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운의 용기
로운은 지금 확신에 가득 차 있다.
“배우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할수록 더 불안해할 거고,
그만큼 더 성장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긴 헤어스타일은 처음이죠?
다음 작품을 위해 기르고 있어요. 짧은 스타일을 좋아해서 자르고 싶긴 해요. 여러모로 불편한 게 많더라고요.(웃음)
오늘 촬영한 공간은 마음에 들었나요?
앤티크하면서 독특하더라고요. 심지어 전기도 안 들어오고.(웃음) 무엇보다 결과물이 만족스럽게 나와서
좋아요. 공간도 한몫한 것 같아요.
인상적인 스폿이 있었나요?
나무가 되게 좋았어요. 나무 앞에서 로 앵글로 찍은 컷이 있는데, 보테가 베네타만의 색깔이 잘 묻어난 것 같아요. 정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이 브랜드의 사진을 보면 희미하게 밝은, 조용한 가운데 디테일이 살아 있는 느낌을 받거든요. 이번 화보도 어둠 속에서 오묘한 분위기가 드러나서 좋았어요.
이제 근황을 들어볼까요.
드라마 <혼례대첩> 이후 푹 쉬었습니다. 처음으로 팬 미팅 투어도 했고요. 대본도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지냈어요. 많이 먹고 집 밖에 잘 안 나가다 보니 살이 80kg까지 찐 적도 있어요. 누워서 유튜브나 영화만 보면
서 ‘잉여로운’ 휴식기를 보냈습니다.(웃음) 이제 다음 작품을 해야죠. 그간 필모를 보면 시대극에서의 캐릭터가 강렬해서인지 유독 시대극을 많이 한 느낌이에요. 의도한건 아니에요.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냐, 아니냐의 문제였지. <연모>는 오로지 사극에 도전하고 싶어 선택했고, <혼례대첩>은 코미디 장르를 하고 싶어 선택한 거였어요. 코미디가 가장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피식대학’, ‘빠더너스’ 영상을 예전 것까지 다 챙겨 보고 있어요. 코미디의 의외성이 재미있고, 그 지점을 배우고 싶습니다.
장르에 대한 욕심이 붙기 시작했나요?
필모를 보면 멜로, 로맨스 작품이 꽤 지분을 차지하잖아요. 물론이죠. 그래서 드라마 <내일> 작품을 할 때 좋았어요. 멜로 작품만 계속 하다 다른 장르에 대한 갈증이 있던 차에 고른 작품이에요. 언젠가 시청자나 제작자들이 멜로를 연기하는 로운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찾아올 텐데, 그땐 어떤 기쁨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됐죠. 빨리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일>은 자랑스러운 필모 중 하나입니다.
배우로서 9년이라는 시간의 밀도는 어땠나요? <혼례대첩>으로 남자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최근 소화하는 작품 수가 눈에 띄게 늘었던데.
연기에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게 2019년 즈음일 거예요.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서 첫 주연을 맡았는데, 압박이 심했어요. 잠을 설치는 데다 도망가고 싶기까지 했죠. 그러다 몇몇 신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그때 연기의 맛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다음 작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에서는 의외성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문이나 주어진 상황에 국한하지 않는 거요. 옆에 물병이 있으면 그 물병을 이용해 뭔가를 시도해볼 수도 있고.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면 연기에 도움 되는 것이 많다는 걸 깨달았죠.
현장에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는데, 여전히 작품을 준비할 때는 바닥을 찍는 기분이에요. 촬영 전까지도 감독님, 선배들을 붙잡고 “어떻게 해야 해요?” 하며 바들바들 떨어요. 달라진 점이라면, 그 시간을 존중하게 됐다는 거예요. ‘아,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불안해야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구나’. 그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됐어요.
잠잘 때 베개 밑에 대본을 넣어두는 것도 여전하겠네요?
물론이죠.(웃음) 머릿속에 대사가 들어올 거라는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심리적 안정을 위한 루틴이죠. ‘꿈이라도 한 번 더 꾸겠지’ 하는 생각으로. 제가 이 길을 진지하게 생각할수록 더 불안해할 거고, 그만큼 더 성장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9년 차인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 숫자가 부담스럽나요?
아니요. 별탈 없이 열심히 일했다는 방증이니까요. 실력적인 부분은 스스로 평가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런데 그 평가가 두렵진 않아요. 제가 혼자 예술을 하는 게 아니고, 대중문화 예술 범주에서 연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평가는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그 평가는 엇갈리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평가에 흔들리지 않기는 쉽지 않잖아요. 부정적 평가는 어떻게 소화하는지.
좋은 자극제가 돼요. 나중에 인정받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거든요.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일을 즐기고 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받는 날이 올 거라고 확신해요
작품이 끝나면 인스타에 소감을 올리더군요. 작품이 끝날 때마다 하는 루틴이 있나요? 장문의 글을 보면 애정이 묻어나더라고요.
심지어 드라마 <이 연애는 불가항력>은 마지막 촬영이 가까워질 때 제발 누가 한 회만 더 써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유’에 대한 애착이 컸어요. 캐릭터에 오랜 시간 집중하다 보면 분명히 배울 점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며 보내주는 거죠.
모든 끝에는 아쉬움과 배움, 결심이 있기 마련이죠.
맞아요. <혼례대첩>은 준비하는 기간이 너무 짧았어요. <이 연애는 불가항력>의 ‘신유’를 보내주기도 전에 대본 리딩을 해야 했고, 촬영도 해야 했죠. 다행히 잘 마무리했지만, 다음부터는 작품을 연달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저는 캐릭터에 젖어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배우란 걸 알게 된 거죠.
일에 들어가기 전 버퍼링이 긴 타입인가 봐요.
네. 정수기처럼 버튼을 누른다고 바로 온수가 나오는 게 아니라.(웃음)
지난해 연기에 전념하겠다는 글을 직접 남겼어요. 어떤 틀을 깰 때는 주변에서 잡음이 들리기 마련인데 어떤 심경이었나요?
부담감이 컸어요. 모든 사람에게 상황을 다 이해시킬 수는 없잖아요. 오해와 미움의 말을 보다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더라고요. 평소 친한 이적 형에게 전화해 “형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이 일을 했어요?” 하고 물으니 “다 지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주변의 격려 덕분에 이제는 ‘내가 더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멋진 화보도 찍고 해외에서 팬 미팅도 하고. 제게 주어진 행복에 비하면 이런 작은 고통쯤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확신이 든 계기가 있나요?
정말 단순하게 재미를 느껴서예요. 예전엔 캐스팅이 들어오면 ‘나보다 잘하는 분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선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멍청이 같은 생각 좀 그만해라”라고 말하더라고요. “만약 네가 그 캐릭터를 맡지 않으면 ‘로운이 연기하는 그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요. 불필요한 생각으로 저 자신을 계속 갉아먹던 때가 있었어요. 제가 이 선택을 하게끔 용기를 준 건 주변의 선배,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동료 배우일 수도 있어요. “너 잘할 수 있고, 잘하고 싶잖아. 그럼 하면 돼. 사람은 진짜 원하면 움직이게 되어 있어.” 생각해보니 진짜 원하더라고요. 네! 그래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오늘 화보의 키워드를 꼽자면 공간과 초월이에요. 혹시 초월하고 싶은 게 있나요? 뛰어넘고 싶은 한계 같은 것.
전혀 없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저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싶고, 저 위치에 오르고 싶고. 뭐 이런 욕망과 간절함이 있어야 생산적 활동을 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어떤 지점을 초월해버리면 인생이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불안과 고통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여요.
어느 정도는 그래요.(웃음) 정확하게 보셨어요. ‘No Pain, No Gain’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뭔가를 견뎌내고, 이겨낸 뒤에 따 먹는 사과가 더 달콤하죠.
맞아요. 저도 마감 끝나고 얻은 휴가가 가장 달콤하거든요.
그렇죠. 어떤 걸 집요하게 파고들어 방대한 자료를 찾아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때,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라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그냥 미치는 거잖아요.
김석우와 로운의 경계는 뚜렷한 편인지 궁금해요.
오프라인에서 로운과 김석우의 경계는 없어요. 예를 들어 팬 미팅을 할 때 제 모습은 평소 김석우와 다르지 않아요.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그런데 미디어 속 제 모습은 석우와는 다른 부분이 있죠.
그러게요. 저도 대화를 나눠보니 미디어에서 비쳐지는 모습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있네요. 말을 아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스스럼없는 모습이라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는 제 일기장 같아서 최대한 솔직하게 하려고 해요. 과거에 한 인터뷰를 즐겨 보는 편인데, 당시 내 생각을 돌아볼 수 있어 좋아요. 팬들이 인터뷰를 찾아 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인터뷰를 보는 게 김석우와 로운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아닐까 싶어요. 여담이지만 사전에 질문지를 받으면 곱씹어보는 편인데, 관심이 가는 질문들이 있어요. 질문자가 내게 얼마큼 관심이 있는지도 느껴지고.
니트 스웨터와 발라클라바,
블랙 팬츠,길이 조절 가능한
인트레치아토 스트랩과 트위스트 구조가
인상적인 라지 지그재그 백
모두 Bottega Veneta.
제게 주어진 행복에 비하면
이런 작은 고통쯤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관심 가는 질문은 뭐였을까요?
초월에 관한 질문이요. 저를 고민하게 만들었어요. 근데 생각보다 답이 빨리 나오더군요.
그럼 초월에 관한 질문 하나 더 해볼게요. 상상을 초월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나요?
아! 있어요. 일본 팬미팅에서 좋아하는 다마키 고지라는 가수의 ‘멜로디’를 불렀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 거예요.만약 내 마지막 순간을 정한다면 지금이고 싶을 만큼 행복했어요.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에 감정이 북받친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 서울 팬 미팅에서 패닉의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를 불렀을 때 다시 한번 똑같은 감정을 느꼈어요. 20대를 버티게 해준 곡이죠. 그 노래를 공연하기 3일 전 인스타에 올렸어요. 팬들에게 김진표 선배의 랩 부분과 프리 코러스 부분을 같이 불러줄 수 있겠느냐고. 첫날 공연에선 긴장해서 인이어를 못 빼고 부르다가 둘째 날 공연에서 오롯이 즐기고 싶은 마음에 인이어를 다 뺐어요. 관객의 소리를 듣는데 ‘진심으로 나를 응원하고 좋아해주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건 아마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평소 진중한 모습 때문에 ‘바른 남자’ 이미지가 강해요. 오늘 인터뷰를 해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고요. 아직 악역을 못 만난 데는 그런 이미지가 영향을 미친걸까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너무 기대돼요. 누군가 그걸 깨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다려지고요. 한명쯤 제 상식적이지 않은 모습, 이면을 분명히 보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기회가 오면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앞으로 로운에게 또 다른 꿈이 있을까요?
“네가 행복한 게 끝이 아니라 네 행복을 나누는 데서 행복감을 느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신 분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직업적으로는 딱히 바라는 게 없고요. 배우로 살면서 다양한 상황과 사람을 경험해볼 수 있으니까요. 지금 너무 만족해요. 다만, 한 사람으로서 행복을 나누는 기쁨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
하셨나요?
새벽 1시 인터뷰라 걱정했는데, 오히려 충전이 되네요.
그럼 들어가기 전에 근처 을지로에서 소맥 한잔 마시면 되겠네요.(웃음)
그렇지 않아도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웃음) 저도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각자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 마칠까요? 네. 늦은 시간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웨이드 레더 셔츠, 팬츠, 헤드독 레이스업 슈즈,
인트레치아토 디테일을 접목한
패디드 나일론 소재 크로스로드 브리프케이스
모두 Bottega Vene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