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지 않은 사라는 취해 있었다. <더 글로리>에서 약과 술, 폭력에 취한 인물 이사라를 위해 길고 세밀한 전사를 구상한 배우 김히어라. 작품마다 완벽한 변신을 거듭하는 신기한 사람 김히어라. 이름도 신비롭다.
궁금했어요. 배우님은 작품마다 어쩜 그리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지.
감사하게도 감독님마다 저를 다르게 봐주신 것 같아요. 제가 맡은 캐릭터들이 독특하기도 했고, 저의 강한 면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 감독님도 계셨어요. 기회가 생겨 뛰어난 분들이 만든 좋은 작품에 출연했을 뿐이에요. 저는 차려진 밥을 먹기만 했습니다.
작업할수록 새로운 면을 발굴하고 싶은 배우인 걸까요?
제 얼굴 때문이 아닐까요. 다양한 성격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이라는 소리를 주변에서 자주 들었거든요.
연기는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정확히 연기에서 어떤 매력을 느낀 거죠?
초등학생 때부터 감정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때로는 너무 이성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우리 모두 조금씩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긴 하지만, 저는 유독 온도차가 컸어요. 저는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사람, 누군가에게는 감정적인 사람으로 기억될 거예요. 그러다 고등학교에서 연기를 접했어요.
연기를 해보니 거대한 감정이 제 안에서 회오리치는 게 느껴지더군요. 제 감정에 휩쓸리는 게 싫어 절제하던 시기에, 연기는 감정을 무한하게 쓸 수 있어 매력을 느꼈어요.
사춘기 때는 우울을 먹고 자라죠.
맞아요. 그때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죽음을 앞둔 줄리엣의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났어요. 연기도, 사랑도 해본 적이 없으면서요. 사각 링 안에선 싸움이 허락되듯, 연기에선 자유로운 감정 표출이 허락 되는 느낌이었어요. 행복했죠. 하지만 그때는 연기를 잘 몰랐으니까. 제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 가수나 화가에게 관심을 가졌어요. 결과 적으로는 연기자가 됐지만.
작사한 싱글 앨범을 발표했고, 개인 회화전도 열었어요. 연기는 스크립트가 있지만, 그림은 빈 캔버스에서 시작해요. 글도 빈 화면에서 시작하고요. 연기 보다 그림과 노래 가사에 본인이 더 많이 담겼을 것 같은데.
생각을 구구절절 일기로 쓰다가 글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낙서처럼 그림으로 표현했 어요. 그러다 낙서를 확장해 그림을 그릴 기회가 생겼고요. 그림은 감정적이에요. 지금도 읽던 책에 낙서를 그려요. 끄적인 메모를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이 있는데, 한 친구가 너무 공감된다면서 자주 메모를 남겨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글쓰기도 시작했어요. 그림과 글, 연기는 모두 이어진 다고 생각해요. 일기를 전문적으로 표현해보려고 시를 조금 배웠고, 그때쓴 시를 가사로 만들었어요.
싱글 앨범 <서른대의 사랑> 가사는 무슨 내용인가요?
30대가 되니 열정만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누군가가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것에 의심이 생기고, 혼란스러울 때 쓴 가사예요. 자작 곡도 있는데, 부끄러워서 차마 발표하지는 못했어요. 팬들과 함께한 작은 콘서트에서 몇 번 부르고 말았죠.
배우님의 그림과 음악은 다양한 형식으로 쓴 일기 같은 거군요.
맞아요. 제 전시에서 한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다섯 명의 개인전을 묶은 전시인 줄 알았다고요. 그림마다 색이 다르고, 메인 그림은 일기 같다고 하셨어요. 배우 한 명이 그린 거라고 설명하니, 여러 인물의 공연을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하셨죠. 제 그림은 부끄러운 제 모습을 담은 일기지만, 일기 형식의 그림을 계속 그리면 좋겠다는 얘기를 듣고 그 뒤로도 더 그렸어요.
배우님이 지닌 냉정과 열정, 양가감정이 페르소나를 만드는 데 도움 될 것 같아요.
그렇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호기심이 많아요. 여행을 가도 자연환경보다는 그 풍경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거든요.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이 제게 영향을 미쳤어요.
일상에서 포착한 특징이 신선한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봐요. 드라마 <배드 앤크레이지>의 용사장은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 누아르의 전형적 보스지만 목소리나 표정, 행동은 현실적이에요. 용사장의 디테일을 만든 과정이 궁금 합니다.
오디션에 참가해 대본을 받았는데, 대사가 함경북도 사투리였어 요. 마침 함께 공연한 배우 중 함경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에게 배웠죠. 또 영화 <황해>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안 예뻐 보일지, 어떻게 하면 남자 같은 행동으로 보일지 고민했어요. 야상 점퍼를 걸치고 혼자 보리굴비 먹는 신을 준비해 친한 배우 오빠에게 평가를 부탁했는데, 너무 좋다는 거예요. 감독님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사실 엄태구 선배의 목소리 톤을 차용한 거예요. 칭찬을 받고 자신감이 고양된 상태로 오디션을 봤어요.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떨리더라고요. 몰랐는데, 제가 손을 떨었대요. 감독님은 제가 준비한 용사장 역할을 마음에 들어하셨고, 얼굴에 점 같은 요소까지 추가하면서 캐릭터를 발전시켜주셨어요. <배드 앤 크레이지>를 발표한 뒤 용사장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며 제게 고맙다고 하시는데, 그때 자존감이 많이 높아졌어요.
근데 <더 글로리>의 이사라는 용사장보다 더 나빠요. 약자에게 모멸과 공포를 가하고, 학폭에 마약, 돈세탁 등 범죄 행위도 다채롭죠. 그래도 배우는 자기 캐릭터에 연민을 가져야 하잖아요. 연기한 입장에서 이사라를 변론한다면.
사라는 용사장 같은 사람 때문에 약을 접했죠. 정서적으로 유약하고 위태로운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정상적 애착 형성이 안 되고,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거든요. 부모가 외치는 하나님에게 의지해보려 했으나 올바르게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사라는 종교가 아니라 부모가 온전한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길 원해요. 자신을 붙잡아줄 수 있는 건 부모지만, 정작 부모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매개로서 좋은 목사와 좋은 사모님 역할을 해요. 사라는 부모의 외면에서 외로움을 느꼈을 거예요. 그러니 맨 정신으로 살 수 없어 약에 손을 댔다고 생각했 어요. 취하지 않으면 자신의 나쁜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모든 걸 포기할 것 같아요. 그래서 사라는 늘 취해 있어요. 단약 상태일 때도 주변에 늘담배와 술이 있죠. 사라는 멋진 예술가 딸로 존재하며 부모의 마리오네트 처럼 살았어요. 스스로 선택한 건 약뿐이에요. 사라의 전사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봤지만, 그래도 악인인 건 맞아요.
김은숙 작가, 안길호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제가 작가님에게 “사라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하고 물으니 “그냥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주변에서도 칭찬이라 하고, 저도 잘 준비한 것 같아 정말 감사했죠. 감독님은 눈을 더 붉게 표현하면 좋겠다거나, 디자인적인 지시 사항이 많았 어요. 계산적인 연기를 하면 사라 같지 않아 그러신 것 같아요. 제가 연기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도와주셨어요.
도전을 즐기는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불편하거나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저는 도전과 무모함, 청개구리 기질을 지녔어요. 남과 다른 길을 가도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더 나이 들기 전에 제가 가진 면면을 보여주는 게 두렵지 않아요. 제 삶에서 33 세의 시간은 지금뿐이에요. 비슷한 역할을 마흔 살에 한다면 같을까요? 분명 다를 거예요. 살아온 시간이 더해지면 다른 모습이 나오겠죠.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단순하게 생각해요.
<더 글로리> 파트 1에서 사라가 혜정에게 탈취제를 뿌리며 수치심을 주는 장면이 화제였어요. 이 신의 비하인드가 궁금하네요.
작가님이 우리를 캐스팅한 뒤 글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문이 정교했어요. 배우끼리도 친해져서 탈취제를 뿌리거나 협박할 때 불편할까 싶었는데, 임지연 배우와 차주영 배우 모두 연기 욕심이 많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성격이에요. 죽이 잘 맞는달까. 캐릭터가 강렬해 보이려면 상대 배우의 리액션이 중요한데, 차주영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 받아줘요. 모멸감을 표정으로 표현해주면, 저와 임지연 배우는 힘을 주지 않아도 효과적으로 상황이 표현되거든요. 상대 배우들의 연기가 훨씬 편해지는 거죠.
<경이로운 소문> 시즌 2에선 겔리 역할을 맡았어 요. 차진 액션을 보여준 시즌 1이었기에, 시즌 2도 기대되네요.
전작인 드라마 <진검승부>에서 액션 장면을 많이 소화하기도 했고, 감독님이 근육질에 에너지 강한 캐릭터를 말씀하셔서 꾸준히 몸을 만들었어요. 또 <진검승부>와 <경이로운 소문>은 액션팀이 같아요. 무술감독님이 제가 잘하는 동작을 아셔서 그에 맞춰 동작을 구성해주셨고요. 저도 뮤지컬을 하면서 무대에서 몸을 써봤고, 고등학생 때는 합기도를 배웠어요. 쌍절곤으로 금상을 받은 적도 있고요.
지금까지 감정 폭이 큰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잔잔한 이야기에도 관심이 있나요?
너무 많아요. 제가 평소에는 잔잔하게 표현하는 편이라 일상적인 연기가 더 편해요. 또 장난기가 많아 로맨스 코미디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연기 외 삶에서 중요한 가치는 뭐예요?
나눔과 공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요.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세상에 무엇이 필요한지 찾아봐요. 마지막 꿈은 요양원을 차려 봉사하는 삶이에요. 예전에 요양원에서 봉사를 한 적이 있는데, 너무 행복했 어요. 제가 할머니와 살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궁금해요. 저 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저 할아버지는 정말 재미있는 건지. 혼자 계신 어르신의 생각도 궁금하고요. 여건이 된다면 함께 즐겁게 살고 싶어요. 제가 배우로서 감사한 시간을 얼마나 누릴지 모르겠지만, 오래 누리지 못한다 해도 제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타적인 사람이군요.
기질이죠. 요양원에서 봉사하면서 오히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노인분들의 에너지를 빼앗은 건 아니죠?
그건 <경이로운 소문>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