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난 거장의 차고, 이안 칼럼의 디자인 프로젝트
다시 깨어난 거장의 차고, 이안 칼럼의 디자인 프로젝트.

이안 칼럼(Ian Callum)은 자동차 디자인 역사에서 가장 견고한 이름 중 하나다. 애스턴 마틴 DB7과 뱅퀴시, 재규어 XK와 F-타입을 거친 그는 수십 년간 ‘영국식 그란 투리스모’의 선과 균형을 세공해왔다. 한 시대의 아이콘을 만들어낸 디자이너이지만, 지금 그가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 영광과는 다른 결에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건 디자인 하우스 ‘칼럼(Callum)’에서 또 다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칼럼의 차고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 차들이 즐비하다. 재규어 E-타입, 애스턴마틴 뱅퀴시, 그리고 마그레이브 미니. 모두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움을 덧입는다. 이안 칼럼의 디자인 세계에서 자동차는 과거 유물이 아닌, 현재를 증명하는 조형물이 된다.


CALLUM E-TYPE
칼럼 E-타입, 미래의 선으로 다듬은 전설
1960년대 영국을 상징하는 명차로 꼽히는 재규어 E-타입. 페라리 창립자 엔초 페라리가 생전에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라고 칭송한 이 실루엣을 지금 다시 그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칼럼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그가 지난 5월 새롭게 선보인 E-타입은 절제된 미학을 보여준다. 크롬 장식을 걷어낸 매트 그레이 차체는 금속 본연의 밀도를 드러내고, 슬림한 헤드램프와 테일램프, 그리고 과거 와이어 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구경 휠이 조화로운 균형을 만든다. 낮게 웅크린 차체에는 여전히 ‘재규어’라는 이름이 지닌 날렵함과 긴장감이 살아 있다. 실내는 디지털 감각과 아날로그의 물성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계기반은 디지털로 바뀌었지만, 토글 스위치와 5단 수동 기어 노브에서는 여전히 재규어 특유의 손맛을 느낄 수 있다. 트윈 파이프 배기구는 이 차량이 전기차가 아닌 전통적 엔진의 울림을 품은 모델임을 드러낸다. 아직 양산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디자인 콘셉트카지만, 만약 누군가 제작을 의뢰하면 칼럼은 언제든 실제 도로 위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과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미래 기술로 이어갈 것인가.’ 전동화로 향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칼럼의 E-타입은 재규어가 잃지 말아야 할 감각이 무엇인지 조용히 상기시킨다.

JAGUAR C-X75
재규어 C-X75, 영화 속 환상을 현실로
2010년 파리 모터쇼에서 공개된 C-X75는 재규어가 꿈꿔온 미래와도 같다. 제트 터빈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카본 모노코크 보디를 갖춘 이 콘셉트카는 ‘미래형 재규어’의 상징이었지만, 양산 직전 프로젝트가 멈추며 전설로 남았다. 영화 〈007 스펙터〉에 등장해 다시 주목받은 C-X75는 여전히 스크린 속 환상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 2년 전, 이안 칼럼은 그 환상을 현실로 옮겼다. 그의 디자인 하우스는 실제 촬영용 차량 중 한 대를 가져와 도로 주행이 가능한 차로 재탄생시켰다. ‘Car 001’은 원형 디자인을 유지한 채 구동계와 공력 시스템, 섀시 밸런스를 재조율했다. 슈퍼차저 엔진과 트랙 전용 서스펜션을 조합하고, 액티브 에어로다이내믹 시스템으로 안정성을 높였다. 실내는 카본 시트 셸과 알칸타라 트림, 금속 페달이 만들어내는 질감으로 운전 감각을 자극한다. 오너가 직접 요청한 스티어링과 배기음 세팅이 더해져, C-X75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슈퍼카가 되었다. 이렇듯 C-X75는 영화 속 장면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때의 감각을 현실로 옮긴 차다.


CALLUM VANQUISH SHOOTING BRAKE
슈팅 브레이크, 그란투리스모의 새로운 선을 긋다
뱅퀴시는 칼럼의 대표작이다. 그는 이미 뱅퀴시 25를 통해 완성형 리스토어의 기준을 세웠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8월 공개한 슈팅 브레이크 콘셉트는 루프 라인을 길게 늘리고, 측면 흡기와 리어 범퍼, 사이드 스커트를 다듬어 한층 단단한 형태감을 보여준다. 길어진 차체 속에서도 GT 특유의 균형감은 여전하다. 전면의 볼륨감과 리어로 이어지는 곡선이 매끄럽게 연결되며, 단단한 차체 비율과 넓은 트레드(좌우 바퀴 사이의 간격)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안정감이 돋보인다. 파워트레인은 5.9리터 V12 엔진으로 최대출력 580마력을 낸다. 변속기는 기존 싱글 클러치 자동과 보다 부드러운 6단 토크컨버터 자동, 6단 수동 변속기 등 세 가지로 구성된다. 이 세팅을 통해 GT 특유의 여유로움과 직관적 조작의 즐거움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디자인에서도 세세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한층 커진 측면 흡기와 새로 조형된 프런트 페시아는 공기 흐름을 효율적으로 이끌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리어 범퍼와 루프 라인은 긴 차체 비율에 맞게 재설계해 수납공간을 확보하면서도 뱅퀴시 특유의 우아한 실루엣을 유지한다. 헤드램프는 원형 주간주행등으로 현대적 인상을 전하며, 휠 디자인은 지름을 키워 차체와 비례를 맞췄다.

뱅퀴시 슈팅 브레이크는 아직 콘셉트 단계다. 하지만 칼럼이 인스타그램에 남긴 한 문장에서 이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현재는 콘셉트 단계입니다. 제작을 원한다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이 짧은 문장엔 그가 추구하는 자동차 철학이 담겨 있다. 자동차를 하나의 ‘완성품’이 아닌, 주문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만들어가는 맞춤형 작품으로 보는 것. 만약 이 모델이 현실화된다면 뱅퀴시 슈팅 브레이크는 현존하는 그 어떤 세단형 슈팅 브레이크보다 완성도 높은 형태로 남을 것이다.
WOOD & PICKETT MINI BY CALLUM
우드 앤 피켓 미니, 브리티시 헤리티지의 현재형

지난 7월 칼럼은 우드 앤 피켓 미니 바이 칼럼을 통해 영국 헤리티지를 작은 차체 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프로젝트에는 영국 모델이자 클래식카 애호가인 데이비드 간디(David Gandy)가 함께했다. 두 사람은 ‘매일 타고 싶은 클래식’이라는 목표 아래 1960년대 미니의 감성을 현대 기술로 재구성했다. 외형은 클래식 미니의 비례를 지키되 차체 패널의 정합과 도색 품질, 표면의 곡률을 최신 공법으로 새롭게 다듬었다. 루프와 펜더의 이음새, 도어 라인의 틈새까지 정밀하게 맞춰 완성도를 높인 점도 눈에 띈다. 알루미늄과 고강도 스틸 패널을 조합해 차체를 더 단단하게 만들면서 무게는 효율적으로 줄였다. 조향과 제동 하드웨어는 현대 미니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새로 설계했고, 방음 구조와 서스펜션 세팅도 다듬어 한층 부드럽고 정제된 주행 질감을 더했다. 실내는 영국식 장인정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스코틀랜드산 가죽, 알루미늄 트림, 손끝의 감촉이 살아 있는 메탈 스위치가 고급스러움을 자아낸다. 모든 스티치를 수작업으로 완성하고, 클래식 미니의 단순한 레이아웃 안에 최신 인포테인먼트와 공조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간디는 “클래식은 그대로 두되, 불편함은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했고, 칼럼은 그 철학을 세밀한 엔지니어링으로 구현했다.
마그레이브 미니는 과거 형태를 복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감성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는 차다. 작지만 정교하고, 익숙하지만 완전히 새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