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는 계속 걷는 중이다
회화적 하정우와 영화적 하정우의 기막힌 조율.
요즘 하루는 어떻게 흐르고 있나?
작업실에서 물감 냄새 맡으며 붓과 씨름 중이다.
10월 16일이 전시 오픈인데, 직전까지도 그리는 건가?
개학 앞두고 방학 숙제 몰아서 하지 않았나? 그런 거다.(웃음) 전시 작품 수가 50점 정도니 이전보다 많기도 하고.
전시 주제는 정했나?
전시 주제는 정했나? ‘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 <대부>의 대사다. 가족의 일은 절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꾸준히 개인전을 열어왔지만 굳이 화가로서 인터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연예인 화가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도 무시할 수 없었고, 전업 작가들에게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내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15년간 비밀스러운 작업이었다. ‘내 작업에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면 언젠가는 작가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올해 그 작업물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려 한다. 전시명은 역설적 의미로 붙인 거다.
<대부>는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보는 영화라고 들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형배’를 연기할 때도 <대부 2>의 로버트 드니로를 많이 참고하지 않았나.
맞다. <대부> 제작 과정을 다룬 다큐 영화 <디오퍼> 봤나? 엄청나다. 난 보면서 많이 울었다. 코폴라 감독과 파라마운트 관계자가 말론 브란도의 집에 찾아가 비토 콜리오네 역할을 두고 미팅했을 때의 일화가 있다. 말론 브란도가 티슈를 말아 입에 물고 구두약을 머리에 바르면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며 그 자리에서 비토 콜리오네의 모습을 만들어 보여줬는데, 영상으로 보니 감동이 밀려오더라. 또 모든 배우가 캐스팅된 뒤 코폴라 감독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말론 브란도가 자리 배치를 한다. “첫째는 여기 앉고, 둘째는 저기 앉고, 딸은 여기에 앉고”라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짜 한가족인 것처럼. 대부 마니아로서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는 장
면이 많다.
역시 <대부> 이야기가 나오니 텐션이 다르다.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간 화가로서 인터뷰하는 게 조심스러웠다고 했는데, 그림에 대해 좀 더 질문해도 괜찮나?
얼마든지.(웃음)
대학 졸업 후 불안을 떨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배우로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는 연기만 하기도 바빴을 텐데, 붓을 놓지 않은 이유는?
그게 참 웃기다. 대학을 졸업하니 커리큘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매일 학교에서 강의를 듣다 이제 혼자 헤쳐나가야 했다. 그 불안을 떨치기 위해 나만의 커리큘럼을 만들었고, 그중 하나가 그림이었다. 졸업 후 친구들은 극단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난 영화가 하고 싶어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버티고 마음을 다잡게 해준 도구가 바로 그림이다. 이제는 습관처럼 그림을 그린다.
삶의 한 부분이 된 거군.
지방이나 해외 촬영을 갈 때 작은 캔버스 천을 항상 챙긴다. 방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게 그림을 그리는거다. 그리고 부적처럼 벽에 붙여놓는다. 남의 집이나 호텔에서 지낸다는 게 낯설고 공포감이 들 때가 있는데, 그림을 걸면 왠지 아늑한 느낌이 든다. 내 공간처럼.
배우, 감독, 화가를 오가는 삶. 나름 정해놓은 규칙도 있나?
작년에는 <로비>의 프리 프로덕션에 계속 매달려 있었다. 시나리오를 고치고, 촬영하고. 당시에는 다섯 점도 못 그렸다. 글을 쓰고 촬영할 때는 그릴 에너지가 안 생기더라. 근데 또 희한하게 연기할 때는 그림을 자주 그린다. 사실 배우는 감독의 디렉션을 받고 연기하는 거니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남은 에너지가 그림으로 옮겨가는 것 같다.
그 말인즉슨, 하정우는 창작 욕구가 강한 사람인가?
본능적으로. 어떻게 보면 창작 욕구는 생존 욕구일 수도 있겠다.
<멋진 하루>(2008)에서 병운의 걸음걸이와 뒷모습은 빈센트 갈로의 <버팔로 66>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연기뿐 아니라 빈센트 갈로의 행보 자체를 롤모델 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 역시 배우·감독·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다재다능한 인물이니까.
한때는 그랬다. 빈센트 갈로의 <버팔로 66>은 특히 인상적이었고. 사실 그 전에 찰리 채플린이 있다. 영화를 만들고 연기도 하고, 편집도 하고, 작곡도 하는 게 굉장히 놀라운 지점이고, 그런 재능을 동경한 것 같다. 사실 채플린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 너무도 피곤한 삶이겠지만, 막연하게 재미있는 인생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처럼 넓고 깊을 순 없겠지만, 나도 나이 들수록 연출과 연기, 그림 이 세 가지에 깊이감이 생기면 좋겠다. 그게 꿈이다.
오늘 모든 필모그래피를 읊을 순 없으니 이렇게 묻고 싶다. 다작을 한 만큼 인생의 굴곡이 필모그래피와 궤를 같이하겠다 싶은데, 삶의 방향을 틀어준 작품을 꼽아볼 수 있나?
군대 관련 영화를 10편이나 찍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내게는 군 복무 중 찍은 국군 홍보 영화 <크레파스>(1999)가 첫 영화다. <마들렌>(2003)은 나의 첫 상업 영화고. 두 작품 모두 엄청난 부담과 긴장 속에서 영화 작업에 첫발을 내딛게 해준 작품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무대에서 영화로 연기 전환을 하게 된 작품인데 당시 징그럽게 많은 테이크를 찍었고, 영화 현장에서 해볼 수 있는 시도는 다 해봤다. 그리고 <추격자>와 <국가대표>로 상업적 성공을 맛본 뒤 <황해>를 만난 건 감사한 일이다. <황해>라는 묵직한 영화가 배우로서 들뜨지 않도록 두 다리를 땅에 붙이게 해줬다. <범죄와의 전쟁>은 누아르 영화에 내가 어울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확인시켜준 작품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하나가 내게는 터닝 포인트다.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연기 재료는 일상에서 사유하는 것,
삶의 패턴에서 비롯한다. 그 모양새가 몸에 배어 연기로 표출되는 법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일상도 잘 보내야 한다.
<더 테러 라이브>도 배우로서 하정우의 확장성을 증명해준 작품 아닌가.
90여 분의 시간을 혼자 끌고 가야 하는 1인극인 데다 굉장히 연극적인 작품이다. 감독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배우고 깨달은 게 참 많다. 그 작품을 했으니 <터널>, , 그리고 최근작 <하이재킹>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나의 연기 인생에서 캐릭터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다.
연기 철학을 말할 때 ‘무의식’을 자주 언급하는 걸 보고, 무의식의 힘을 매우 신뢰하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아, 내가 그랬나?
“언제든 자연스럽게 꺼내 연기할 수 있게 무의식 창고에 이것저것 채워두어야 한다”, “무의식 속에서도 배우의 대사나 OST를 떠올릴 수 있게 영화를 수도 없이 반복해 본다”, 이런 말들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비열한 거리>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편지함에 폭탄을 넣고 돌아 나오면서 고개를 돌리는 횟수도 외우고 있지 않나.
맞다. 열세 번이다. 나는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연기 재료는 일상에서 사유하는 것, 삶의 패턴에서 비롯한다. 그 모양새가 몸에 배어 연기로 표출되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일상도 잘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작품을 쉬지 않고 하다 보면 인간 김성훈보다 다른 캐릭터로 사는 시간이 더 많았겠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거고, 내게 (즐겨 찾는 여행지) 하와이가 존재하는 거다. 걷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내 삶의 밸런스를 조율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물론 영화에서도 나라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떤 캐릭터의 가면을 쓰는 거고, 그림은 김성훈이라는 사람에게 내재된 것을 상형화한, 나의 회화적 설명서다.
여전히 걷나 보다. “생각을 멈추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이 문장을 보면 ‘걷기’는 하정우에게 묵언 수행처럼 보인다.
걷다 보면 살아가는 시간의 속도를 좀 늦출 수 있다. 차 타고 10분 거리를 한 시간 걸려 간다면 더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많지 않을까. 그래서 걷는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음악도 안 듣나?
전혀. 보고 들으며 풍경 속을 걸을 때 기분 좋은 순간을 자주 맞게 된다. 오감이 깨어나는 느낌이다. 초등학생 때 운동장에서 실컷 놀고 집 가는 길에 맡았던 꽃이나 풀 냄새처럼, 동네 냄새라는 게 있지 않나. 계절의 냄새도 있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걸 잊고 살게 된다. 무감각해지지 않기 위해 걷는다.
혹시 그리운 냄새가 있나?
하와이 공항. 하와이는 줄곧 도시에서 살아온 내게 시골집 같은 장소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장까지 걸어가는 통로가 있는데, 거기서 오래된 미국 카펫 냄새가 난다. 아~주 쿰쿰한. 하와이에 갈 때마다 변함없이 그 냄새가 풍기면 반갑다.
당신의 영상 인터뷰를 보면 참 맛깔스럽게 이야기한다. 이야기 전달자로서 감독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나?
그게 정확하다. 개봉 예정인 <로비> 역시 내가 일상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대중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골프장이란 게 참 재미있는 장소더라. 평소 점잖은 형이 골프채를 잡으니 승부욕이 올라 백팔십도 돌변하는 걸 봤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옆에서 지켜보니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더라. 골프장을 배경으로 숨겨둔 욕망이 삐쭉삐쭉 나오는 순간, 그 이야기와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하정우의 연기가 과하지 않아 좋다고 평한다. 당신의 연출작도 연기와 참 닮았다. 담백하게 재미있다. 감독으로서 지향하는 색인가?
일단 내가 블랙코미디를 사랑한다. 코엔 형제나 우디 앨런의 유머 스타일을 특히 좋아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부>를 애정하는 건 배우로서 이야기고, 감독으로서는 또 다르다.
<롤러코스터>와 <허삼관>, 이미 연출한 두 작품만 봐도 짐작이 간다. 특히 <롤러코스터>는 출연 배우가 모두 하정우처럼 연기하지 않나.
대사 속도부터 쓸데없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 모두 디렉팅했다.
그만큼 능청스러운 연기는 영화인 하정우에게 상징적인 부분이다. 하정우식 언어처럼. 본인에게 코미디는 어떤 의미인가?
아주 중요한 주제이자 소재, 메타포다. <로비>를 보면 또 새로운 질문이 생겨날 거라는 생각도 들고. <롤러코스터>와 <허삼관>은 색깔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다르다. <롤러코스터>는 굉장히 거칠고 주저함이 없다면, <허삼관>은 어떻게든 고상하게 잘 만들어 능청스럽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 두 가지가 버무려진 것이 <로비>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현장에서 많은 감독과 작업을 하면서 내가 어떤 시선과 어떤 목소리를 갖게 됐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렇다고 <로비>가 완성은 아니다. 감독 여정에 또 한 번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모든 환경을 치밀하게 세팅하는 감독이 있고, 가능성을 열어두는 감독이 있지 않나. 본인은 어떤가?
엄청 치밀하게 준비하는 편이다. 그런 다음 현장에서 그날 나올 수 있는 에너지와 즉흥성을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연극 무대가 내 연기의 시작이었으니, 영화를 준비할 때도 죽도록 연습한다. 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에게도 많은 연습을 강요하는 편이고. 대본 리딩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이 탄탄해야 즉흥성도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영화인으로서, 화가로서 어디까지 확장해나가길 바라나?
결국엔 한 가지다. 좋은 작품. 그걸 잘 수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거고. 내 연기가 더 깊게 발효될 수 있게끔 때로는 연출가가 된다. 또 감독으로서 안목과 기획력을 쌓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거고. 걷고 그리며 좋은 작품을 향해 정진하는 중이다.
좋은 작품은 뭔가?
재미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작품. <대부>를 이렇게 피 튀기게 이야기하고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후배에게 그런 작품을 남기고 싶다. 나의 궁극적 목표이자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