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의 밤
기억하고 기록하는 밤의 노래.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라는 걸 느껴요.
그 부분이 아티스트로서 책임감과 귀결되고요.
창문에 낀 얼음 조각을 상상하며 ‘서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들었어요. 이번 촬영에서는 그 이름이 주는 분위기에서 착안해 몽환적 콘셉트를 만들어봤어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모습을 새롭게 찾은 것 같아 기뻤어요. 평소에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즐기는 편이거든요. 마음에 드는 착장도 많았고요.
지난해 12월 말 싱글 앨범 <Cinderella>를 발매했죠. 동화 속 신데렐라를 재해석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싱글 앨범이라는 특성상 최대한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고 싶어요. 정규 앨범이나 EP보다는 아무래도 자유로운 형식이니까요. ‘Cinderella’는 기존에 보여주던 곡보다 훨씬 더 팝스럽고 경쾌하죠.
작년 한 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어요. 영국 음악 전문지의 ‘NME 100’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그래미 글
로벌 스핀’에 참여하는 등 글로벌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다졌죠.
신기함의 연속이었어요. ‘정말 내게 일어난 일이 맞는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죠.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결
과였으니까. 새로운 영역을 굳혀나갈 수 있었던 건 주위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어요.
인도네시아 래퍼 워렌 휴와 협업한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 설> OST ‘Warriors’도 화제였어요. 마블의 첫 아시안 히어로물에 함께한 소회가 궁금해요.
<블랙 팬서>에 한창 빠져 있을 땐 하루 종일 사운드트랙만 들었을 정도로 마블 팬이에요. 거의 모든 시리즈를 섭렵했고요. 하지만 이번 OST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담담했어요. 희망 고문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그렇게 큰 기대는 없었는데, 음원 파일이 하나 도착했죠. 지금도 가슴 벅찬 기억이에요. 아시안 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 있었고요.
주위의 시선이 사뭇 달라졌겠어요.
아, 최근 들어 지인들에게 갑작스러운 안부 인사를 받을 때가 있어요. “카페에 갔는데 네 노래가 나오더라”, “라디오를 틀었더니 네가 만든 곡을 소개하더라” 이런 식으로요.(웃음) 그때마다 무척 감사하고 행복하죠.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외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만큼 누군가 내 노래를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어요. 이런 연락을 접할 때마다 성취감을 느껴요.
외신의 평가나 유튜브 댓글창을 보면 해외 팬들의 반응이 돋보이는 편이에요.
가사에 영어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해외팬들이 더 쉽게,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영어로 작사할 때 자연스러운 어휘나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더 노력하는 편이에요. 대중 입장에서 어색하게 들리
지 않는 게 우선이니까요. 결코 쉽지는 않죠.
많은 이가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음악을 대하는 가치관이나 태도에 변화가 있었나요?
그런 것 같아요. 사실 데뷔 앨범 를 준비할 때 더 크게 느꼈죠.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듣게 될지, 몇 명이나 듣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로 곡을 쓰잖아요. 그러다 점점 음악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고 팬들, 나아가 리스너
에 대한 시선이 사뭇 달라졌어요. 데뷔 전에는 만들고 싶은 음악에 집중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혜안이 없었던 거죠.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라는 걸 느껴요. 그 부분이 아티스트로서 책임감과 귀결되고요.
싱어송라이터는 작곡하는 방식이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하더군요. 영감을 받을 때마다 곡 작업을 하는 방식, 하루 일과 중 특정 시간에 작곡하는 방식. 그중 어떤 쪽에 속하나요?
둘 다요.(웃음). 다만 평소에는 전자 쪽에 가깝죠. 일상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마다 틈틈이 가사와 멜로디를 적어놓곤 해요. 그런 자그마한 정보가 하나둘 모여 결국 나만의 보물창고가 되는 거죠.
자작곡을 선보일 때가 많잖아요. 타인에게 의뢰받은 곡을 소화하기 어려운 순간은 없었나요?
물론 있었죠. 직접 곡을 쓸 때는 시작부터 완성하기까지 그 감정에 대한 이해와 확장이 고스란히 이어져요. 그 심도는 곡을 소화하고 표현하는 근원이 되죠. 비로소 피부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랄까. 그런 맥락에서 다른 분에게 곡을 받는 경우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요. 곡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 감정을 이해하고 덧씌우는 과정이 필수죠.
타인의 곡을 소화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감정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네요.
맞아요. 결국 투명한 마음으로 빚어내야 하는 일이니까요. 어려운 과정이지만, 자작곡과는 차별화된 부분이 있죠. 자기 복제를 하지 않기 위한 영감의 발돋움이 되기도 하고요. 비슷한 방법으로 곡을 계속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의 형식을 굳혀나갈 때가 있어요. 물론 그것이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표현 방법의 한계를 발견하는 셈이죠. 꼭 내 곡이 아니더라도 좋은 음악을 선보일 수만 있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 앞에 다가가고 싶어요.
음악을 잘하는 것과 잘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잖아요. 때론 책임감이 창작물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맞아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아티스트로서) 내 영역을 넓혔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큰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좋은 작업물을 내야 한다는 것이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그 부담감이 때론 자신을 다그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요. 결과적으로 제 음악적 역량을 높여야 좋은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데뷔할 때만 해도 곡의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체감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이제는 (가사가) 멜로디 이상의 큰 힘이 있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고 있어요.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아주 어릴 때부터요. 다만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꿈을 쉽게 말하지 못 했어요. 내가 정말 가수가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냥 겉멋이 든 걸까 고민하던 시간도 있었고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진로 상담을 하던 중 확신을 갖게 됐어요. 다른 길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 길이 아니었다면 평생 후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서리의 노래 가사에는 ‘나’와 ‘너’가 등장해 이야기를 형성하는 지점이 많아요. ‘긴 밤(feat. 기리보이)’, ‘Running through the night’, ‘Dive with you(Feat. eaJ)’ 모두 그랬죠. 두 명의 인물이지만, 결국 내면 속 대화를 가사에 그려낸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오! 이 부분을 알아봐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 추측이 정확해요. 겉보기에는 ‘나’와 ‘너’로 나뉘지만, 사실 내면의 이야기를 의미해요. 그 안에서 자아를 분열하고 화합하며 서로 다른 시선을 그려내죠.
‘Running through the night’는 특히 불안감과 우울함에 대한 상념이 인상적이었어요. 실제로는 우울한 내면을 어떻게 다독이는 편인가요?
우울함의 깊이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주로 집에서 사색하며 많이 털어내는 편이에요.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내면을 되짚어보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상한 감정도 절로 씻겨나가요.
그 감정의 깊이가 남다른 곡이 있나요?
싱글 앨범 <긴 밤 (The Long Night)>에 수록한 ‘If(CD only)’요. 제가 쓴 가사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마음에 들어요. 연인 관계를 놓지도 잡지도 못하는 상황을 녹여낸 곡으로, 복잡한 감정에 대해 심도 있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공식 앨범으로 다시 발매하고 싶어요.
아울러 서리의 음악 세계를 좀 더 깊이 접하고 싶은 이에게 권하는 곡이 있다면요?
‘Dive with you(feat. eaJ)’.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곡이에요. 발매한 곡 중 가장 밝은 메시지를 지닌 점도 특별하고요.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멜로디인 만큼 저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첫인상은 밝을수록 좋다고 하잖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