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겪은 이해우
성장과 변화, 그 분기점에 선 이해우.
“역할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 작품을 인생의 변곡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그런 벼랑 끝에 선 절실함이 컸어요.”
먼저 축하드려요. <카지노> 시즌 1 종방 직후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그만큼 ‘필립’의 존재감은 강렬했어요.
고맙습니다. 주변 분들에게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꿈같은 일이죠. 한동안 방황하던 제겐 그 자체로 큰 변곡점이 되었고요.
일상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요?
음, 어제는 자주 다니는 주유소 직원이 처음으로 얼굴을 알아보더군요. 무척 기뻤어요. 5년을 다닌 곳이거든요.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게 처음이다 보니 당황스럽지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최근 시즌 2가 다시 시작했어요. 더 이상 출연하지 못하는 캐릭터인 만큼 아쉬움이 크진 않나요?
맞아요. 요즘 특히 아쉬운 감정이 들곤 해요. 더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선배님들과 연기하는 시간을 더 오래 갖지 못해 아쉬운 것 같아요. 대중에게는 충분히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기회와 발판을 접한 만큼 이후의 행보는 제 몫인거죠.
과거 KBS2 드라마 <우아한 모녀>, MBC 드라마<장미빛 연인들> 때의 소년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네요. 그만큼 캐릭터 변신에 성공했다는 증표죠. 이런 야성적인 얼굴을 보여준 건 처음이죠?
맞아요. 사실 시나리오에는 ‘교포’라는 단어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 단어에서 착안해 지금의 캐릭터
를 구성했죠. 제 이미지와 상반된 모습을 만들고자 다양한 얼굴을 연구했고요. 배우라고 해서 무조건 잘생기고 멋있어 보여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루 두 번 PT를 받고 특유의 제스처와 말투도 만들어냈다고요. ‘캐릭터를 내 식대로 해석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해 보였어요.
무엇보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필립’ 역이었기에 더 욕심이 났죠. 지금 생각해 보면 역할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 작품을 인생의 변곡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그런 벼랑 끝에 선 절실함이 컸어요. 까무잡잡한 피부 톤을 만들기 위해 3개월간 태닝도 꾸준히 했고, 촬영하는 내내 메이크업까지 더했죠. 처음 모니터링할 때는 제 얼굴이 너무 이상해 보여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했어요. 옆에 있던 손석구 형과 손은서 누나의 반응도 안 좋았고요.(웃음)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다 보니 변신한 제 모습이 나빠 보이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스스로 만든 ‘필립’에 만족한 것 같아요.
‘연기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카지노>에 캐스팅되었다고 들었어요.
10년 넘게 활동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제자리에서 맴도는 느낌이었고요. 한동안 연
기를 쉬면서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는데, 그제야 제가 풀리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어요. 돌이켜보면 지난날의 저는 맡은 배역을 그저 ‘상상’해가며 수행했던 것 같아요. 이젠 ‘그 장소와 시간에 살아본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바뀌었고요. 연기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품어내고 표현해야 하는지 깨달은 거죠.
블랙 스트랩의 빈티지 워치와 체인 네크리스, 실버 링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사람 이야기를 잘 다루는 배우가 되고 싶다”. 3년 전 한 인터뷰에서 되뇐 목표예요. 지금의 가치관과 비슷한 면이 많네요.
그렇죠. 연기라는 건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니까요. 삶의 위로, 기쁨, 슬픔 모두 공유할 수 있다는 부분이 가장 큰 권리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값진 모습을 빚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고요.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불안감은 없었나요?
물론 있었죠.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연기자가 같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필드 위에서 쉴 틈 없이 작품을 소화하는 분들도요.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빠질 때는 스스로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곤 해요. 얼마만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인지도 대입해보죠. 이번 <카지노>에 승선하는 시점에는 불안감도 적지 않았지만, 그만큼 비축해놓은 에너지가 있었어요. 그 덕분에 후회 없이 내 모습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요.
지난 20대의 시간 중 후회하는 순간도 있나요?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을 따라간 시간이요. 그 중요성을 깨달은 지 얼마 안됐어요. <카지노> 촬영을 하던 중 최민식 선배가 “배우는 연기에만 신경 쓰면 된다. 생각이 많아질 때 연기 공부를 해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간 연기라는 본질을 소홀히 대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어요. 작품을 소화하는 과정이 벅차고 괴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본질만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카지노> 이전부터 최민식 배우를 롤모델로 줄곧 꼽았죠. 촬영장에서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겠어요.
워낙 대배우라 촬영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너무 소탈하고 순수하신 거예요. 그렇게 한껏 해맑게 장난치시다가도 카메라만 켜지면 연기자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요. 그런 에너지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정말 감사하고 영광이었죠.
2007년작 MBC <이산>으로 데뷔해 연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그동안 성공에 대한 강박은 없었나요?
사실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에 부러워하고 속상해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다만 왜 내겐 기회가 오지 않는 걸까, 왜 나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 순간은 많았죠.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명확한 이유가 있었어요.
정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 그리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면 불필요한 불순물은 덜어내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분명 힘든 순간이 많았을 텐데 연기 활동에 열정을 다하는 이유는 뭐예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어느 순간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이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퇴색시키는 배우는 되지 말자’, ‘작은 배역이라도 허투루 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곤 해요.
옥스퍼드 셔츠와 루스 핏 팬츠 모두 Recto,
블랙 더비 슈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이트 셔츠 모두 Dior Men,
그린 배색의 로톱 스니커즈 Axel Arigato,
베이지 슬리브리스 톱과 체인 네크리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한번 거대한 벽을 깨뜨려야죠. 이번 <카지노>를 만난 것처럼요.“
그렇다면 배우로서 가장 즐겁고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첫 번째는 연기하다 배역에 완벽히 몰입했을 때, 두 번째는 그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분이 사랑해줄 때.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요.
연기 활동을 하면서 성취감을 많이 느끼는 편인가 봐요.
맞아요. 내가 성취감에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도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깨달았어요. 많은 관심을 받아보는 게 익숙지 않다 보니 이런 감정 또한 새로웠죠. 앞으로 더 좋은 ‘얼굴’을 만들어내야겠다는 마음이 커요. 그 자체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번 <카지노>에서 성취감 외에 새롭게 느낀 감정이 있다면요?
익숙함이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촬영장의 낯선 영역에 조금씩 적응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저 넓고 복잡하게만 느껴졌거든요. 이젠 배우가 어떤 가치관으로 연기에 임해야 하는지, 현장에서 어떻게 연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하나씩 이해하고 있어요.
차기작을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한번 거대한 벽을 깨뜨려야죠. 이번 <카지노>를 만난 것처럼요.
이번 작품으로 도전의 폭도 한층 넓어지지 않았을까요?
예전보다 훨씬 주목해주시는 것 같아요. 몇 배를 더할 만큼이요. 그때는 0에 가까웠거든요. 0은 무엇을 곱하든 똑같은 0이잖아요.(웃음) 그만큼 이번 <카지노>가 연기자로서 제게 숨과 꿈을 불어넣어준 거죠.
데뷔 직후 가장 가파른 상향선을 눈앞에 뒀어요. 꼭 유념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연히 본질이죠. <카지노>에 캐스팅됐을 당시의 본능과 열망을 놓치는 순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 거예요. 너무 뻔한 답인가요?(웃음)