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스펙터와 이재욱이 맞닿은 일상적 이상
롤스로이스 스펙터와 이재욱이 맞닿은 일상적 이상(理想).
롤스로이스와 배우 이재욱의 조우는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지나온 세월은 다르지만 ‘하이엔드’라는 고고한 존재감을 잇기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조합이니까. 안개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현장에서 마주한 두 존재는 그 교집합 아래 촘촘히 시간을 쌓아나갔다. 롤스로이스가 선보인 첫 전기 순수차인 스펙터는 충분히 새롭고 전에 없이 젊은 자동차다. 그 혁신의 가치를 품어내기까지 250만 km라는 자사 역사상 가장 까다로운 개발 과정을 거쳤다. 이번 <맨 노블레스> 11월호에는 이재욱과 롤스로이스 스펙터의 고유한 유사성, 그리고 그 틈 사이 비치는 것을 촘촘히 기록했다.
야속하게도 많은 비가 내렸어요. 비 오는 날 좋아하세요?
정말 좋아합니다. 비 냄새, 빗소리를 좋아해요. 우중 캠핑, 우중 러닝도 즐기고. 오늘은 일하느라 즐기지 못했네요.(웃음)
촬영할 때 롤스로이스 스펙터의 운전대를 잡으면서 혹시 떠나고 싶은 충동은 없었나요?
차량 중 한 대는 차체 컬러가 오묘한 청색이었는데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 같더라고요. 운전하는 내내 제주도 해안 도로를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면 위로 미끄러지는 듯한 승차감이 바다를 떠올리게 한 것 같아요.
평소 여행을 자주 다니나요?
일로 갔을 때 겸사겸사 즐기는 편이고, 따로 시간을 내 가진 않아요. 여행을 간다는 게 아직 좀 낯설어요. 이틀 이상 마음 편히 쉬는 게 익숙지도 않고.
일찍 일을 시작한 영향인가요? 대학교 1학년 때 데뷔했죠.
그보다는 행복한 감정이 들면 되레 불안함으로 치환될 때가 있어요. 아직 불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다 캐릭터를 알아가야 하는 시기라 쉬는 게 편하지 않은가 봐요.
첫 오디션을 본 작품이 데뷔작이 되었어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마르꼬 한. 그때 어떤 마음으로 오디션장에 갔는지 기억하는지.
연기 학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큰 기대 없이 간 거예요. 감독님을 마주하면 떨리겠다는 감정조차도 몰랐죠. 누군가 건넨 대본을 읽고 묻는 말에 대답하고 나왔죠. 연기라기보다는 저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나왔는데, 오히려 그걸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데뷔 1년 만에 주연 자리를 얻었어요. 그런 재욱 씨에게도 실패의 쓴맛 같은 게 있을까요?
첫 촬영 현장에서 쓴맛을 봤죠. 칼 한 자루 없이 전쟁터에 나온 느낌이랄까. 나무 토막 하나 들고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방탄복 입고 기관총 쏘는데, 저만 준비 없이 섬처럼 덩그러니 서 있었죠.
그 경험으로 바뀐 것이 있나요?
첫 촬영을 스페인에서 했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교보문고에 갔어요. 그리고 카메라와 촬영 관련 책을 샀죠. 현장에서 쓰는 말을 알고 싶더라고요. 바스트 샷이 뭔지, 니 샷은 뭔지, 내가 연기한 것이 어떻게 편집되고 방송에 나오는지 궁금했죠. 이 과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현장에 서 있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거든요. 그래서 영화 전공자의 커리큘럼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사서 읽었어요. 그리고 휴학했죠. 내가 보지 못한 큰 세상을 만나니 더 치열해진 것 같아요.
휴학하고 뭘 했어요?
계속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그러다가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을 만났고요. 그 작품을 촬영하던 중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공개되면서 마르꼬를 좋게 봐주신 정지현 감독님이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의 주인공 역을 맡겨주셨죠. 감사하게도 계속 운이 따라줬어요.
운도 운이지만 꾸준히 움직였으니 기회를 얻은 거겠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오디션을 보러 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오디션을 본 이재욱, 오디션 보는 게 긴장되지도 않아 편하게 스스로를 보여준 이재욱, 그때 그날의 이재욱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만약 그날 오디션을 보러 가지 않았다면 군대를 제대하고 아직도 학교에서 연기 공부 중이겠죠.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계기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갓 대학교에 입학해 학교생활이나 연극에만 관심이 있었지, 드라마나 영화는 생각도 안 하던 제가 작품을 쉬고 싶지 않아 두 작품을 겹쳐서 하기도 했죠.
두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하면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재밌어요. <검블유>의 지환이와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백경을 동시에 촬영했는데, 잠도 못 자면서 찍었어요. 그래도 정말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지환이와 백경이 두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커서 제 안에서 각 캐릭터의 특징을 쏙쏙 빼먹어가면서 연기했어요. 결이 백팔십도 다른 캐릭터를 하니 아이디어도 막 솟구치고. 하나에 함몰되지 않아 좋았어요.
아이디어가 막 솟구쳤다는 건 어떤 걸까요?
정반대 캐릭터를 연기하니 사고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지환이는 다정하면서 순수한 인물이고, 백경이는 까칠하고 예민한 친구죠. 이재욱이라는 한 건물에 지환이는 16층, 백경이는 1층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누구도 아닌 이재욱은 8층에 있었고. 16층에 머물다 1층에 가서 환기하고, 1층에서 까칠하게 살다 16층에 있는 따뜻한 지환이를 만나곤 했죠. 오히려 여러 가지 표현을 하니 환기가 되었어요. 백경으로만 살았다면 침체되었을 텐데, 균형을 유지하며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이제 연기 생활도 6년이 되어가죠? 가장 큰 배움은 뭔가요?
배움은 많았지만, 구구절절 말하기보다 이 두 문장으로 답하고 싶어요.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이 말을 깊이 체감하게 됐어요. 배우로 일하면서 제가 보고 있는 하늘 위에 더 큰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많아요. 잘생긴 데다 연기력이 뛰어난 분도 많고요. 단역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저를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을 자주 접하게 돼요.
이제, 일할 때 자신만의 루틴이나 요령도 생겼겠죠.
전 대사를 노트에 써서 외우는 걸 좋아해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필사하는 거죠. 대사를 입으로 안 내뱉을 때가 많아요. 제 대사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감정을 놓치면 시나리오가 흐트러지거든요. 흐르는 대로 유연하게 연기하려는 편이에요. 상대와 연기를 하기 직전까지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데, 완벽하게 짜서 그대로 연기하면 더 어색할 거예요. 그래서 제 말투와 행동을 한정하지 않죠.
인터뷰도 그렇다고 해요. 인터뷰이에 대한 너무 많은 사전 조사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방해하기도 한다고요. 연기도 사람과 사람이 합을 맞추는 일이니 같은 맥락인가 보네요.
맞아요. 한 신의 대본을 볼 때 첫인상이라는 게 있어요. 그 안에서 내가 보여줘야 할 감정과 호흡만 정해놓고 자유롭게 연기하는 편이죠.
불안감이나 아쉬움은 없나요?
현장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아쉬움은 항상 있죠. 그래서 “돌아가서 다시 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렇진 않아요. 뭐든 처음 마주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처음 마주해 당황스럽고 힘들고 어렵고 재미있고, 이런 감정 속에서 진정성 있는 연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으려면 연기에 근육이 붙어야겠죠? 재욱 씨는 연기할 때 어디서 도움을 받나요? 개봉하는 작품은 거의 다 챙겨 봐요. 특히 요즘은 OTT를 통해 공개되는 시리즈라면 더더욱 챙겨 보려고 해요. ‘내가 만약 저 캐릭터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처럼 저를 투영해서 보는 편이에요. 그게 제 연기 공부의 시작점이기도 하고요.
제가 보고 있는 하늘 위에 더 큰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많아요.
저를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을 자주 접하게 돼요.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게 저희에겐 휴식인데, 배우에게는 역시 일의 연속이네요.
그게 싫진 않아요. 일이라기보다는 배우로서 진심으로 작품을 마주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작품을 보는 것 외 연기 근육을 키우기 위해 하는 게 있어요? 취미가 될 수도 있고.
동물 다큐멘터리 보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물소도, 사자도 살기 위해 계속 달려요. 서로 잡아 먹힐까 봐 달리고, 잡아먹어야 해서 달리죠. 러닝타임 대부분이 달리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그걸 숨을 참으며 보고 있단 말이죠. 왜 이걸 넋 놓고 보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이거예요. 그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니까. 거기서 나오는 원초적인 눈이나 에너지가 화면을 뚫고 전해지는 거죠. 몰입하게 만드는 에너지에 대해 고민도 해보고, 그들의 눈빛이나 표현을 연기에 접목할 때도 있어요.
대화를 나누다 느낀 건데, 재욱 씨도 상대방을 집중시키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낮은 목소리, 적당한 대화 속도, 골똘하는 모습, 지그시 한 곳을 응시하는 눈이 그래요. 지금까지 모습에서는 욕심이나 욕망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일하면서 탐욕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나요?
물론 있죠. 연기할 때 내가 보여줘야 하는 게 명확한 신이 있어요. 1화부터 N화까지 제가 한 행동, 쌓아온 서사가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이 있거든요. 그 마지막을 저는 커튼콜이라고 생각하는데, 커튼콜에 이르기까지 제가 보여줘야 하는 것을 정말 잘해내고 싶어요.
예를 들면?
<도도솔솔라라솔>의 선우준은 초반에 말수도 적고 늘 날 서 있는 아이예요. 그 이유가 친구의 죽음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요. 친구가 교통사고가 나는 순간 제 얼굴이 타이트하게 잡히면서 표정이 싹 변하거든요. 그 신으로 모든 서사가 설명되고 궁금증이 풀리는데, 그런 부분을 제대로 해내고 싶었어요. 그게 한 장면이 될 수도, 한 회차가 될 수도 있고요. 결국 제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과 힘을 싣는 작업이죠.
일상 속 이재욱의 모습도 궁금해요.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보통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신나서 떠들게 하는 주제가 있나요?
주로 작품을 함께한 친구들을 만나요. 보통 해 뜰 때까지 수다를 떠는데, 무슨 얘기를 했나 곱씹어보면 작품 얘기밖에 없어요.(웃음) 각자 촬영 중인 드라마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최근에 어떤 작품을 재미있게 봤는지, 뭐 이런 것들이죠. 매일 만나도 자리가 길어져요.
그럼, 연기 외 요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뭔가요?
내년에 군대를 가요. 1년 6개월의 시간이 보람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공백에 대한 불안감도 있나요?
초반에는 좀 불안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제가 단체나 사회 생활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 불안한 감정도 금방 떨쳐내고 잘 지낼 것 같아요. 저 스스로는 공백이 있을 수 있어도 시청자와 팬들에게는 제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공백을 작품으로 채우고 싶은 거네요. 넷플릭스 <탄금>(가제)도 예정되어 있죠.
현재 논의 중인 작품도 많으니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해보려고 해요. 남은 2024년과 2025년은 계속 촬영의 연속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오늘은 좀 쉬겠죠? 끝나고 뭘 할 거예요?
사실 어제 촬영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요. 얼른 가서 눈 좀 붙여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