조안은 요리를, 둘째 조셉은 와인과 서비스를, 막내 조르디는 디저트를 맡고 있다. 그는 디저트를 식사의 마지막 코스가 아닌 자신의 창작 언어로 발전시켜 왔다. “난 한 번도 디저트를 요리의 부차적 분야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 안에는 아직도 탐험해야 할 거대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조르디는 디저트를 파인다이닝에 가두지 않았다. 엘 셀러의 디저트를 일상에서도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 2012년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캄볼레스크를 선보였고, 초콜릿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호기심은 카카오 산지부터 발효, 로스팅, 제조까지 전 과정을 연구하는 초콜릿 아틀리에 겸 부티크 호텔 카사 카카오를 탄생시켰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집에서도 따라할 수 있는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팬들의 요청으로 ‘코사스 데 카사’ 를 시작했다. 주방 밖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실험을 담은 이 콘텐츠는 전 세계 미식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스페인 레티시아 왕비도 즐겨 보는 콘텐츠로 알려져 있다. 

3 미식과 음악 문화를 결합한 일렉트로닉 음악 페스티벌 브런치 일렉트로닉. 조르디가 호스트를 맡았다.
4 조르디의 집 거실. 프랑크 알레우의 와인으로 만든 회화와 리네 로제 모듈 소파로 꾸몄다.
5 증류소, 호텔, 레스토랑, 와인 셀러를 모은 로카 성, ‘에스페릿 로카’.
6 조르디의 첫 차 푸조 106.

조르디의 두 형은 그를 가장 대담하고,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틀을 깨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의 호기심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클래식카 랠리 ‘랠리 KH-7 코스타 브라바’에 꾸준히 출전하는 드라이버이고, 최근에는 ‘조르디 스톤’이라는 이름으로 DJ 활동을 시작했다.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분야에서 다시 초보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다. 이런 그가 지난해 9월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파라다이스시티에 머물며 올 하반기 공개할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고, 머지않아 다시 한국을 찾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일을 놀이처럼 살아가는 남자, 조르디 로카의 스무 가지 리추얼을 들여다봤다. 

7 조르디와 그의 딸.
8 로캄볼 레스크 매장 전경.
9 산트 줄리아 데 라미스 성에 자리한 호텔 에
스페릿 로카.
10, 11 플레이스테이션 30주년을 기념해 로캄볼레스크에서 선보인 한정판 아이스크림.

최고 요리 재료는 기억이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추억은 내 디저트의 가장 중요한 재료다. 사탕과 아이스크림, 오래된 책, 향수, 꽃, 흙 냄새까지. 평생 잊지 못할 요리도 어머니의 카넬론인데, 추억을 이길 수 있는 요리는 없다. 

나의 놀이터는 디저트다. 우리 삼 형제가 엘 셀러 드 칸 로카 레스토랑을 시작했을 때 각자 자연스럽게 끌리는 자리를 택했다. 조안 형은 요리를, 조셉 형은 와인을, 그리고 나는 디저트를 맡았다. 가장 나답게 놀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디저트는 기억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창작 공간이다. 그 안에는 아직도 탐험할 세계가 무궁무진하다. 

가장 아끼는 디저트는 캘빈 클라인의 ‘이터니티(Eternity)’에서 영감받았다. 향수는 내가 요리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향은 기억을 깨우는 강력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디저트 역시 먹는 순간 어떤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한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곳은 엘 셀러 드 칸 로카다. 아이스크림 브랜드 로캄 볼레스크와 카사 카카오에 이어, 지난 해에는 지로나 외곽 산트 줄리아 데 라미스 성에 에스페릿 로카를 열었다. 약 8만 병의 와인을 보관하는 셀러를 비롯해 호텔, 증류소, 전시·연구 공간까지, 우리 삼 형제가 오랜 시간 만들어온 철학과 프로젝트를 한곳에 담은 공간이다. 이 모든 프로젝트가 엘 셀러 드 칸 로카에서 시작됐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집이다. 아내이자 동료인 알레, 그리고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 비가 그친 뒤의 숲도 좋아한다. 흙 냄새와 젖은 나무, 빗방울까지. 그 풍경에서 받은 영감으로 만든 디저트도 있다. 흙을 증류하고 숲 향을 추출해 구름 같은 거품을 올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접시에 담았다. 어떤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언젠가는 그 풍경을 디저트로 옮기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받은 최고 선물은 시간이다. 시간은 누군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일 것이다.

아침은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면서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먼저 떠올린다. 잠들기 전에는 잔잔한 음악을 듣거나 책을 몇 페이지 읽는다. 하루의 리듬을 천천히 가라앉히는 방식이다.

12 조르디가 최근 장만한 혼 스피커의 드라이버 유닛.
13 1953년 시작된 ‘랠리 KH-7 코스타 브라바’ 참가 모습.

주방 밖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은 음악이다. 디제잉을 할 때 ‘조르디 스톤’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아무도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분야에서 다시 초보자가 되고 싶어 지은 이름이다. 음악은 부담 없이 실험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무엇보다 배움의 가치를 잊지 않게 한다. 음악을 만들 때도 종종 요리하듯 접근한다. 균형이 맞을 때까지 재료를 섞고, 다시 조합해본다.

최근 가장 설렌 구매는 음악 장비다. 덕분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시작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즐겨 듣는 음악은 바흐부터 에이펙스 트윈, 크라프트베르크, 다프트 펑크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어떤 장르든 진정성이 담겨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취향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음악을 찾아 듣는 편이다. 

영감은 직관과 노동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에서 만들어진다. 한 곡의 노래와 향수, 대화, 풍경, 심지어 단어 하나가 창작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조금도 낭만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다. 노동이다. 자료를 찾고, 직접 만들고, 수없이 실패한 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돌이켜보면,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번쩍이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을 견딘 끝에 찾아왔다.


4 디저트의 영감이 된 캘빈클라인의 이터니티 향수. 

창작이 막힐 때면 산책을 한다. 좋은 아이디어는 내가 무언가 찾는 행위를 멈췄을 때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창의성은 압박에 잘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운전을 하거나, 주변을 찬찬히 관찰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아이디어가 다시 자란다. 

취향과 안목을 기르는 가장 좋은 도구는 호기심이다. 그래서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전시를 보며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의식적으로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7 크라프트베르크 앨범.
8 다프트 펑크 앨범.

몰입이 필요할 때는 운전대를 잡는다. 운전뿐 아니라 요리를 하든, 음악을 만들든 그 순간만큼은 바깥의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지금에 집중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서킷에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났다. 운 좋게도 여러 랠리에 참가하며 정상급 드라이버들과 함께 트랙을 달릴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속도가 아닌 정밀함이었다. 아주 작은 차이가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요리와 비슷하다. 

내 첫 차는 푸조 106이었다. 화려하진 않아도 자유를 처음 가르쳐준 자동차다. 이후 훨씬 값진 차들을 소유하게 됐지만, 그 푸조만큼은 여전히 특별하다. 지금 가장 애정하는 차는 알파 로메오 4C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단순함이 좋다. 좋은 요리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만 남기는 일이다.

9 애정하는 자동차, 알파 로메오 4C. 

존경하는 인물은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농부일 수도, 음악가일 수도 있다. 그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과 섬세함은 큰 자극이 된다. 최근 카카오 산지에서 만난 생산자들도 그랬다.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경험은 딸의 탄생이다. 그 강렬함에 견줄 만한 감정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10 에서 바라본 지로나.
11 초콜릿 아틀리에.
12 카카오 껍질로 마감한 의 디스플레이 카트.

가장 설레는 순간은 초보자가 될 때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귀 기울이게 되고, 실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 과정이 나를 계속 성장시킨다. 다시 어린아이가 된 듯한 그 기분은 나를 들뜨게 만든다.

가장 큰 성취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남겼을 때다. 내가 받은 상이나 인정보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디저트든, 아이스크림이든, 음악이든, 혹은 그저 한 번의 미소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유머는 삶을 버티게 해주는 목발이다. 힘든 일도 웃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슬플 때는 충분히 슬퍼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울다가 웃고, 웃다가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순간은 정말 아름답다. 그래서 창작에도 늘 유희를 섞는다. 나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삼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으려 한다. 

에디터 이도연
LUXURIOUS BOLDNESS ARCHIVE CHIC BOLDNESS AND W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