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페이커’가 된다
페이커와 T1의 위대한 여정, e스포츠의 미래를 열다!
‘페이커가 페이커 한’
플레이가 협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한다.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는 표현이 딱 알맞은 서사지만, 막상 쓰려니 망설여진다. 페이커의 행보를 보면 그의 정점은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지난 11월 페이커 소속팀 T1은 중국 비리비리 게이밍(BLG)을 3 대 2로 꺾으며 새 역사를 썼다. 롤드컵(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5회 우승이라는 미증유의 기록에 경외감마저 든다. 시즌 내내 좋은 기량을 선보인 2023년과 달리 올해는 월드 챔피언십 대표 선발전에서 4등으로 간신히 롤드컵행 막차를 탄 터라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결정적 순간마다 슈퍼 플레이를 선보이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 끝에 기어코 우승을 이뤄냈다. 페이커의 개인 기록도 기념비적이다. 세계 최초 월즈 통산 500킬, 롤드컵 최연소 및 최고령 우승, MVP 2회 선정 등 선수 한 명이 여러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는 결코 페이커의 활약만으로 완성된 그림은 아니다. 이적이 잦은 e-스포츠에서 T1은 동일한 선수단으로 두 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그 전사들이 바로 제오페구케(제우스-오너-페이커-구마유시-케리아)이며, 이는 괄목할 만한 성과다. 이들의 끈끈한 팀워크는 오랜 시간 쌓아온 서사로 설명할 수 있다. 페이커는 2022년 롤드컵 준우승 후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표한 바 있다. 그리고 2017년 롤드컵 3연패 달성이 좌절된 후 눈물을 흘리며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일화도 유명하다. 서로의 진심을 공유한 시간과 패배의 좌절은 팀 결속력을 다지고 전의를 불태우게 했을 테다. 실제로 이번 롤드컵 우승 후 T1의 케리아가 들려준 후일담이 이를 짐작케 한다. “게임 중 페이커의 움직임만 보고도 그가 어떤 플레이를 할지 짐작했다”는 그의 코멘트는 ‘페이커가 페이커 한’ 플레이가 협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한다.
2021년 말 T1과의 계약이 종료되며 FA 신분이 됐을 당시 페이커는 이적 대신 잔류를 택했다. 수백억의 연봉을 거부할 수 있었던 건 T1의 이름으로 다시 도전하겠다는 무형의 가치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그것이 최우선 순위였을 수도 있다. “개인 타이틀엔 별 관심이 없고 팀 승리가 중요하다”는 페이커의 이번 우승 소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짐작은 T1에 서사적 낭만을 더하며 일찌감치 내년 시즌을 기대하게 한다.
2025년은 T1의 서사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줄 좋은 시즌이다. 2017년에 이루지 못한 롤드컵 3연패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니까. 그때도 ‘제오페구케’로 경기를 치른다면 동일 구성원으로 롤드컵을 3회 연속 우승하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는 시나리오다. 예상대로 된다면야 좋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선수와 구단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관전 포인트다. 다행히 11월 14일 케리아가 “(T1에서) 월즈 2회 우승을 했지만, 이루고 싶은 커리어가 아직 한참 남았다”며 2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남은 3인 제우스, 오너, 구마유시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두고 봐야겠지만, 여러 차례 동행 의지를 드러낸 만큼 ‘롤드컵 3연패’는 기대해볼 만하다. 올해 주전 선수 중 세 명이 ‘T1 유스’ 출신임을 고려하면 이 선수들이 좋은 기록을 세우는 것도 유의미하다. 임요환으로부터 시작된 명문 구단으로서 위상을 더욱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페이커의 활약을 상수가 아닌 변수로 두고, 해마다 향상되는 경기력으로 도전하는 전 세계 팀들의 면면을 대입해보면 롤드컵의 관전은 한층 흥미로워진다. 올해 위협적인 플레이를 선보인 중국 리그가 내년에 T1과 승부를 겨룬다면 어떤 전략을 구사하게 될까. 페이커의 변함없는 위력을 확인한 만큼 페이커를 집중 마크할지, 팀 차원의 전략을 세울지, 혹은 전혀 새로운 접근을 할지 궁금해진다. 이처럼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한 답이 실제로 확인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테다. 게임의 인기에 따라 종목의 수명이 좌우되는 e-스포츠의 특성을 고려하면 ‘리그 오브 레전드’에게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드라마 같은 업적과 서사에 빠져든, 그리고 빠져들 팬이 존재하기에 수명은 예상보다 더 길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페이커와 T1의 존재는 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다.
강지웅
게임평론가.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게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게임이 삶의 수많은 순간을 어루만지는, 우리와 동행하는 문화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