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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기록한 올드카 스토리 5

DEAR MY OLD CAR.

아버지의 동반자, 코란도 뉴 훼미리

공학도 출신인 아버지는 자동차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좋아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각 브랜드의 모델을 시대별로 섭렵하고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리고 자동차를 다루는 기자들과 평론가를 싫어했다. 디자이너와 연구원들이 오랜 시간 빚어낸 작품을 쉽게 이야기한다고. 내가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가 꽂힌 모델은 쌍용의 코란도 뉴 훼미리(이하 ‘코란도’)였다. 당시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무슨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지’ 묻는 문화가 있었다. 대부분 아버지가 쌍용 무쏘, 현대 갤로퍼를 탔던 친구들은 괜히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또한 분위기에 주눅 들어 곧장 아버지에게 칭얼거린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차를 구매한 이유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초등학생인 나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우선 실내 공간 활용성이 좋은 6인승 모델이라는 강점, 둘째는 승용차처럼 뒷문이 달린 5도어 스테이션 왜건 형태라는 점, 셋째는 한국에서 만든 자동차 중 최초로 파리-다카르 랠리를 완주했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코란도는 아버지의 자존심 같은
자동차였다.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주말,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정선으로 겨울 캠핑을 떠났다. “코란도는 힘이 좋으니 걱정 없다”며 자신만만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내리니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기록적인 폭설로 도로는 꽁꽁 얼어붙었고, 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코란도는 특유의 탄탄한 주파력으로 숙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그날 저녁 동강 인근에서 먹었던 참게 라면과 군고구마가 잊히지 않는다. 코란도 시트에 앉아 바라본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도 가슴속에 남아 있다. 이후 약 12년 동안 꾸준히 관리하며 탄 코란도는 우리 가족에게 이동 수단 그 이상의 존재였다. 네 명이 함께 떠나는 여행의 과정이자 온 가족이 웃고, 먹고, 이야기 나누던 그런 특별한 공간이었다. 한편 코란도의 듬직함은 차주인 아버지의 건강과 에너지를 상징하기도 했다. 지병이 이어져 더는 스티어링 휠을 잡을 수 없게 되었고, 이제는 나와 누나가 운전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2열 좌석에서 바라보던 아버지의 어깨와 투박한 코란도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볼 수 없어 아쉽고 그립다. 가끔 어지러운 직장 생활에 지칠 때면 혼자 동강으로 떠나곤 한다. 그때 모험했던 겨울 도로와 공허한 밤하늘 위 별빛을 되새기며. _ 임현규(항공정비사)

어머니가 물려받은 오리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자동차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시트로앵의 오리(Ente)다.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어머니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로, 당시에도 꽤 연식이 오래된 차량이었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이 차로 여섯명의 형제와 함께 주말마다 나들이를 떠났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태어난 후에는 이 차를 직접 운전하며 화요일, 금요일 저녁마다 배구부 훈련장을 드나들었다. 우리는 종종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고, 그때의 달콤한 기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이 차는 나와 어머니 모두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오리는 일반적 자동차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존재 같았다. 나와 어머니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그런 가족 같은 자동차. 오리의 운전석과 조수석은 여느
가구 못지않게 아늑했다. 또 창문이 독특했는데, 꼭 밑으로 (창문을) 다 내리지 않아도 바깥으로 접을 수 있는 형태였다. 심지어 열쇠를 두고 내리거나 다른 이유로 문을 못 열어도 창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손쉽게 차 문을 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안전 문제가 크지만 오리의 매력 중 하나였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도 아니었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창문을 접어 열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다 인사했다고 한다. 또 가로로 탑재된 구식 기어 변환 장치는 운전할 때 비효율적이었지만,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독일 동네에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어머니가 기어를 힘들게 바꾸는 와중에도 환하게 웃던 모습이 선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차를 너무 올드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오히려 그 올드함 때문에 더 큰 애정이 생긴다. 그 차는 당시에도 구식 자동차라고 할 정도로 기능이 없었고 언제 도로 위에서 멈출지 모르는 상태였지만, 반려동물처럼 소중한 존재였다. 그래서 잔고장이 나도 우리 가족은 오리를 아끼고 돌보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새로운 차를 원하지만, 이 차를 접했던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굳이 신차를 고집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새로워야 하는 이 세상에 어머니의 올드카는 다른 가치를 그려냈다. 그 따스함과 안정감은 어떤 새 차도 줄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이제 내 눈앞에 오리는 없지만, 특별한 감정은 평생 함께할 것만 같다. _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독일에서 온 내 친구, V40 크로스 컨트리 T3

피터 호버리가 디자인한 마지막 볼보 모델이자 이제는 단종된 ‘V40 크로스 컨트리 T3’는 내게 각별한 존재다. 약 9년 전, 부모님이 독일로 이주했을 때 아버지가 장만한 모델로, 우리 가족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다. 독일은 차량 번호판을 ‘도시가 속한 주+임의 문자+임의 숫자’ 조합으로 지정할 수있는데, 부모님은 그 임의 문자란에 나의 이니셜 ‘JH’를 새겨 넣었다. 나의 빈자리를 독일에서 채워준 소중한 친구인 셈이다. 그 특별함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고 직접 한국으로 들여와 운행하고 있다. 가끔 새벽녘, 어두운 고속도로를 혼자 달리다 보면
마치 독일의 아우토반인 듯 향수를 느끼곤 한다. 한낮에는 어머니와 함께 마트에 가던 기억도 떠오른다. 우리는 독일 헤센주의 작은 위성도시 오베루르젤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ALDI와 EDEKA 같은 식료품 마트가 많았다. 독일 마트는 화훼 섹션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어머니는 종종 화병에 꽂을 꽃이나 작은 식물을 구입하곤 했다. 히아신스 같은 꽃을 주로 샀는데, 차량 컵홀더에 촘촘히 꽂아 돌아오곤 했다. 식물이 웃자란 후 금방 시들어버려 다시 사기를 반복하던 기억도 난다.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왜 계속 사고 죽이냐”며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하나의 루틴처럼 마트에 가서 식물 사는 걸 좋아하셨던 것 같다.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독일에서 우리는 마트에서 장 보는 시간을 자주 가졌고, 지금도 그때 특유의 따스함을 떠올리곤 한다.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기억은 ‘작은 휴식’이 아닐는지. 각자 바쁜 일상에 갇혀 가족끼리 장 보러 가는 일조차 줄어들고 있으니까. 재밌게도 한국에서 이 차를 운전하며 종종 비슷한 ‘여유’를 느낀다. 세상이 너무 빠르고 편리해진 만큼 아날로그 요소와 불편함이 주는 여유가 가끔은 묘하게 반갑고 산뜻하게 다가온다. 아날로그식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톱니바퀴형 수동 시트처럼 이제 낯설고 불편한 요소들이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마음이 간다. 가끔 지인들이 “이 시트는 어떻게 조절하는 거야?”라고 묻는데, 그럴 때면 “독일에서 온 내 친구”라며 자식 자랑하듯 이 차에 대한 스토리를 풀어내기도 한다. 독일에서의 일상을 추억하며 당분간은 이 차의 여유를 더 즐길 생각이다. _ 조정흠(모델)

봄날의 삼촌과 토요타 크라운
‘토요타 크라운’ 하면 ‘성공한 이의 차’라는 명제가 뒤따르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 내가 10대에 막 들어설 무렵, 집 안의 사고뭉치였던 삼촌이 이 차와 함께 금의환향했다. 삼촌은 일본과 국내를 넘나들며 물건 중개를 도맡았고, 당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뤄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였다. 구형 아파트 단지인 우리 집 앞에 흰색 크라운이 들어서자 동네 꼬마와 어른들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구경하던 게 기억난다. 당
시 이 차는 고(故) 이주일 코미디언이 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출용이 아닌 내수용 차량이었기에 오른쪽 시트에 스티어링 휠이 장착되어 있었고, 프레임리스 도어 방식과 하드톱을 갖춘 세단 모델이었다. 삼촌은 나와 형에게 크라운의 상징이던 1자 리어 램프와 ‘로얄 살롱’ 트림 마크를 자랑하기도 했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삼촌의 사업이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날 점심 외식을 위해 우리 가족은 크라운에 몸을 욱여넣은 채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출발했다. 다 같이 경양식 돈가스를 먹는 내내 부모님의 표정
이 어두웠던 기억이 난다. 추측해보건대, 평소 자동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삼촌이었던 만큼 부모님에게는 흰색 크라운이 일종의 허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삼촌은 부모님을 집에 바래다준 후 나와 형을 데리고 동네 강가 주변을 보란 듯이 멋스럽게 주행했다. 따스한 햇살과 잔잔한 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B’z, 버블검 브라더스 등 일본 유명 뮤지션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도 그때였다. 삼촌은 차량 내부의 CD플레이어를 통해 그 시대만의 ‘신문물’을 소개했다. 그렇게 함께 늦은 오후를 보낸 뒤 삼촌은 우리를 집에 데려다줬다. 늘 조급함과 위축되어 있던 얼굴과 다르게 삼촌은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건 내 생애 가장 멋져 보이던, 자신감 넘쳐 보이던 삼촌의 모습이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삼촌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도래하기 직전 삼촌은 우리 가족과 연이 끊겼고, 얼마 후 부고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드라이브했던 강가 근처를 지날 때면 종종 그 흰색 크라운이 슬프게 겹쳐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 또한 삼촌의 허세를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이따금 봄날의 한강 변을 운전하다 보면 그날의 대화와 온도가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럴 때면 이젠
CD플레이어가 아닌 스트리밍 앱으로 1990년대 초반의 J-팝을 찬찬히 재생한다.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우아한 1990년대 크라운을, 그날의 삼촌을 추억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_ 김경욱(광고기획자)

세 번의 재회, 흰색 G 클래스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드림카’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슈퍼카를, 누군가는 클래식카처럼 희소성 있는 차를 원할 것이다. 내게 드림카는 ‘엄마 같은 차’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 20대 시절은 밀레니엄이라 불리던 2000년 초반이었다. 당시 자동차들은 곡선이 강조된 미래지향적 디자인이 주를 이뤘고, 나 또한 그런 디자인을 좋아할 때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압구정 로데오에서 삼각별 엠블럼을 새긴 투박한 은색 SUV를 보게 되었다. 당시 모델명은 몰랐지만, 강렬한 오라와 배기음은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지바겐은 나의 드림카가 되었다. 2014년 봄, 드림카를 꿈꾼 지 약 5년 만에 2002년형 흰색 G500 로린저 풀 보디킷 차량을 구매했다. 당시 12년이 지난 자동차였지만, 그 ‘흰둥이(이 차의 애칭이다)’와 함께한 시간은 늘 행복했다. 아들을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줄 때마다 함께했고, 야근이 길어질 때는 잠깐 눈 붙일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일이 잘되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힘입어 한때 신형 지바겐을 구입했지만 그동안 함께했던 흰둥이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형 지바겐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후 이사를 하고 아이가 자라면서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 찾아왔다. 결국 흰둥이를 팔아 힘든 시간을 버텼고,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지자 다시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판 지바겐을 다시 발견했고, 우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로도 이 차량을 팔아야 하는 순간이 또 한 번 찾아왔지만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흰둥이는 내 앞에 다시 등장했다. 세 번이나 가족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을 단단히 지탱해줬다. 아이가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닐 때마다 우리 가족의 길을 책임져주었고, 내가 힘들 때마다 위로하고 마음을 보듬어준 존재였다. 그 부분에서 엄마 같은 존재인 ‘드림카’의 기준에 부합하기 충분했다. 이제는 또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 되어 추억을 쌓아가고 있을 흰둥이를 추억해본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을 지켜준 것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로 남아 있길 바라본다. _ 이성식(스타일리스트, ‘아프로갓’ 대표)

에디터 박찬 일러스트 손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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