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찬영이 새로이 보는 것들
윤찬영이 공명하고, 증명하고 싶은 것.
촬영 모니터링을 하면서 “신기하다”는 말을 유독 많이 하던데. 어떤 부분이 그렇게 신기하게 다가왔어요?
그간 보지 못했던 내 표정을 발견한 것 같아서요. 내가 이런 분위기, 색깔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 싶었어요.
평소 진중하고 차분해 보인다는 말 자주 듣죠?
맞아요. 그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결국엔 돌고 돌아 본래 모습을 찾게 돼요.
탈피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예요? 배우로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같은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차분하고 진중한 얼굴을 가졌다는 점은 배우로서 강점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질 수도 있으니까. 연기를 떠나 스스로 싫증 날 때도 있어요. 이전부터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거든요.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진 거예요.(웃음) 그러다 문득 내 안에 다양한 모습을 쌓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젠 조금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움직여보려 노력해요.
확실히 윤찬영의 얼굴에서 진중함이 사라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긴 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연기한 작품 중 가장 ‘나답지 않다’고 느낀 역할을 꼽자면요?
이번에 공개될 드라마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속 ‘송이헌’이요. 이만큼 원초적이고 센 캐릭터를 맡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연기하는 내내 더 즐거웠어요.
대학에 가고 싶은 조폭 ‘김득팔’이 열아홉 고등학생 송이헌의 몸에 빙의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죠. ‘빙의’라는 신선한 키워드를 활용한 만큼 배역을 연구할 때 고심하는 부분이 많았겠어요.
그럼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빙의된 인물을 나타내기 위한 당위성이었어요. 조폭이 자기보다 어린 고등학생들과 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내가 너희보다 인생 선배다’라는 마음가짐이 기저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걸음걸이,눈빛, 표정 모두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죠.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뚫어져라 쳐다보고요.(웃음) 거기에 작중 본체 역할인 이서진 선배님의 말투나 제스처 같은 것도 내 몸에 맞춰 조금씩 흡수하며 체득했어요. 시청자가 송이헌이라는 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도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대본을 보면서 ‘비현실적이다’,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어느 지점에서 ‘이 작품이다’ 하는 확신이 섰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평소 상상을 자주 하는 편이라 (이 작품의 내용이) 어렵지 않게 다가온 것 같아요. ‘40대 조폭 아저씨의 영혼이 고등학생 몸에 들어온다면?’이라는 소재 자체의 생경한 힘도 있고요. 그 소재를 바탕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이나 영화 <당신의 부탁> 등 학생 역할을 여러 번 맡았어요. 인물마다 서사가 다르다지만, 같은 신분의 역할을 여러 번 소화한다는건 어려운 일이기도 할 텐데요.
글쎄요. 같은 교복을 입어도 작품의 장르와 소재에 따라 확 달라진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이번 작품의 경우만 봐도 누아르, 판타지적 요소가 섞인 만큼 일반 학원물과 다른 느낌이잖아요. ‘학생’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하기보다는 작품과 캐릭터가 주는 관계성을 찾는 데 주력한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어떻게 세계관을 굳혀나갈지, 어떤 모습으로 그려나갈지 해답이 얼추 나오거든요.
노래할 때도 공명점이 울리면 그 순간 진득한 감동이 생겨나잖아요.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이 만날 때의 울림도 그런 지점인 거죠. ‘교차점을 찾아간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어요.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이청산’이라는 입체적 인물이 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네요. 돌이켜보면 좀비물이라는 비현실적 장르 안에서도 이청산이 성장하는 과정은 유독 설득력 있었어요.
감사합니다.(웃음) 작중 ‘남온조’를 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는 만큼 이청산이 성장하는 모습도 더 설득력 있게 비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극 후반부의 “나는 이 학교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다”라고 외치며 희생하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고민이 컸죠. 이청산의 마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었거든요.
대본의 그 파트를 읽고 나서 아쉽지는 않았나요? 당시 이청산을 살려내라는 대중의 반응도 많았는데.
그러니까요. 정말 감사한 부분이죠. 사실 촬영 중간중간 대본을 받았는데, (대본이) 완성될 때마다 좀비가 될 배우에게 “무술, 안무 연습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해요. 좀비로 변하는 과정을 미리 연습하는 거죠. 다들 그 ‘연습 통보’를 들을 때마다 절망에 빠지곤 했어요.(웃음) 근데 막상 제가 그 소식을 접하니 오히려 담담하더군요. 받아들이기에 오히려 수월했어요. 물론 이청산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분이 많다는 점은 분명 감사하고 뜻깊은 일이죠.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결실을 맺은 기분이라고 할까.
한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 촬영 이후 연기를 온전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배우로서 그다음 단계로 성장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대중의 반응이죠. 단순히 ‘내가 즐기니까 다른 분도 좋게 봐주시겠지’라고 느끼는 게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뤄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을 지나야 비로소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요. 왜, 노래할 때도 공명점이 울리면 그 순간 진득한 감동이 생겨나잖아요. 그런 지점인 거죠. 대중이 원하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이 만날 때의 울림은. ‘교차점을 찾아간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어요.
좋은 사고방식이네요. ‘교차점을 찾아간다’는 그 말이 묘한 설득력을 주는 것 같아요.
말이 그렇지, 쉽지는 않아요.(웃음) 그래도 걸어온 길을 토대로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한 단계라도 레벨 업되지 않을까요? 늘 어떻게 하면 한 사람으로서, 연기자로서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해요.
아역 배우에서 좋은 성인 연기자로 거듭나는 과정 중에도 그런 고민을 했나요?
그럼요. 사실 아직 그만큼 좋은 연기자로 거듭나진 못한 것 같아요. 성인이 되고 지금까지 성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적응해야 할 부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죠. 또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한다는 마음이거든요. 내가 단단하게 가꿔온 것을 중심으로 새롭게 뻗어나가고 싶어요.
<지금 우리 학교는>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이전에 아역 배우로서 <생일>, <어제 일은 모두 괜찮아>, <당신의 부탁> 등 독립 영화에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 바 있죠. 그때의 경험이 방금 말한 ‘가꿔온 것’의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네요.
맞아요.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촬영하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대부분 현장 분위기가 따뜻했거든요. 그래서 촬영장 시스템이나 작업 방식 등 현장 요소를 보다 안정적 상태로 체득할 수 있었어요. 가끔 작품 GV를 하게 되면 당시 촬영진이 다시 모일 기회가 있는데, 그때는 오래된 고향에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그만큼 내게 (독립 영화 현장은) 연기 생활의 밑바탕 같은 곳이죠.
독립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중에서도 임수정 배우와 함께한 <당신의 부탁>은 윤찬영이기에 보여줄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기일에 제사 지내는 장면을 인상 깊게 봤다는 후기가 많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수정 선배님과 둘이 집에서 쪼그려 앉아 케이크 하나 두고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었죠. 당시 열일곱 살이라 ‘제사’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어딘가 쓸쓸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된 지금 다시 보면 또 다른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여러 독립 영화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독립 영화계 샛별’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었죠.
부끄럽네요.(웃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연기에 대한 순수함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뭐든 해낼 것 같은 그런 순수함. 당시에는 연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랐거든요.
어떤 부분이 달랐는지 궁금하네요. 지금도 연기에 관해선 한없이 순수해 보이거든요.
지금은 연기가 삶의 내부에 위치한다면, 그때는 연기 속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 것 같아요. 익숙지 않은 분야다 보니 그 경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느꼈거든요. 좋은 자극을 찾고 발돋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죠.
누군가의 마음을 설득하는 과정, 감정의 기억을 이끌어내는 과정
모두 여전히 어렵지만 그 자체만으로 즐거워요. 지금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이 분야를 쭉 일궈내고 싶어요.
아역 배우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좋은 자극’이 있다면?
열여덟 살 때 SBS 드라마 <의사 요한>을 촬영한 적이 있어요. 작중 지성 선배님이 혼수상태인 저를 살리기 위해 CPR(심폐소생술)을 하는 신이 있었거든요. 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도 지성 선배님의 혼신을 다하는 연기가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끝나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연기자로서 가장 행복한 점’을 꼽자면 이런 부분 같아요. 엄청난 연기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 마치 유성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황홀한 형태로 다가오거든요. 그런 자극이 좋은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요.
또래 친구보다 삶의 동기부여를 일찍 깨우친 셈이네요.
제가 걷고 있는 길에서는 빠를 수 있지만, 결코 특별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살아가고 추구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니까요. 그리고 연기자라는 직업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해야 할 필요도 있더라고요. 나중에 작품 안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해요.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윤찬영은 ‘언제든 연기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연기가 삶의 내부에 위치한다’고 했는데, 그 부분을 가장 잘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연기 연습을 하다 보면 가끔 배역에 집중이 잘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때 가장 (연기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죠. 사실 지금 제게 연기는 자신 있는 분야라기보다는 고민을 안겨주는 숙제 같아요. 누군가의 마음을 설득하는 과정, 감정의 기억을 이끌어내는 과정 모두 여전히 어렵지만 그 자체로 즐거워요. 지금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이 분야를 쭉 일궈내고 싶어요. 그렇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자극을 보여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