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LOSIVE
COLLABORATION
역사를 바꾼 두 브랜드의 폭발적 컬래버레이션.
7월엔 볼로냐로 출장을 다녀왔다. 이탈리아 북중부에 위치한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주도인 볼로냐와는 인연이 없었다. 여행길에 로마나 피렌체에는 가봤지만, 볼로냐 는 생소했다. 기껏 알고 있는 거라고는 ‘세계 최초의 대학이 생긴 곳’ 또는 ‘라구 소스 스파게티’가 탄생한 곳이라는 정도. 그리고 인근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슈퍼 스포츠카 공장이 있다는 것. 출장의 단서는 두 브랜드였다. 리차드 밀과 페라리. 그렇게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럽의 날씨는 여름을 앞두고 때이른 폭염이 계속되었고, 이제 막 팬데믹에서 벗어난 공항은 여러 의미로 분주했다.
사실 이 두 브랜드의 협업은 익숙하다. 페라리에서 발행하는 매거진의 백 커버에선 리차드 밀의 모델을 만날 수 있고, 리차드 밀의 다양한 콘텐츠에서도 페라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아니, 사실 이러한 활동이 없더라도 두 브랜드는 파트너로 인식할 만큼 닮은 구석이 많다. 21세기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의 역사를 다시 쓰는 ‘리차드 밀’,그리고 20세기 모터 레이싱의 가장 찬란한 이름인 ‘페라리’. 그래서인지 그들의 첫 번째 협업 소식을 듣고 묘하게 흥분됐다. 세계가 멈춰 있는 동안 두 브랜드는 치열 하게 ‘특별한 무엇’을 준비했던 것이다.
일정 기간 머문 곳은 볼로냐 외곽의 한적한 리조트였다. 와이너리와 골프장, 바이 크 코스를 포함한 대규모 부지였는데 행사 기간 내내 곳곳에 페라리 차량과 리차드 밀 마크가 보였다.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 포르토피노, F8 트리뷰토, 엔초 페라리까지 전시장에서나 볼 법한 차들이 즐비했다. 인상적인 점은 론칭 행사에 앞서 며칠 동안 리차드 밀 담당자들은 단 한 차례도 신제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심지어 함께 동행한 한국 담당자도 단서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재미있었던 것. 브랜드 담당자를 비롯해 행사에 초대받은 전 세계 VIP들은 서로 차고 있던 리차드 밀 제품을 감탄하며 번갈아 착용해보았다. 모델당 단 몇 피스만 제작하는 브랜드의 이색적 광경이었다. 그렇게 기대감은 계속 커져갔다.
본격적인 행사는 페라리 공장과 박물관 투어였다. 볼로냐에서 차로 한 시간쯤 달리다 보면 도착하는 소도시 마라넬로(Maranello)는 말 그대로 ‘페라리의 도시’였다. 페라리의 모든 차량이 생산되는 곳답게 도시 곳곳이 페라리 철자와 브랜드 엠블럼으로 물들어 있었다. 1974년 처음으로 페라리 차량을 생산한 마라넬로 공장은 브랜드 설립자 ‘엔초 페라리’의 열정과 자부심 그리고 브랜드의 미래가 담긴 곳이다. 약 1만5000m2 규모의 공장에선 페라리의 심장인 6기통과 8기통, 12기통 엔
진과 페라리의 미래인 6기통 엔진을 탑재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를 생산한다. 물론 차량의 다른 부속품도 제작하고 조립도 이뤄지는 곳이지만, 페라리 제작에 대해 말하려면 항상 엔진이 앞서야 한다.
엔초 페라리는 평소 버릇처럼 “나는엔진을 만든 다음 그것에 바퀴를 달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철학은 공정 과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그 증거로 모든 공정의 초점은 엔진에 맞춰져 있다. 마라넬로 팩토리엔 도약하는 말, 즉 프랜싱 호스(Prancing Horse) 배지를 부착한 모든차량에 고성능 엔진 부품을 공급하는 127대의 엔지니어링 기계가 있다. 기계별로직경・공차・형상을 다루는 108개의 각기 다른 도구가 탑재되어 있는데, 이는 크랭크케이스 한 개를 만드는 데 최대 80개의 도구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엔진 조립관, 차체 용접 구역, 페인트 숍 등 세밀하게 쪼갠 디테일한 공정이 무수한 프로페셔널 작업자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안내자는 공정 과정을 오랜 시간에 걸쳐 설명했는데,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 같았다.
워치메이킹의 레코드를 갈아치운 마스터피스 RMUP-01
리차드 밀과 페라리의 협업으로 탄생한 첫 시계는 페라리 팩토리에서 공개했다. 유쾌함과 묘한 흥분감이 이어지던 칵테일파티 장소는 어느새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첫 장은 1분 남짓한 영상이 열었다. 말 그대로 종잇장처럼 얇은 형태의 금속 시계가 스크린에 등장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짧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전 세계 기자들과 며칠 동안 나눈 추측, 가령 RM 모델 특유의 볼드한 디자인에 레드 밴드 혹은 페라리의 상징인 옐로 방패에 담긴 경주마 ‘카발리노 람판테(Cavallino Rampante)’ 심벌을 시계 어딘가에 새겼을 거라는 예상이 모두 빗나간 순간이었다. 신(thin) 워치가 리차드 밀의 다음 프로젝트라니, 뭔가 크게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름만으로 압도적 존재감과 상징성을 지닌 두 브랜드의 협업은 현존하는 가장 첨예한 컴플리케이션 워치 기술을대거 탑재한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피스엔 예상보다 무수한 획기적 발상과 지난한 개발 과정 그리고 첨단 기술이 압축되어 있었다. 이윽고 RMUP-01에 담긴 혁신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RMUP-01이라는 모델명으로 탄생한 리차드 밀 신제품은 페라리와 파트너십을 통해 선보이는 최초의 타임피스이자 출시 직후 워치메이킹의 모든 레코드를 갈아치운 울트라 플랫 모델이다. 케이스 전체 두께가 1.75mm에 불과하면서도 리차드 밀의 시그너처인 토노형 디자인을 유지하는 놀라운 초박형 케이스를 실현했다. 여기에 리차드 밀과 페라리가 공유하는 철학, 즉 탁월한 기술력과 혁신적 발상 그리고 섬세한 디테일을 녹여냈다. 시계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창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결과물이다. 전체 5등급 티타늄 소재의 울트라 플랫 케이스부터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무브먼트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히 구동하는 강인한 내구성은 시계라는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워치메이킹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했다.
RMUP-01의 케이스 전체 두께가 1.75mm에 불과할 수 있었던 건 특허받은 독보적 설계 방식의 울트라 플랫 이스케이프먼트 부품을 탑재했기 때문이다. 리차드 밀은 무려 4년간의 연구 개발을 통해 혁신적 방식을 실현했다. 새로운 울트라 플랫 이스케이프먼트는 티타늄 소재의 가변 관성 밸런스 휠을 탑재했다. 전통적 이스케이프먼트 설계 방식인 다트(dart)와 안전 롤러(safety roller) 부품을 사용하는 대신 외부로부터 충격 발생 시 팔렛 포크(pallet folk)에서직접 뱅킹(banking) 기능을 작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포크 길이를 늘리고 혼(horn) 디자인을 수정했다.
이를 통해 팔렛 포크 높이를 현격히 감소시켜 얇은 두께를 구현 할 수 있었다. 가변 관성 밸런스 휠은 무브먼트의 조립 및 해체 시, 혹은 충격 등 외부 영향에 대처해 장기적으로 무브먼트의 정확성을 돕는 기능이다. 레귤레이터 인덱스를 제거하고 6개의 가변 추(adjustable weights)를 사용해 보다 반복적으로 관성 조절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수준의 워치메이킹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선 수년간 끝없는 도전을 통해 축적한 모든 지식과 시계 제작 분야의 모든 표준 방식을 다각도로 고려하고 준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오데마 피게 르 로클(Audemars Piguet Le Locle)’ 실험실의 엔지니어들과 정확한 연구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작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줄리앙 보이아(Julien Boillat) 리차드 밀 케이스 테크니컬 디렉터
대담하고 견고한 철학으로 탄생한 타임피스
리차드 밀은 이토록 얇은 타임피스를 제작하기 위해 와인딩 메커니즘 역시 새로운 접근 방식을 택했다. 지름이 1.5mm인 와인딩 스템(winding stem)을 제거하고 무브먼트 휠처럼 케이스의 일부가 된 2개의 크라운을 추가했다. 10시와 11시 사이에 자리한 크라운은 기능 셀렉터로, 전용 스크루를 이용해 회전해 와인딩 혹은 시간조정 기능을 선택할 수 있다. 또 총 2개의 사파이어 크리스털 중 하나는 시・분을 나타내는 핸드를 볼 수 있도록 했으며, 다른 하나는 밸런스 휠-스프링을 조립한 레귤레이터 부분에 자리해 무브먼트의 구동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리차드 밀은 크리스털을 제작할 때 완벽한 저항력을 견디는 최적의 지름 길이를 유지한 채 두께를 0.2mm로 구현했으며, 수차례 테스트 검증을 완료했다. 모든 재료는 고도로 얇게 설계했기에 전 공정 단계를 훨씬 까다롭고 면밀하게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피게르 로클과 새로운 형태의 이스케이프먼트인 울트라 플랫
이스케이프먼트를 설계했다.
했다. 5등급 티타늄은 생체에 적합한 소재로 눈에 띄게 가볍지만 내
부식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RMUP-01의 베젤과 백케이스는 모두 5등급 티타늄 소재로 제작했다. 여기에 10m까지 방수가 가능하다. 얇은 워치의 경우 내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리차드 밀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5000g 이상의 중력 가속도를 견뎌낼 만큼 무브먼트 안정성이 탁월함에도 무브먼트의 두께는 1.18mm, 총중량은 2.82g밖에 되지 않는다. 파워리저브는 45시간 제공.
리차드 밀의 무브먼트 기술 담당자 살바도르 아르보나(Salvador Arbona)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얇은 콘셉트 워치와 확연히 차별화된 요소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과감하고 얇고 평평한 타임피스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갖춘 완벽한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리차드 밀 타임피스는 일상에서 착용할 수 있는 시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두 번째로 재생한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페라리차량을 타고 숲길과 도심, 서킷을 이동하는 남자. 조깅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그의 평범하면서도 모던한 일상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모든 순간 그의 손목엔 RMUP-01이 채워져 있다. 극한의 순간부터 평범한 일상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하는 시계, 그것이 리차드 밀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페라리 박물관 투어를 했다. 워치메이킹의 레코드를 갈아치운, 당대 가장 혁신적 시계를 만난 흥분은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 페라리의 역사적 모델을 돌아보면서 두 브랜드의 협업이 어떻게 이토록 웅장한 결과물을 낳을 수 있었는지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뮤지엄 맨 마지막 섹션에 마련한 페라리 우승의 역사를 나열한 코너에선 파편적 퍼즐이 맞춰졌다. 르망24를 비롯해 포뮬러1까지 각종 레이싱 역사를 바꾼 페라리의 승리 역사 그리고 21세기에 등장해 워치메이킹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가 지향하는 방향은 명확했다. 멈추지 않는 혁신, 역사를 바꾸는 피스. RMUP-01엔 그 모든 것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