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ociety 안내

<맨 노블레스>가 '디깅 커뮤니티 M.Society'를 시작합니다.
M.Society는 초대코드가 있어야만 가입 신청이 가능합니다.

자세히보기
닫기

고전, 색을 입다

<미키 17>의 피오나 크롬비를 포함한 네 명의 미술 감독에게 칠하며 이어나가고 싶은 흑백영화 속 장면을 물었다.

피오나 크롬비 감독이 재구성한 <키드> 속 장면.
<키드>, 찰리 채플린, 1921년.

피오나 크롬비(Fiona Crombie) 호주 출신 아트 디렉터. 역사적 배경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즐기며, 장르와 시대를 넘나드는 미술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2018년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미국 미술감독조합에서 미술상을 수상했고, 오스카 미술 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다. 중세 스코틀랜드의 어두운 분위기를 세밀하게 표현한 영화 <맥베스>, 고전 패션과 펑크 록을 결합해 화제를 모은 영화 <크루엘라>의 미술을 담당했다. 최근에는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미키 17> 미술감독으로 합류해 또 한 번 기대를 모은다.

<키드>, 찰리 채플린, 1921년
시간이 스며든 방, 그 온기를 그리며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정확히 말하면 ‘따스함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느껴진다고 할까. 찰리 채플린 감독이 연출한 <키드>는 단순한 가족 영화가 아니다. 하나의 공간이 두 사람만의 ‘집’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이 흑백 장면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선명한 색은 아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빛바랜 듯한 색감, 흑백 위에 수채화가 얹힌 듯한 분위기. 벽은 칠이 벗겨진 회반죽 색일테고, 테이블 위에는 오래된 하늘색 식탁보가 깔려 있을 것이다. 어쩌면 창틀은 연한 비취색일지도 모른다. 예전 세입자가 남긴 흔적일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색이 나지막이 각각의 시간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하나다. 따뜻함.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만들어가는 ‘열정’의 따뜻함이다. 그런 감정을 최대한 살리고 싶다. 선명한 색과 부드러운 색이 나란히 놓이되, 그 아래에는 언제나 흑백이 깔려 있는 방식으로. 약간의 불완전함이 녹아든 손맛도 더하고 싶다. 너무 정제된 색은 오히려 이 공간의 서사를 깰 것 같으니까.

조명 톤에서는 작가 존 크로우더가 그린 <마셜시 감옥>이 떠오른다. 창문을 통해 흐르는 빛의 부드러움. 꼭 그 분위기를 살리고 싶다. 다만 <키드>의 공간은 훨씬 낡고 비좁다. 이 차이를 고려하면서 빛과 색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섞일지 고민하는 것도 재밌을 듯하다.

나의 연출 방식 공간은 제각각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관객에게 공간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지, 그리고 그 공간이 어떻게 형성되고 캐릭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매 순간 고민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미술감독의 연출은 감정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을 웃게 하고, 놀라게 하며, 때로는 울게 만들 수도 있다. 미술 연출은 영화의 언어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_피오나 크롬비

REFERENCES

1850~60년대 촬영한 강렬하고 잔잔한 색
감이 조화를 이루는 오래된 사진.
존 크로우더가 그린 <마셜시 감옥>.
1850~60년대 촬영한 강렬하고 잔잔한 색
감이 조화를 이루는 오래된 사진.
손채색(hand-colored) 방식으로 인화한 1930년대 빈티지 사진.

저스틴 나다니엘 키슬러 감독이 재구성한 <시민 케인> 속 장면.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년.

저스틴 나다니엘 키슬러(Justin Nathaniel Kistler) 감각적 비주얼의 스타일링과 미장센으로 주목받는 아트 디렉터. 애플TV+ 드라마 <레이디 인 더 레이크>, 공포와 판타지가 결합된 세계관인 HBO 드라마 <러브크래프트 컨트리>, 1860년대 역사적인 배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영화 <해방> 등의 미술 연출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부고니아>의 아트 디렉팅을 맡았다.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년
고독과 권력에 오늘의 색채를 입힐 때

<시민 케인> 속 식사 장면은 흑백영화가 얼마나 강렬한 감정과 서사를 전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작품 속 찰스 포스터 케인은 아내 에밀리와 신혼 시절 좁은 식탁에 가까이 붙어 앉아 식사하지만, 마음이 멀어진 뒤에는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작중 케인의 표정과 자세를 보라. 그는 단지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인데 그 안에는 고독, 권력, 분노가 담겨 있다. 색 없이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 다는 게 바로 흑백영화의 힘이다.

사실 이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미장센과 조명을 자랑하지만, 이를 조금 더 초현실적 무드로 변형시키고 싶다. 부와 동시에 쇠퇴를 상징할 것 같은 침침한 금빛 조명을 설치해보고 싶다. 주변의 화려함은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내 상상 속 케인의 정장은 어두운 짙푸른 색이며, 미세한 핀스트라이프 패턴은 ‘금맥’처럼 은은하게 빛난다. 강렬한 붉은 색감의 포켓 스퀘어는 권력, 다가오는 상실감을 암시한다. 의자 뒤 벽은 제나두(Xanadu, 천남성과 식물)를 초현실적으로 확장해 그의 엄격한 자세와 대비를 이룬다. 현실과 초현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비주얼을 통해 감정적 몰입감을 극대화하고, 관객이 그의 복잡한 내면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고 싶다.

나의 연출 방식 평소 역사물 안에서 강렬한 장치를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것을 즐긴다. 초현실적 요소를 통해 인물의 감정적 서사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그 부 분에서 <시민 케인>의 이 장면은 내가 추구하는 미학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개봉한 지 약 8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흑백이라는 것만으로도 욕심을 부른다. _저스틴 나다니엘 키슬러

REFERENCES

플라타포르마 데 아르키텍투라의 제나두 정원.
1933년의 패션을 다룬 헬렌 로렌슨의 칼
럼 일러스트.
린 버컴의 캔버스 페인팅 프린트 작품인 <블랙 몬테의 마지막 습격>.

조화성 감독이 재구성한 <하녀> 속 장면.
<하녀>, 김기영, 1960년.

조화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 미술감독. 영화의 본질이 협업과 소통에 있다고 강조하며, 이야기의 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해왔다. <친절한 금자씨>, <내부자들>, <신세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 약 25년간 국내 영화계의 굵직한 작품을 담당했다. 최근에는 <검은 수녀들> 속 오컬트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녀>, 김기영, 1960년
흑백 안에서 발견한 욕망의 착시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소설 속 자간이나 수묵담채화 여백처럼 이야기의 집중력과 인물의 감정을 깊이 있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흑백은 모든 컬러를 배제하면서도 그 자체로 컬러보다 다채로운 착시를 안겨준다. 시대적 특성도 중요하다. 한국전쟁 이후 물질적 탐욕과 정신적 변화가 충돌하는 시대상, 그리고 남편, 아내, 정부로 이루어진 삼각관계. 이 관계는 자의식을 지닌 개체처럼 작동하면서도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인물 위주의 백그라운드 배치와 절제된 소품 사용 또한 인상적.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정적인 화면 구성, 관음증적 긴장감을 주는 창문의 레이어드 샷도 돋보인다. 이 정적이고도 강렬한 장면은 색이 주는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글리치한 색감의 벽지로 표현한 욕망, 팝아트적 컬러의 가구 배치와 글로시한 반사 효과의 구조물. 하지만 내가 새롭게 채우고 싶은 색은 단순히 ‘화려하다’고 치부할 수 없다. 그 속 인물들의 의상은 오히려 블랙 & 화이트로 대조를 이루게 하고 싶다. 이를 통해 흑백 속에서도 강렬한 색감이 춤추는 듯한 착시를 표현하고자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방> 속 컬러 조합, 사진가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정적인 공포도 함께 녹여내고 싶다. 이는 <하녀>가 담고 있는 인간 욕망의 충돌, 그리고 신분과 관계없는 인간 본연의 집착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나의 연출 방식 본래 내 꿈은 화가였다. 그때는 색채, 구도, 선, 면 같은 시각적 요소가 이야기보다 앞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작업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시각적 표현은 그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이야기 흐름에 맞는 시각적 표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작업은 언제나 사람,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느껴지고, 그 안에서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공간이 있다. 그런 공간이 주는 울림이 있다고 믿는다. _조화성

REFERENCES

2019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 속 비트라 컬렉션.
사진가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미스터리 투어>.

김민혜 감독이 재구성한 <서스피션> 속 장면.
<서스피션>, 알프레드 히치콕, 1941년.

김민혜 독특하고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주목받고 있는 미술감독.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에서 이충현 감독과 협업해 몽환적이면서 서늘한 공간 디자인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차가운 색감과 사실적 디테일을 보여줬으며, 정이진 감독과 함께 작업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는 세밀한 소품 연출로 타임슬립 장르의 서정성을 배가했다.

<서스피션>, 알프레드 히치콕, 1941년
불안과 의심, 보이지 않는 색을 좇는 시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서스피션> 속 낱말 게임 신은 리나의 감정 변화가 가장 미학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장면에서 리나는 남편 조니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나는 리나의 의심이 붉은색 꽃잎이 피어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감정에는 불안·공포·슬픔이 뒤엉켜 있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히치콕은 그림자를 통해 흑백 안에서도 이 감정을 시각화했다. 조니의 얼굴은 빛과 그림자로 나뉘어 이중성을 암시하고, 계단을 오르는 그의 실루엣은 위협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리나에게 드리워진 창살 그림자는 의심 속에 갇힌 모습을 상징한다.

이 장면을 재구성한다면, 리나의 불안과 의심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어두운 녹색을 사용할 것이다. 리나의 의상은 목을 죄는 녹색 드레스로 설정해 숨 막히는 감정을 시각화하고 싶다. 또 테이블 주변만 조명을 켜고 나머지는 모두 어둡게 처리할 것이다. 실제 벽은 채도가 낮은 녹색이지만,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짙은 청록색이나 검붉은빛으로 보이게 하고 싶다. 테이블 위에는 빨간 꽃이 그려진 조명을 두어 리나의 의심을 상징화하고, 와인잔을 배치해 차가운 분위기와 깨질 듯한 긴장감을 표현할 것이다.

나의 연출 방식 미술감독이라면 보이는 공간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이야기도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시나리오에 담기지 않은 인물의 삶을 상상할 때 가장 큰 흥미를 느낀다. 캐릭터는 2시간짜리 영화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닌, 그 이전에도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까?’, ‘어떤 색을 좋아할까?’ 이런 상상으로 인물의 이야기를 더해가면 그들의 공간에 채워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감독이 그린 인물과 내가 상상한 인물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 _김민혜

REFERENCES

사진가 메간 플런켓의 <침입자>.
피어나는 의심을 상징하는 붉은 꽃 장식의 조명.
와인이 들어있는 유리잔과 어두운 분위기.
1900년대 고딕 드레스를 기록한 초상화. 어두운 녹색의 드레스 컬러와 목을 조이는 형태를 갖췄다.
와인이 들어있는 유리잔과 어두운 분위기.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1955년작 <함정>.
에디터 박찬 AI 엔지니어 김종헌 디지털 에디터 함지수
LUXURIOUS BOLDNESS ARCHIVE CHIC BOLDNESS AND W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