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필기구를 사랑하는 네 명의 컬렉터 이야기
빈티지 필기구를 사랑하는 네 명의 컬렉터 이야기.

서랍 속의 계절
누군가 내게 만년필을 수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쓰던 그 느린 필기의 시간. 책가방 속에 조심스럽게 넣어두던 펜 하나가 점점 늘어나 책상 서랍을 채우고 있다. 지금도 펜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는 열쇠 같은 존재다. 약 30년간 미국에 거주하며 다양한 경매 행사를 통해 빈티지 아이템을 접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1980년대 초에 제작한 레 머스트 드 까르띠에 방돔 트리니티 펜이다. 펜촉은 18K 옐로 골드로 제작했고, 미디엄 포인트로 유려한 필기감을 자랑한다. 듀퐁의 두 가지 펜은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 1970년대에 탄생한 클라시크 펜은 순수한 매력과 균형감을, 1990년대 초에 제작한 올림피오 라인 블랙 래커 & 골드 플레이트 모델은 부드럽고 풍부한 매력을 지녔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만든 레더 바운드 노트는 쓸수록 손에 길들여지는 제품이다. 무겁다는 이유로 자주 꺼내진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정성스레 펼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을, 지나간 계절을 그 속에 담아둔다. _ 조남수(빈티지 가구 숍 ‘르파비용’ 대표)

맥주 캔으로 만든 폴디드 펜, 빈티지 깃펜과 잉크통 세트,
파이롯트 ‘프레라’, 힘든 시기에 다짐을 적은 영문 필사 종이.
펜촉 끝에서 다시 태어난 나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종이를 스치는 펜촉의 감각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오랜 시간 함께한 펜들을 들여다보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떠올리는 일이 자주 생긴다. 이렇듯 손글씨는 감정과 시간을 담아내는 나만의 언어다. 첫 번째는 파이롯트 프레라 만년필이다. 이 펜에는 나의 필명 ‘백작(白作)’이 각인되어 있다. 백작은 하얀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만든다는 의미다. 필기감이 가벼우면서 섬세해 일기부터 영화 소품 작업까지 폭넓게 쓰인다. 두 번째는 브라우스 우드 펜홀더와 직접 제작한 맥주 캔 닙펜이다. 브라운 톤 펜대와 금색 닙의 조화, 그리고 업사이클이라는 제작 과정 자체가 매력적이다. ‘Do it now’라는 문장을 이 펜으로 적으며 퇴사를 결심했고, 그날 이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는 아이띵소 가죽 필통이다. 20년 가까이 함께한 이 필통은 캘리그래피를 처음 시작할 때 나만의 전용 도구로 마련한 것이고, 곳곳에 묻은 잉크 자국 하나하나마저 나에게는 초심을 일깨우는 기억의 조각이다. 네 번째는 제자에게 받은 깃펜이다. 제자의 성장을 지켜보며 더 나은 스승이 되고자 다짐하게 한, 고마움의 상징 같은 펜이다. _ 강대연(필명 ‘백작’, 캘리그래피 아티스트)

아날로그의 온기를 쥐다
필기구는 그저 책상 위에 놓여 있으면 무생물일 뿐이지만, 손에 쥐는 순간 감정이 깃든 도구가 된다. 모든 것이 빠른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라는 윤활유가 여전히 이 세계를 부드럽게 굴리고 있다고 믿는다. 문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책을 여러 권 쓰기도 했다. 사진 속 글귀는 저서 <문구 뮤지엄>의 만년필 섹션 리드문으로 적은 것이다. 만년필을 쉽게 접했다가 금세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데, 진정으로 가까워지기 위해선 식물을 키우듯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진 속 가운데에 위치한 다이얼로그3 만년필은 바우하우스 철학을 기반으로 한 라미에서 독일 디자이너 프랑코 클리비오가 디자인한 펜이다. 보디를 비틀면 펜촉이 부드럽게 등장하는 트위스트 메커니즘, 팔라듐 피니시의 단정한 외형, 14K 투톤 골드 닙까지. 국내 발매 전 직구로 들일 만큼 반한 제품으로, 필사나 감사 편지를 쓸 때 자주 꺼내 든다. 크레인앤코는 미국 출장 중 만난 브랜드로, 250년 전통의 코튼 페이퍼 전문 회사다. 손끝에 닿는 따뜻한 질감, 뛰어난 잉크 표현력, 내구성까지 두루 갖췄다. 보르톨레티 잉크 블로터는 잉크의 번짐을 막아주는 아날로그 감성의 도구다. 편지를 마무리할 때 마지막 도장을 찍듯 굴려주는 작은 의식 같은 존재다. _ 정윤희(작가, 저서 <문구는 옳다>, <문구 뮤지엄>)

하루를 여는 잉크 한 방울
아침마다 차를 마시며 펜과 잉크를 고른 뒤 글귀를 적는 시간은 내 하루의 작은 출정식이다. 그래서 만년필은 내게 ‘자유의 칼자루’ 같은 존재다. 손으로 쓰는 느림과 불편함은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인(茶人) 센노 리큐의 말처럼 이 느린 과정 자체는 삶의 방식이 된다. 아날로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고도화되어 우리 앞에 돌아오고 있다. 각각의 필기구는 내게 그런 타임리스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파리에서 우연히 경험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가와 빛, 고딕미술에 매료된 후 러시아정교회의 이콘화에 빠져 앙코라의 키릴 알파벳 한정판을 구매했다. 몬테그라파와 알베르 2세 재단이 협업한 환경보호 한정판 만년필에는 하와이 라니카이 해변에서 만난 바다거북과 그 신선한 공기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 만년필을 볼 때마다 마치 바다와 맞닿는 듯한 느낌이 든다. 김동기 선생님께 선물받은 스티퓰라의 피노키오 한정판 만년필과 필사본도 소중하다. 만년필 전문가인 선생님은 피노키오 이야기를 직접 필사해 보내주셨고, 그 노트는 지금도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_ 양승혁(건축 분야 법률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